별빛이 내리쬐는 부둣가, 보라 사신은 커다란 컨테이너의 그늘 속에서 그림자를 두르고 숨어있었다.
그림자 속에 숨은 보라 사신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어떤 곳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담배를 빼어 물고는 어딘가로 전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멋있어.’
보라 사신이 가진 짧은 어휘로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뭔가 멋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한쪽 눈에 박아 넣은 의안을 제외하면 순수한 인간에 불과한 남자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에서 이겨나가는 것을 멋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차분하게 상황을 풀어나가는 것을 멋있다고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전투 중에 상대방의 공격이 살짝 스쳐서 상처를 입었어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냉정한 것을 멋있다고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겠어.’
황금 사신처럼 뭔가 조건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될 뿐이었다.
보라 사신 입장에서는 그저 보자마자 애착 인간이라고 느꼈다.
그뿐이었다.
“물건은 회수했다. 회수한 물건은 언제나 두던 곳에 두지.”
전화에 대고 자신이 할 말만 한 남자는 순식간에 전화를 끊어버리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주변을 한번 쓱 훑어보았다.
마치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진다는 것처럼.
‘!’
보라 사신은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느끼고 그림자 속으로 꼭꼭 숨어들어 갔다.
그리고 남자가 시선을 떼고 천천히 걸어가자, 그 뒤를 천천히 쫓아가기 시작했다.
***
남자는 차가운 데다 어둡고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거실에 놓인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남자는 들어오면서 산 맥주캔을 하나 마시며, 살풍경한 방을 안주로 삼았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둡고,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이, 침대처럼 쓰이는 소파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인 풍경.
“후우.”
남자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소파에 누워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혔다.
‘언제쯤 너에게 당당하게 다가설 수 있을까.’
죽지 못해서 사는 남자는 어둠으로 가득 찬, 끝없는 터널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그의 여동생이 죽은 날부터, 계속.
“….”
격렬하게 뛰어다니고, 약간의 상처마저 입은 남자의 숨소리가 점점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얕은 수면으로 빠져들어 가는 남자의 시야 구석에 작은 보라색의 인영이 다가와서 눈물을 훔쳐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여동생도 보라색이 참 잘 어울리는 녀석이었는데….’
눈앞에 어른 거리던 보라색 때문인지, 남자는 오래된 꿈을 꿨다.
여동생이 살아있던 시절의 꿈을.
별의 저주를 축복이라고 믿고 있었던 시절의 꿈을.
***
오랜만에 세희 연구소를 돌아다니던 도중, 굉장히 드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엄마!’
‘엄마!’
복도를 뚜방뚜방 걷고 있었더니, 사방에서 황금 사신들이 마구마구 달라붙어 오는 경험이었다.
황금 사신들은 마치 내가 애착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안뜰로 놀러 가자고 보채고 있었다.
물론 황금 사신들이 나에게 놀자고 하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열성적인 것은 처음 황금 사신을 불러냈을 때 정도였다.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나의 뛰어난 두뇌는 이 사태의 원인이 ‘내 마성의 매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버렸다.
내가 뚜방뚜방 걸어가던 곳은 수면실 방향이었는데, 수면실 쪽에서 처음 느끼는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황금 사신을 무시하고 점점 수면실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하자, 황금 사신들은 머리카락을 마구 잡아당기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지?
설마 메카 티라노를 숨겨둔 건가?
황금 사신들의 격렬한 반응에 나는 더욱더 빠른 속도로 수면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메카 티라노!’
나는 힘차게 의지를 뿜어내며 수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수면실의 풍경은 특별한 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꿈속에서 새싹 사신이랑 놀면서 숙면을 하는 사람들.
조그마한 창문에서 들어오는 황혼의 빛.
안절부절못하는 황금 사신들.
그리고 조그마한 미니 미니 사신을 안고 있는 미니 사신.
‘?’
뭔가 이상한 게 보인 것 같은데?
나는 이제 눈으로 보지도 않으면서 습관적으로 눈을 마구 비비적거렸지만, 보이는 것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나는 빠른 속도로 걸어서 새싹 사신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본 새싹 사신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미니 미니 사신을 나에게 들이밀었다.
아기 새싹 사신인가?
저번의 설원에서 보니까, 새싹 사신은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조금씩 증식하던데 이런 식으로 늘어나던 것으로 보였다.
신기하네.
내가 신기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미니 새싹 사신을 콕콕 찌르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미니 새싹 사신은 내 손가락을 잡으려고 버둥거렸다.
뭔가 작은 게 꼼지락거리는 것 같아서, 조금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황금 사신도 알아서 증식하던데, 황금 사신도 아기 황금 사신이 있는 건가?
의문을 품고 황금 사신들을 돌아봤더니, 황금 사신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전투하기 직전처럼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설마 내가 저 작은 아이를 다치게 할까 봐 이러고 있는 건가?
요즘 엄마 취급이 너무한데!
정말 신용등급이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손바닥을 내밀자, 새싹 사신은 미니 새싹 사신을 자랑하듯이 내게 넘겨줬다.
나는 손바닥 위에 놓인 새싹 사신을 살살 주무르면서 황금 사신들을 바라보았다.
황금 사신들이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전전긍긍하는 모양새가 왠지 조금 웃겼다.
뽀각.
그렇게 속으로 히히 웃는 순간, 뭔가가 부러지는 감각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
황금 사신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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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라서 시선을 돌려보니, 미니 새싹 사신의 잎사귀 하나가 똑하고 잘려서 내 손에 들려있었다.
잎 하나가 뽑힌 미니 새싹 사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않고, 축 늘어져 있었다.
‘어… 어떡하지? 죽은 건 아니지?’
내가 떨어져 나온 잎사귀를 붙이려고 장작을 잔뜩 퍼부으며 붙이려고 하는 순간, 황금 사신들은 나에게 달려들어서 마구마구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감정이 실려서 생각보다 매서웠던 주먹질은 잎사귀를 제대로 붙여준 뒤, 미니 새싹 사신을 새싹 사신에게 돌려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힝.
놀아주고 싶었을 뿐인데….
***
예린은 세희 연구소를 나서면서 조그마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오늘 사신이는 조금 이상했지.’
수면실에서 황금 사신들과 새싹 사신이랑 놀고 있는 회색 사신이라니.
품에 안고, 간식을 먹여주고, 쓰다듬기.
회색 사신이 큰 잘못을 했을 때만 하는 서비스일 텐데.
뭔가 잘못이라도 한 걸까?
뭐, 그래도 황금 사신이랑 새싹 사신이 즐거워 보였으니 괜찮은 거겠지.
예린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세희 연구소 주차장을 나서서, 셔틀버스 정류장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굉장히 보기 드문 행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뚜방뚜방 줄지어서 돌아다니는 황금 사신의 행렬이었다.
마포구에 퍼져버린 황금 사신 덕분인지, 요즘 황금 사신들이 밖에서 자주 돌아다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줄지어서 돌아다니는 모습은 보기 드물었다.
예린이 핸드폰을 꺼내서 황금 사신의 행렬을 찍고 있자, 황금 사신들이 고개를 돌리더니 환하게 웃으며 예린에게 달려들었다.
예린의 몸 위에 잔뜩 달라붙은 황금 사신들.
마치 놀러 가자는 것처럼 헤실헤실 웃고 있는 황금 사신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서 말을 걸었다.
“같이 가자고?”
그러자, 황금 사신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예린은 마치 복권에라도 당첨된 기분으로 힘차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황금 사신은 사람 말을 상당히 잘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어떨 때 보면 회색 사신보다 더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회색 사신은 다 알아들으면서 무시하는 거였지만 말이다.
이제 회색 사신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언제까지 말을 모르는 척하려나?
***
예린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황금 사신들을 집안에 풀어놓았다.
토다닥거리는 귀여운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예린은 몸단장을 마치고, 미니 사신들을 위해 준비해 뒀던 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상자에서 나오는 회색 사신용 고라니 잠옷,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미니 사신 사이즈의 고라니 잠옷들.
“자, 갈아입자. 파자마 파티야!”
황금 사신들은 예린이 하는 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긍정적인 감정을 잔뜩 뿜어내는 예린의 반응에 맞춰서 만세를 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처음 황금 사신을 집으로 불러들인 이후, 다시 황금 사신과 집에서 놀게 될 순간을 기리며 계속 만들어 온 수제 고라니 잠옷이었다.
‘만들어 두길 잘했네.’
똑같은 옷을 입고 히히 웃는 황금 사신들을 보니, 그간의 노고가 보답받는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미니 고라니 잠옷의 숫자는 대단히 많아서 예린의 집에 놀러 온 황금 사신들에게 모두 입힐 수 있었다.
맛있는 과자를 나눠 먹고, 같이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고.
높은 책장 위에서 침대 위로 점프하고.
각자 즐거운 방식으로 노는 황금 사신 중에서, 고라니 잠옷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 상자 안을 탐색하던 황금 사신이 있었다.
‘!’
그 안을 탐색하던 황금 사신은 뭔가를 발견하고는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튀어나왔다.
황금 사신의 손에는 아주 낡은 옷가지가 하나 들려있었다.
“아, 그거? 어렸을 때 입고 있었다는데,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예린.
황금 사신의 손에 들린 옷은 매우 낡고 너덜너덜한, 그리고 아주 작은 옷이었다.
색이 바랬지만, 흑색과 백색이 조화된 특이하게 생긴 복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