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6
칼은 저 앞에서 여유롭게 움직이는 루시를 가만 바라봤다.
작금의 전투는 다 대 일의 전투였다.
상대는 나름의 구성을 갖춘 마물무리.
함께 던전을 공략하는 입장이니만큼 본래라면 그도 루시의 옆에 서야 했겠지만 칼은 그러지 않았다.
루시가. 그의 주인이. 뒤를 지키라고 명을 내렸기에.
전투를 살피는 칼의 눈에 불안감은 없었다. 저 정도 무리를 상대로 루시가 패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
칼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루시가 마물무리를 일소하는 데에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으니까.
거대한 두 손 도끼를 들고 있는 해골의 공격을 가뿐히 받아내어 해골의 중심을 흐트러트리고.
녀석을 걷어차 넘어트리는 것으로 대기 하고 있던 적들의 움직임을 방해.
바닥에 널부러진 해골들을 짓밟으며 달려선 맨 뒤에 있는 마법사를 처리.
가까스로 일어나는 녀석들을 차례대로 쓰러트리는 루시의 모습에 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우리 아가씨다. 어깨에 힘을 뺄 줄 모르는 초임 기사 나부랭이들보다 훨씬 낫군.
그 놈들은 무기를 휘두르는 건 그럭저럭 괜찮지만 정작 전투가 이어지면 어버버거리지.
허나 아가씨는 다르다.
달려들기 전에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전투의 구도를 구상한 후에 달려들어 그 때 그 때 생기는 변수에 최적에 대응을 하는 모습은 이미 숙련된 전사라
불러 마땅한 수준.
그 누가 저를 보고 전투 경험을 쌓은 지 1년밖에 안 된 사람이라 생각할까.
칼이 속으로 루시에 대한 찬양을 끝없이 이어가던 그 순간. 갑작스레 루시의 아래에 어둠이 몰려들었다.
전투에서 떨어져 있기에 그 이상을 바로 포착할 수 있었던 칼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멍청한 놈아. 가만있으라고 몇 번을 말하느냐.’
그런 칼을 가로막은 것은 그의 머릿속에서 울린 목소리였다.
루시가 언젠가부터 항상 데리고 다니는 여우. 한 숲을 관장하는 자가 칼에게 핀잔을 준 것이다.
한심하단 어투에 칼의 발이 멈칫한 그 때.
루시가 즉각적으로 발아래의 기운에 대처했다.
자신이 지닌 신성을 발끝에 모아 짓눌러 부정한 기운을 흩어버렸으니. 갑작스러운 위협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저 정도로 네 주인이 다칠 듯 싶더냐?’
‘그건 압니다만.’
‘그런데 왜 움직이는 것이냐.’
‘…’
‘쯧.’
들으란 것처럼 혀를 차는 소리에 칼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칼도 안다. 루시가 이 곳에서 위험을 겪을 리 없단 사실을 말이다.
그는 루시가 처음으로 던전에 들어갈 때부터 항상 옆에 있었다.
기사 훈련에 함께한 루시를 옆에서 보좌했을 때에도. 그녀가 아카데미의 던전에 들어갈 때에도. 무얼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카데미 인근의 던전을 이잡듯이 공략할 때에도. 메네스테일로 향해 그 곳을 빠른 속도로 주파할 때에도.
항상.
언제나.
루시의 곁에 머물렀다.
칼은 누구보다도 루시가 지닌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이 던전에 있어서만큼은 전지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칼은 루시가 맨 앞에 선다고 했을 때 칼은 별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자신의 아가씨는 만용을 부릴 사람이 아니다. 가능한 것은 가능하다고 말하고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 이야기하시는 분이다.
그러니 선두에 설 테니 따라오기만 하라는 것은 아가씨께서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라 판단했기 때문.
칼도 이성으로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몸이 저를 따라주질 않았다.
루시가 위험에 처할 때면 메네스테일에서의 풍경이 절로 떠올랐으니까.
고기방패조차 되지 못하던 처참한 자신. 루시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춘 단검. 창백하게 물든 얼굴 아래로 보이는 오들거리는 손.
잠을 청할 때면 칼은 그 때의 풍경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현실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의 꿈 속에는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러한 광경을 수도 없이 본 탓일까. 칼은 루시가 위험해 보일 때면 무작정 생각한 것보다 먼저 몸을 움직이곤 했다.
‘시킨 일만 하는 것도 못하는 우둔한 녀석 같으니. 그대 때문에 내가 저 향기롭고 부드러운 머리칼을 떠나 역겨운 네 어깨 위에 머물러야 하지 않으냐.’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칼은 진심으로 기분 나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여우의 얼굴을 보곤 입술에 힘을 더했다.
기품 있어 보이는 이 여우는 분명 대단한데다 루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다.
과거 그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칼이다. 그 사실을 어찌 부정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숲의 주인이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칼은 이런 걸 아가씨의 옆에 둬도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숲의 주인이 지닌 격과는 별개로 그녀가 상종도 하기 싫은 변태란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
‘변태는 누가 변태냐. 뒤에 놈을 속인단 핑계로 제 욕망을 채운 쓰레기가.’
‘그!… 그건 핑계가 아니었습니다!’
루시가 근거 없는 명령을 내리지 않음을 알면서도 칼이 명령에 불복한 것은 어디까지나 루카를 속이기 위함.
거기에 그릇된 의도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칼이 열변을 토했지만 여우는 그를 조금도 믿어주지 않았다.
‘오. 그래?’
‘예! 그렇습니다!’
‘개 취급을 당했을 때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노라 맹세할 수 있는가?’
칼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루시와 있을 때를 제외한다면 고지식한 기사 그 자체인 그는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었으니까.
‘그. 저. 아가씨께서 시킨 일에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칼은 다급히 화제를 바꿨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한 번 어둠에 잡아먹힌 루카는 또 다시 어둠에 잡아먹힐 가능성이 농후하셨다.
그러니 내 역할은 허접 후배가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막아내는 것. 그 이외의 일은 신경 쓰지 않겠다!
누가 보더라도 티가 나는 모습이었지만 여우는 칼을 한심하게 바라볼 뿐 굳이 추궁을 하진 않았다. 뻔한 걸 따져 물어 무얼 하겠냔 것처럼.
한 사람과 한 마리가 이러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루시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이전에 왔던 길과는 전혀 다른 경로였지만 칼도 루카도 루시의 발걸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가 던전 안에서 길을 잃을 리 없단 걸 둘 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대략 삼사십분 정도를 걸었을 무렵. 던전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문만이 아니었다.
그 앞에는 문을 지키는 문지기 또한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보는 군.”
기다란 회백색의 검.
몸짓에서 묻어나는 무인의 향취.
해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깔끔하고 진중한 목소리.
칼은 저 해골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시간도 안 지난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가라드.
세상을 구원한 영웅의 일각.
칼이 동경하는 기사의 이름 중 하나.
“뭐야. 개뼈다귀. 방패를 준 것도 모자라서 검도 주려고?”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창피하게도 조종당하는 몸이거든.”
“우와. 진짜 한심하네. 그러고도 영웅이야?”
“허나 어쩌겠는가. 현실이 이런 것을.”
검을 치켜드는 가라드의 모습에 칼이 다급히 무기를 빼들었다.
저는 아직 아가씨께서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우리 셋이 전력을 다해야 간신히 상대할 수 있는 적이다.
“전력을 다하거라.”
가라드가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친 순간 루시의 주변을 제외한 모든 곳에 어둠이 들어찼고. 그에 따라 칼과 루카가 검은 안개에 집어 삼켜진다.
젠장. 아가씨!
안개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칼이 다급히 내달린 순간 주변의 풍경이 바뀐다.
숨이 턱하고 막히는 이글거리는 공기.
저 멀리에 널부러져 있는 알새틴.
몇 걸음 너머에 보이는 겁에 질린 아가씨의 모습.
그 목을 향해 내질러지는 단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칼은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꿈 속에서 지겹도록 보았던 끔찍한 모습을 또 다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확신했을 뿐.
당연하지 않은가.
아가씨께서는 신의 사랑을 받는 분이시다. 위대하신 주신께서 보우하는 분이란 말이다.
그런 분께서 저리 처참한 꼴이 될 리가 없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이야기일지니.
시각을 믿지 마라.
촉감을 믿지 마라.
후각을 믿지 마라.
청각을 믿지 마라.
한 사람의 기사가 믿어야 할 것은 자신의 직감 뿐일지어니.
감아진 눈꺼풀.
이글거리는 공기.
화산의 불쾌한 냄새 끝에 묻어나는 피비린내.
사람의 인형이 털썩하고 무너져내리는 소리.
그 모든 것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칼은 어딘가로 향하는 살기를 느꼈다.
그랬기에 직감을 따라서 검을 휘둘렀다.
채앵!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풍경이 뒤바뀐다.
검은 색의 안개.
저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과거의 영웅과 영웅이 되어가는 이의 투쟁.
여자아이의 등 뒤를 노리던 비열한 단검.
그리고 그를 가로 막은 자신의 검.
칼은 이성이 날아가버린 루카의 눈빛을 보고서 상쾌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아가씨다.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계셨구나.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아가씨가 시키신 대로 이 멍청한 후배를 제압하면 될 일이니까.
‘적당히 시간을 끌어라. 정신을 차리게 만들테니.’
몇 번의 검격이 지나가는 사이에 여우가 목소리를 냈지만 칼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희만의 방식이 있으니까요.’
‘저희?’
‘예. 알른 가문의 기사들은 말입니다. 누군가 정신이 나갔을 때에 정신을 차릴 때까지 때려 패줍니다. 나약한 정신을 가진 게 잘못이라면서요.’
칼은 이번에도 알른 가문의 전통을 따를 생각이었다. 허접 후배에게 선배의 위엄을 알려주는 김에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여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칼의 어깨 위에서 뛰어 내렸다.
‘마음대로 해라.’
‘예!’
자! 허접 후배! 그대에게 위대한 알른 가문의 전통을 느끼게 해주겠다!
영광스러운 경험이 될 테니 감사하도록!
*
안개 너머에서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루카가 어둠에 먹혔고 칼이 그를 가로막은 것이겠지.
양상이 어찌 진행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칼이라면 얼빠여우가 정신을 되찾게 해 줄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터.
“딴 눈을 팔 틈이 있나?”
어깨를 노리고 내질러지는 검. 방패로 옆면을 쳐낸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틈이 드러나야 마땅한 상황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해골이 그런 틈을 허용할 리가 있나.
내가 공격을 시도하기도 전에 검을 회수한 녀석은 또 다시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날 위협했다.
공격. 공격. 그리고 공격.
아주 지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불평이 절로 새 나왔지만 난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달려들었다가는 수많은 검로 사이에서 놀아나며 손질당할 게 분명했으니까.
“이전의 기세등등함은 어디 갔지? 방패 뒤에 숨어서 나올 줄을 모르는 게 꼭 그림자에 숨은 벌레 같군.”
해골은 일방적인 공격을 이어나감과 동시에 도발을 퍼부어 댔다.
이 정신 나간 해골 새끼.
시련 때 내가 했던 말들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걸 거야.
영웅이라는 인간이 이렇게 속이 좁아서야 쓰나.
여자애가 장난을 치면 관대하게 받아서 넘겨줄 줄도 알아야지.
근데 얘 진짜 도발 못 하네.
기사도를 중시하는 스타일이라 그런가?
“푸하핳♡ 자그마한 여자애를 괴롭히면서 히히덕대는 꼴이라니!♡ 영웅님께서는 그런 취향이셨구나!♡ 어쩐지!♡ 원래 겉이 멀끔한 사람일수록 속이 이상하다던데 진짜였네!♡”
“내가 그런 수작에 넘어갈 거라고…”
“근데 좀 신기하다!♡ 아무것도 없는 해골이 어떻게 변태일 수가 있지?♡ 아!♡ 있던 게 사라진 공허함을 변태성으로 달래는 거구나!♡ 불쌍해라~♡ 입을 나불거려봐야 공허함만 더 커질 텐데~♡”
“…”
“저기♡ 저기♡ 한 가지 물어봐도 돼?♡ 악신 때문에 공격하는 척 자기 욕망을 달래면 자괴감 안 들어?♡ 응?♡”
입을 다문 해골이 재차 검을 휘두른다.
분명 그 검에는 방금 전보다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