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9
미와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의 사도인 프레테는 검정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정신을 차렸다.
가장 먼저 그를 찾은 감각은 고통이었다. 몸 이곳저곳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시피했다.
나는 어제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모르겠군. 떠오르는 게 없어. 머리가 여러 역겨운 생각들로 물들어 제대로 된 기억을 돌이킬 수가 없으니 말야.
우선 주변부터 파악을 해볼까.
앞이 보이지 않는 군. 안대에 의해 시야가 가로막힌 것인가?
아냐. 얼굴 근처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흠? 얼굴 근처에서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게 아니군. 손이고 발이고 피부고 뭐고 촉감 자체가 사라진 상태야.
손목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 걸 보니 무언가에 묶인 것 같은데.
…냄새가 안 나는 것은 당연하고.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데에도 아무런 소리가 안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자신에게 그 어떤 위기가 닥쳤을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프레테는 태연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간에 땅을 침대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신의 말씀을 전하는 그는 다소 과할 정도로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죽지 않았으면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하며 다시금 눈을 감으려 들었으니까.
“야. 야. 자지 마. 미친놈아.”
그 때였다. 주변에서 처음으로 소리가 들려왔다.
먼 과거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듯한 목소리. 희미하게 기억이 남은 걸 보면 약간은 아름다우신 분이었나 보군.
“머리에서 그 어떤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는데 잠자는 것 말고 무얼 하겠습니까.”
“보통 그러면 겁에 질리는 게 정상 아냐?”
“죽으면 죽는 거죠. 아름다우신 여신의 존안을 뵐 수 있게 되는 것인데 무엇이 두려울까요.”
“…와. 얘는 십 년이 지나니까 더 미친놈이 돼버렸네.”
따악!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검정이 걷히며 주변의 풍경이 드러난다.
우선 보이는 것은 우중충한 벽돌로 된 감옥의 천장.
자신의 사지를 묶고 있는 철로 된 수갑.
고문이라도 당한 듯 엉망이 되어 있는 몸.
그리고 마지막으로. 먼 과거에 보았으며, 다신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던 여인의 얼굴이었다.
“카리아?”
“그래. 나다. 이 변태 자식아.”
“…죽었다고 들었는데요.”
“그거 이야기하려면 복잡하거든? 빨리 머리나 굴려.”
머리나 굴리라니?
아. 과연. 여러 감각이 돌아오면서 머릿속 역겨운 것들도 사라졌구나.
그를 인지하고 나자 프레테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정보들이 떠올랐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여신의 인도.
버로우 영지에서 세상을 추로 물들이려는 자들이 있다 하셨기에 정체를 숨긴 채 그 곳으로 발을 옮겼다.
이 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장소였지만 프레테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을 미와 추로 구분하는 그에게 영지에 깔린 추악함은 보기 싫어도 절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으니.
프레테는 영지에 들어오고서 머지않아 영지 전체가 악신의 손아귀에 들어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곳이 버로우 가문이라는 것도 말이다.
모든 걸 파악한 그는 일단은 몸을 물리고 교단의 성기사들을 데려와 정화를 위한 성전을 펼칠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나름 여러 수단을 사용해 사도의 흔적을 지웠거늘 악신의 눈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프레테는 필사적으로 이 영지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어둠은 아무리 내달린다 하여도 끝을 보이지 아니했으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항전하다 쓰러지는 일 뿐이었다.
“다 기억났어?”
프레테는 입에 고인 피를 대충 뱉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충은.”
“내가 없는 십 년 사이에 얼마나 약해진 거냐? 탈출조차 제대로 못 하다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싸울 기회조차 얻지 못했거든요.”
정체를 들켰음을 깨닫자마자 영지를 집어 삼킨 어둠.
그 안에 도사리던 무수히 많은 함정들.
그 속에서 깎여나가던 끝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악신의 사도와 그 앞을 지키듯 서 있던 버로우 공작.
만전의 상태에서 대치해도 아슬아슬할 협공을 쓰러지기 직전에 마주했으니 패배하는 것 말고 방법이 있겠는가.
“그리고 말입니다. 약해진 걸로 따지면 카리아님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과거 전성기 당시에는 베네딕 알른과 함께 왕국을 지키는 기둥이라 여겨졌을 만큼 뛰어난 힘을 지녔던 그녀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금 프레테의 앞에 있는 카리아는 기껏해야 평범한 기사 나부랭이 하나 정도의 힘밖에 지니고 있지 못했다.
흠. 그러고 보면 기이하군. 아무리 카리아님이 이런 첩보에 능하다 할지라도 저 정도 힘을 가지고선 어둠의 악신을 속일 수 없을 터인데?
…혹여 지금 내가 환상을 보고 있는 건가? 이 곳의 재앙을 바깥으로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내 앞에 환각을 만들어낸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만일 내가 환각을 만들어냈다면 좀 더 아름다운 것으로 했겠지.
예를 들자면. 그래. 얼마 전 파트란 영지에서 보았던, 여신께서 지상에 현신하신 듯한 아름다움을 지녔던 그 분처럼 말이다.
아. 또 다시 그 분과 만나고 싶군.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졌으며, 귀에서는 천상의 음악이 들려왔고, 여신께서 저 아름다움을 축복해야 한다 소리치던 그 광경을 다시금 느끼고 싶어.
그 분의 발밑에 조아린 채 그 날 선 눈빛을 받아내면서…
“…역겨운 변태새끼야. 적당히 좀 해.”
“오. 표정을 읽는 능력은 그대로시군요?”
혹여 악신이 카리아님의 흉내를 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만 아니군. 다행스러운 일이야.
“할 말 있냐?”
“예. 중요한 일입니다. 카리아님. 지금 이 영지에 거대한 흑마법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악신의 추종자들과 싸워온 프레테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흑마법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 그는 도주 과정에서 보았던 마법진의 정체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악신의 사도는 이 영지 자체를 산제물로 바칠 생각입니다.”
“…미친. 진짜야?”
“예. 그 흑마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모르지만 이 영지의 생명이 모두 희생될 것은 분명합니다.”
재앙을 통해 더 거대한 재앙이 피어날 것이다. 그 일만큼은 막아내야 한다. 프레테가 그리 이야기를 하자 카리아가 한 쪽 눈썹을 내렸다.
“더 자세하게… 아. 젠장. 급해졌으니까 대충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기에 구원이 올 거야. 그 때 안에서부터 터트릴 생각이니까 힘을 비축해놔. 이해했어?”
“예.”
앞 뒤의 여러 사정이 빠진 이야기였지만 프레테는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다른 이의 머리가죽을 꺼내는 카리아에겐 그럴 여유가 없는 듯 했으니까.
“아. 참. 그리고 마음의 준비 좀 해 둬.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고문하던 척 할 거거든.”
“…예?”
고문…이요?
“손바닥에 구멍내고. 옆구리 좀 긁고. 장기 좀 만져야지.”
머리가죽을 뒤집어 쓰기 무섭게 카리아의 목소리가 바뀐다. 약간 가벼운 여성의 목소리에서.
음침하고 걸걸한 중년의 목소리로.
“걱정마. 아프게만 할 테니까. 그러니 비명 좀 실감나게 질러줘.”
…그거 어차피 강제로 비명지르게 만들 예정 아니십니까?
프레테의 마음 속에 절로 그런 말이 새겨졌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 말을 바깥으로 내지 못했다.
그러기 전에 그의 입 안을 비명소리가 가득 채워버렸으니까.
*
할배의 말은 옳았다.
내 해석이 맞다고 믿고서 무작정 나아가다보니 어느 순간 승기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그 승기의 기반은 해골이라 하여 언제까지 침착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보통의 상대라면 모를까. 메스가키 스킬의 앞에선 이상 해골의 안에도 분노가 쌓이기 마련.
해골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엔 중간중간 때려 주는 것으로 그 분노를 해소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방어에 치중하고 있는 이상 해골에게 내 방패를 뚫을 능력은 없으니. 해소되지 못한 분노는 점차 쌓여가면서 해골의 마음을 좀 먹을 수밖에.
보라. 지금 저 녀석이 휘두르는 검을.
검로를 보고 있으면 절로 감탄이 나오던 검술은 어디로 가고 다급하고 필사적인 공격만이 남지 않았는가.
티잉!
이를 악물고서 해골의 공격을 막아낸 후 방패 너머로 미소를 드러냈다.
“에에♡ 뭐야 이 소녀소녀한 공격은♡ 키도 작고♡ 좆도 없고♡ 연약하기까지 한 거야?♡ 그렇구나~♡ 개뼈다귀는 기사님이 아니라 영애님이었구나♡”
도발에 대한 답 대신 검격이 날아들지만 문제는 없다.
시련의 장소에 있을 때라면 모를까. 잔뜩 약화된 지금 해골의 검은 위협적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다.
어쨌든 간에 해골의 검은 평범하니까.
이번엔 오른 쪽. 처음에 비해 검로가 상당히 흐트러져 있네.
저 정도면 받아내는 게 아니라 흘려내는 것도 가능하겠다.
판단을 내리기 무섭게 방패를 움직이자 방패의 면을 타고서 해골의 검이 미끄러진다.
그에 따라 해골의 중심이 일순 흐트러졌지만 난 파고들지 않고 다시 방패를 치켜들었다.
방금 전 그 틈은 결정적인 틈이라 할 수 없었으니까.
“해골 영애님~♡ 자꾸 그렇게 귀엽게 움직일 거에요?♡ 크흡♡ 큽♡ 근데 어떡하죠?♡ 해골이 아무리 노력해도 저처럼 귀여워 질 순 없을 텐데~♡ 불쌍하셔라♡”
“방패 뒤에 숨기만 하는 겁쟁이가!”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몰아치는 공격을 가만 본다.
이성을 잃어가는 탓일까.
저 공격에선 해골이 본래 가진 버릇. 게임의 패턴이 묻어나왔다.
그래서 별 위험 없이 튕겨냄에 따라 다시금 해골에게서 큰 틈이 드러난다.
허나 그럼에도 난 앞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저 틈 사이에 공격을 찔러 넣어 끝을 볼 자신이 없었기에.
“나와라! 기사 답게 정정당당히 싸우란 말이다!”
“화났어?♡ 열 받았어?♡ 그럼 나오게 해 보든가~♡ 못 해?♡ 무리야?♡ 하긴 해골 영애님의 검법은 짧은 다리처럼 귀여우니까♡”
방패의 너머로 해골이 치켜드는 검을 본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기본적이고 뻔하지만 그 어느 것보다 위력적인 공격.
그리고 과거 빙의하기 전의 내가 지겹도록 마주했던 공격.
명백한 기회라고 순간 판단내렸던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지만 저 해골이 세 번이나 실수를 반복한다고?
수많은 도발 속에서도 자신의 검을 수정하며 날 몰아붙이던 녀석이?
그 의심을 따라 섣불리 움직이기보다 먼저 해골을 살핀다.
짧게 내딛은 걸음.
위로 올려 잡은 검.
살짝 치켜 올라가 있는 어깨.
흐응. 튕겨날 걸 예상하고 회수할 준비를 하고 있네.
실수한 척 끌어들이려는 거구나?
어지간한 걸로는 안 들어오니까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회를 만들어내려는 거야.
급하네. 급해. 진짜로 열이 받기는 했구나?
처음 마주했던 때의 해골이었다면 좀 더 공을 들여서 미친 짓을 저질렀을 텐데 말야.
일단 속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해줄게.
네가 급했던 덕분에 의도를 읽을 수 있었고, 그걸 이용하는 게 가능해졌으니까.
지금 내지르는 공격의 위력과 타이밍은 내가 수도 없이 보았던 것과 일치한다.
튕겨나갈 것을 대비해 회수할 준비를 하고 있을 뿐. 공격에는 차이가 없단 말이다.
그럼 있잖아. 방패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패링을 하는 것도 가능해.
속으로 기도문을 읊는다.
사용하려는 것은 방어의 기적.
신성으로 이루어진 방패를 만들어 내는 마법.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타이밍에 만들어진 방패는 너무나도 가뿐히 해골의 검을 튕겨냈고 그에 따라 거대한 틈이 만들어 진다.
그리고 나는.
저 공격을 막아내는 데 방패 하나 움직인 적이 없던 나는.
해골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저 안으로 파고들 수 있지.
저는 이를 악물고서 검을 휘둘러 날 물러서게 만들려하지만 어설픈 동작에서 이루어지는 공격의 위력은 나약하니.
나의 방패에 가로 막힐 뿐이다.
해골과 나의 거리가 좁혀졌고.
녀석의 텅빈 눈이 나의 웃음을 마주했으며.
다급히 회피를 시도하는 해골을 보며 메이스를 위로 치켜들어서.
전력을 다해 앞으로 내질렀다.
메이스가 해골에 닿음에 따라 손에 충격이 전해지고 내 성공을 축하하듯이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 띠링!
[퀘스트 클리어!]
[어둠의 악신이 장악한 던전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전의 업적과 지금의 업적이 합쳐집니다!]
[보상 ‘신성 영역’이 지급됩니다!]
내가 이겼다.
이 좆밥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