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 연구소 휴게실에서 은은한 TV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최근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 벌어진 ‘별의 종말’ 사태의 원인으로 ‘회색 사신’이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에 한국 오브젝트 협회는 세희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회색 사신 관리 실태를 점검하고, 안전 관리 프로토콜을 미국 수준으로 끌어올릴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어찌 보면 세희 연구소와 아주 관련이 깊은 뉴스였지만, 헬멧 연구원은 그 뉴스를 그저 흘려들을 뿐이었다.
‘오브젝트 협회에서 제대로 된 조사를 할 리가 없지.’
협회의 조사에 신경 쓰기에는, 헬멧 연구원은 협회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헬멧 연구원은 길쭉한 막대 모양 과자로 황금 사신과 놀기 바빴다.
“아.”
헬멧 연구원이 입을 벌리자, 황금 사신도 따라서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 입 안에 막대 과자를 쏙.
그러면 황금 사신은 행복한 표정으로 과자를 오독오독 먹었다.
‘생각보다 치악력이 세 보이네.’
헬멧 연구원은 황금 사신이 과자를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났다.
“다시, ‘아’ 해봐.”
그래서 다시 황금 사신의 입을 벌리게 만든 뒤, 자기 손가락을 물려주었다.
“꽉 물어. 꽉.”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던 황금 사신은 ‘앙’하고 물었다.
이빨이 둥글둥글해서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충분히 세게 문 것으로 보였다.
그대로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황금 사신이 대롱대롱 매달린 채, 공중으로 떠올랐다.
‘자기 몸을 치악력으로만 들어 올릴 정도는 되네.’
뭔가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 같기도 해서, 헬멧 연구원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황금 사신을 바닥에 내려주자, 황금 사신은 연구원의 손끝을 할짝거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프지 않아?’
마치 인간이 깨지기 쉬운 도자기인 것처럼, 황금 사신은 굉장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뭐, 대물 저격 총에 맞아도 멀쩡한 황금 사신 입장에서는 당연히 인간이 깨지기 쉬운 유리병 같겠지.
“괜찮아.”
헬멧 연구원은 황금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새 시간이 상당히 많이 지나간 상태였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네.’
헬멧 연구원은 황금 사신을 다시 자기 헬멧 속에 수납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니 사신들과 노는 연구원이 잔뜩.
노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어떻게 연구소가 유지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휴게실보다 안뜰 쪽이 배는 많은 사람이 놀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희 연구소에 온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어.’
협회에서 하는 일의 1/10 정도만 하는데도, 세희 연구소의 에이스 취급이었다.
헬멧 연구원의 세희 연구소에 대한 평가는 간단했다.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연구소.’
제대로 일을 하는 건 박서아 부소장과 김중뢰 선임 연구원, 두 명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보안 요원도 미니 사신과 간식 먹으면서 놀기만 했고, 순찰과 경비는 전부 황금 사신이 대신 뚜방뚜방 했다.
가끔 자물쇠가 망가진 격리실도 있을 정도였다.
만약 황금 사신이 노려보고 있지 않았다면, 진작에 오브젝트가 탈출했을 것이다.
심지어 몇몇 연구원들은 서류 작업도 미니 사신에게 떠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각자의 애착 사신에게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는 가증스러운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다만 푸른 사신을 제외하면 제대로 익히질 못하고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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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멧 연구원은 헬멧 속의 황금 사신을 향해 미소 지으며, 휴게실을 나섰다.
***
미니 사신들이 잔뜩 달라붙은 ‘초거대 푸른빛 회색 사신’이 미니 사신 정원을 마구 뛰어다니고 있었다.
크기가 크기이니만큼 정말 번개 같은 속도였다.
‘빨라!’
미니 사신들은 마치 놀이 기구에 탄 아이들처럼 즐거워했다.
‘언제 엄마가 싫증을 내고 안 놀아줄지 몰라!’
이런 느낌으로 마구마구 달라붙어 오던 미니 사신들이었지만, 계속 놀아줘서 그런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상냥한 엄마라며 굉장히 좋아했다.
후후, 상냥한 엄마 주간이 점점 효과를 보는 것 같네.
이러다가 다들 방심하면 큰 장난을 한 번 정도 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목표는 황금 사신들이 애지중지하며 눈을 쌓아서 건설하고 있는 거대 도시.
모래성의 눈 덩어리 버전이었는데, 그걸 부수면 어떨지 견적을 재고 있었다.
히히.
나는 거대 푸른빛 회색 사신을 조종하면서, 회색 사신의 원래 몸으로는 잠이 든 것처럼 누워있는 ‘푸른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기하네. 왜 살리지 못하는 거지?’
사실 거인으로 아이들이랑 놀아주기 전에, 푸른 소녀의 부활을 실험해 봤었다.
부활시켜서, 이제까지 애매모호하고 궁금했던 것들을 전부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아무리 거인의 능력을 사용해도, 푸른 소녀의 영혼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푸른 소녀는 오브젝트가 아닌 건가?
하지만 푸른 소녀의 시체를 보면 오브젝트인 것은 명확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더듬이를 혹사시키던 중, 보라 사신이 그림자 속에서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온몸을 다친 것처럼,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는 보라 사신이었다.
‘?’
저렇게 다친 보라 사신이 있었던 건가?
그 보라 사신은 굉장히 행복한 표정으로 나에게 달라붙었다.
‘엄마! 도와줘서 고마워!’
내 뺨에 자기 뺨을 마구 비비는 보라 사신.
평소처럼 겉멋을 챙기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고마워 보였다.
자신과 애착 인간을 위해서 미니 사신 정원의 모두를 이끌고 와서 감동했다고 했다.
물론 나는 그런 적이 없었지만, 능청스러운 얼굴로 보라 사신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그럼. 나는 언제나 너희들을 생각하고 있단다.’
말투가 너무 작위적이라서 그런지, 보라 사신은 조금 수상하다는 표정이되었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다시 달라붙었다.
‘그나저나, 불편하지는 않아? 고쳐줄까?’
푸른 거인에게 당한 것처럼 온몸이 너덜너덜한 보라 사신에게 물었지만, 보라 사신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괜찮다고 했다.
‘뭐, 괜찮다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보라 사신은 한참을 달라붙어서 고마움을 표하더니,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장난을 마구마구 치고 싶어지는 부탁이었지만, ‘상냥한 엄마 주간’이라서 그냥 들어주기로 했다.
요즘 너무 착한 거 같아.
히히.
***
미니 사신 정원 깊숙한 곳, 핫초코의 바다 한가운데.
푸른 사신들은 자신들의 아지트에 모여서 뭔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별처럼 빛나주세요!>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강한 엄마 골렘’을 개량하는 작업이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거대 엄마를 보는 순간, 푸른 사신들은 너무 행복했었다.
언제나 행복한 황금 사신마저 ‘부러운 동생!’이라고 할 정도였다.
푸른 사신들은 그 행복을 표현하기 위해서, 골렘을 개조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대 엄마처럼 크게!
거대 엄마처럼 빛나게!
하지만 10명밖에 안 되는 푸른 사신의 힘으로는 그렇게 거대한 엄마 골렘을 만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거대 엄마처럼 신비로운 푸른 빛을 뿜어내는 것도 좀처럼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푸른 사신들의 고민은 점점 깊어지기만 하고 있었다.
***
‘별의 저주’가 사라지고, 모든 ‘선택자’가 일순간에 죽어서 사라져 버린 이탈리아 남부.
무너진 남부의 재건과 재생 그리고 변화에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혼란 속에서, 한 남자가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선택자’라고 주변을 속이면서 살아왔던 남자였다.
하고자 했던 일을 대부분 마치고, 이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만이 남겨진 남자였다.
‘가버린 건가…. 쓸쓸해지겠군.’
남자는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고향 집을 돌아보며, 쓸쓸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느새 따라오기 시작했던, 보라색의 작은 친구.
보라 사신은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감정을 눈으로 쏘아 보내는 것 같은 녀석이라서,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보라 사신은 자신이 걷던 ‘해결사’의 삶을 동경하던 녀석이라고.
그래서 남자는 이렇게 될 것 같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권총을 들었던 이유를 모두 이뤘으니, 남자는 어제 고향으로 돌아와서 여동생의 무덤에 애용하던 권총을 묻었다.
아마, 그래서 떠나간 것이겠지.
이미 권총을 놔버린 자신을 따라다닐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이리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더 이상 다치지 않고 잘 있었으면 좋겠네.’
남자는 온몸이 녹슬고 망가져 버린 작은 친구의 건강을 염려하며, 작은 소원을 빌었다.
‘끝없는 여행 도중, 한국에 가게 되었을 때, 보라 사신과 웃는 얼굴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기를.’
남자는 여동생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이탈리아를 벗어나 세계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마 다시는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남자는 자신의 생명이 다 할 때까지, 부평초처럼 계속 전 세계를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여동생을 데리고, 여행하는 것처럼.
첫 번째 목적지는 프랑스 파리.
분명 여동생은 에펠탑 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고 했었지.
파리의 거리를 거닐며 크루아상을 먹고 싶다고도 했었어.
그 외에도 여동생이 가고 싶어 했던 장소는 많았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기고 문 앞에 서자, 남자는 의안이 욱신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가자.”
마치 여동생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남자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문을 열고 나섰다.
‘….’
하지만 남자 앞에 펼쳐진 것은 쓸쓸한 여행의 첫걸음이 아니었다.
마치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되살린 것 같은 여동생이 눈앞에 서 있었다.
“오빠, 정말 많이 늙었네.”
눈시울을 붉히며,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여동생.
그리고 남자에게 달려들어 꼭 껴안더니,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눈을 꼭 감고, 말도 하지 않고, 여동생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눈을 뜨거나, 입을 열면 이 기적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계속 안고만 있었다.
그리고 녹슨 보라 사신은 그림자 속에 숨어서, 애착 인간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축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