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6
이사벨과 페이비는 내가 모든 절차를 끝마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툭 하고 건드리는 순간 그대로 오열할 것만 같은 이사벨과 잔뜩 상기되어 있는 페이비의 모습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난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체를 했다.
괜히 건드렸다가 도화선을 건드리는 꼴이 될 것 같았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이사벨은 그 이상 호들갑을 떨지 않고 자신의 창고로 향했다가 자그마한 주머니를 들고 왔다.
“아공간 주머니입니다. 안에 부탁하신 물건이 들어있습니다.”
백금화 수백개짜리 주머니인가.
일이 끝나고 남은 건 모두 돌려 줄 생각이지만 양심에 찔리는 건 어쩔 수가 없네.
철판을 깔려면 끝까지 깔아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하니 원.
…나중에 기회 생길 때마다 방문하자. 그 때마다 이사벨을 위해 기도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좋아하겠지. 아마도.
일단 이걸로 기적을 일으키기 위한 밑준비는 끝난 셈인가.
이제는 사람만 구하면 되겠네.
사람이라고는 해도 이제 내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단 셋 뿐이다. 이외에는 곁다리.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인물들 뿐.
최소 인원으로 공략하고자 마음먹었으니 추가된다 하더라도 한 둘 뿐이지 않을까.
“저어. 알른 영애님.”
머릿속으로 계획을 점검하고 있으려니 이사벨이 슬며시 목소리를 냈다.
“혹여 무슨 기적을 일으키려 하시는 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건 저도 궁금해요. 영애님. 아직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들은 게 없으니까요.”
설명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다. 어차피 주신의 사도니 악신이니 하는 것에 대해 이미 다 말해주었는데 내 계획 정도야 당연히 이야기해줄 수 있지.
근데 지금 이야기를 해버리면 나중에 또 다시 설명을 해야 하잖아.
할배조차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한 계획이니만큼 이게 왜 되는 지에 대해 이야기도 해줘야 할 테고.
그러니까 계획에 필요한 모든 인원은 아니더라도 계획의 주축이 될 요한 정도는 데리고 온 후에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은데.
그런 생각이 들어 이사벨에게 요한을 데려와달라 부탁했더니 그녀가 가뿐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른 영지의 요한 주교님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공간술사를 보내 모셔오죠.”
‘…공간술사요?!’
“이 기분 나쁜 허접 가문에 공간술사도 있어?”
공간술사라는 것은 공간과 관련된 마법을 집중적으로 수련하는 마법사를 부르는 총칭이다.
염동. 순간이동. 아공간 주머니 등. 없어도 문제는 없지만 있으면 삶의 윤택함을 더해주는 이들이지.
“예. 이래 뵈도 거대 상단을 이끄는 몸이니까요. 공간술사는 몇 명이 있어도 모자라죠. 개인적으로 계약한 이도 있고. 상단 쪽에서 일하는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
하긴 내 앞에서 상당히 허술하고 징그러운 모습을 보인 이사벨이지만 그녀는 본래 거대한 상단을 이끄는 몸이다.
당연 몸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일을 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입장이니. 그녀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공간 술사가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마침 잘 됐네. 안 그래도 개인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공간술사가 필요했는데.
원래는 뉴먼 가문을 거쳐서 급하게 사람을 구해 볼 생각이었는데 아르테아 가문의 공간 술사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 공간술사분요…’
“변태 광신도 너랑 계약한 멍청이는 어떤 허접이야?”
“필요한 조건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물음을 던지기 무섭게 이사벨이 자세를 고쳐 잡는다. 내가 관심을 보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바로 눈치를 챈 것이다.
역시 상인은 상인이라니까.
‘그러니까…’
“7명 정도는 한 번에 옮길 수 있어야 해. 입이 무거운 사람이여야 하고. 이 두 가지 이외엔… 음. 겁이 많아서 뭐만 보면 질질 짜는 좆밥만 아니면 되겠네.”
“그거라면 저희 쪽 공간술사가 적격이겠네요.”
*
“어둠의 악신을 물리치는 일입니까.”
루시에게서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요한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버로우 가문을 집어 삼킨 악신의 사도. 그 곳에서 준비되고 있는 거대한 흑마법. 그걸 막기 위한 특공.
어느 하나 허무맹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여느 꼬마 아이가 저런 말을 내뱉었다면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혼냈겠지.
허나 이번에 저 설명을 한 것은 루시였다. 과거 메네스테일에서 기적을 일으켰던 이. 위대하신 주신의 사랑을 받는 자.
과연 그녀의 말에 거짓이 있을까?
그럴 리가.
“말씀하신 것 자체는 이해했습니다.”
요한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 옆에 있던 페이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요한과 눈이 마주친 페이비는 다시금 얼굴을 굳혔으니까.
페이비의 정체를 알기에 먼 예전부터 페이비를 엄히 대했던 요한이다. 지금도 과거의 기억이 남아 그를 어려워하는 것이겠지.
솔직히 말해 요한은 여전히 페이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라는 존재는 주신 교회가 타락했다는 상징이니까.
다만 주신의 사랑을 받는 분께서 곁에 두고 저 또한 주신께서 지키고자 하는 존재임을 알리고 있었기에 애써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을 뿐.
페이비에게서 시선을 뗀 요한이 다시금 루시와 눈을 마주한다.
“허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군요. 어떻게 악신의 기운을 쫓을 생각이시지요?”
“안 그래도 설명해 줄 생각이었어. 꼴통 주교. 하여간에 성질이 급하다니까.”
요한을 모욕하는 목소리에 옆에 있던 페이비가 숨을 삼켰지만 정작 요한은 태연했다.
어릴 적의 사나운 루시를 알던 요한이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 이 정도야 별 것 아니지.
“그러니까 애들이 너만 보면 도망치는 거 아냐. 이 마귀 같은 꼴통아.”
…조금은 별 것일 것 같군. 그래.
“계획은 간단해. 우리는 버로우 영지 한 가운데에서 태양을 만들어낼 거야.”
“태양…말입니까?”
“태양이요?”
“태양을 만들어요?”
아르테아 가문의 응접실에 있던 모두가 의문을 드러냈지만 정작 그 말을 꺼낸 루시의 얼굴에선 당당함 이외의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명해줄게. 너희처럼 의심많은 허접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이야.”
처음 루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요한의 머릿속에 새겨졌던 것은 의문이었다.
태양을 만들어낸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허나 루시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요한의 생각은 바뀌었다.
교회의 주류 계파와 거리가 멈에도 불구하고 주교의 자리까지 오른 요한이다.
그가 믿을 구석은 자신의 실력밖에 없었으니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갈고 닦아 온 그는 현 주신 교회에서 신성마법의 지식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이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루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저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이야기가 충분히 실현 가능하단 것을 말이다.
“이 정도면 원숭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해준 것 같은데?”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루시는 어깨를 폈지만 정작 그 옆에 있는 이사벨과 페이비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요한은 저 두 사람의 심정을 이해했다.
“불안정하고. 위험천만한데다가. 실사례도 없는 도박이군요.”
루시의 말을 완벽히 이해한 요한조차도 이렇게 평가를 내릴 계획이다. 간단히 납득하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꼴통 주교.”
“간단합니다. 영애.”
그리고 지금의 요한은.
“꼭 참여하고 싶다는 거죠.”
충분히 이상한 사람이었다.
주신의 사랑을 받는 자가 다른 이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걸려 하고 있다.
악신을 쓰러트리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지려 하고 있단 말이다.
그 옆에 서 있는 것은 물론이고 기적을 일으키는 데에 참여하는 것까지 가능하다고?
하! 그럴 수 있다면 이 노친네의 남은 수명쯤이야 가볍게 걸어줄 수 있지!
“다만 영애. 몇 가지 건의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만.”
“지껄여봐. 꼴통 주교.”
“예. 계획의 초반부에…”
*
아르테아 가문에서 빠져 나와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나는 요한 주교를 끌어들이기로한 자신을 칭찬했다.
원래 내가 요한 주교를 부르려던 건 만약의 상황에 대한 대비와 페이비가 움직이는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었지만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해주었다.
게임 속의 지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계획이기에 불안정한 부분을 자신이 지닌 신성 마법의 지식으로 다잡아 주었으니까.
덕분에 내가 타리키를 위해 준비한 선물은 한 층 더 완벽해졌다.
물론 아직까지 완성은 아니다. 계획의 마지막 방점을 찍기 위해서 거쳐 가야 할 길이 하나 남아 있으니까.
바로 태양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를 지켜 줄 무력을 구하는 것.
알새틴의 보고에 따르면 버로우 영지는 이미 악신의 기운에 잠식된 상태라고 그랬어.
우리가 그 곳에서 태양을 만들 준비를 한다면 영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달려들겠지.
몇 사람이라면 혼자서 대응을 하겠지만 영지 전체가 우리를 짓누르려 든다면 이야기가 달라.
그건 대처가 불가능한 영역이야.
칼이나 알새틴을 데리고 간다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쓰러지지 않겠지만 인파의 앞에서 기적을 완벽히 수호하진 못할 터.
이럴 때 제일 좋은 건 베네딕을 비롯한 알른 가문의 기사단을 써먹는 건데. 걔네는 너무 눈에 띄어. 기사단이 출정을 준비하면 다들 어딘가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아채 버린다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움직이는 게 너무 눈에 띄거나. 내 말을 따라 줄거라는 확신이 없거나.
그나마 아드리가 내가 바라는 조건에 알맞긴 한데 걔를 데리고 갔다가는 아드리까지 같이 정화할 가능성이 있어서 무리.
그렇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던 나는 결국 금단의 수단에 손을 대기로 결심했다.
“…본녀의 본체를 데려가고 싶다고?”
‘네.’
“그래.”
얼빠여우의 본체.
숲의 주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곰곰이 생각해보면 얼빠여우는 최적의 인선이다.
인파를 막아낼 만한 힘이 있고.
항시 숲에 처 박혀 있기에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 안 쓰고.
거기에 더해 비밀을 지켜줄 거란 확신까지 있으니까.
이를 알면서도 내가 얼빠여우에게 부탁하는 걸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미룬 이유는 간단하다.
“숲의 주인에게 숲의 수호는 존재의의 그 자체다. 아무리 그대의 부탁이라 해도 들어줄 수 없는 영역이 있어.”
숲의 주인인 얼빠여우에게 숲을 비워달란 부탁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걸 내버려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방법이 없어.
지금 내가 쥔 손패에서는 이게 최선이란 말야.
그러니까 존엄을 버린다.
버로우 영지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타리키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서.
나크라드의 얼굴에 메이스를 꽂아 넣기 위해서.
새로운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
“듣고 있느냐?”
어느새 사람의 형체로 변해 침대에 앉아서는 훈계를 하고 있는 얼빠여우의 옆으로 다가간다.
찌푸려진 미간과 달리 기대감에 쫑긋거리고 있는 귀에 내 숨결이 닿을 수 있도록.
“진짜?♡”
“히익?!”
“너처럼 역겨운 변태 새끼가 좋아할 걸 준비해 뒀는데♡ 궁금하지 않아?♡ 응?♡ 변태여우♡”
“그… 그런 말로 본녀를 흔들려 해도.”
“바니걸. 다시 보고 싶지?♡”
바니걸이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얼빠여우가 입을 다문다.
하하. 이 변태 새끼 같으니.
그럴 줄 알았어.
“푸핳♡ 왜 예전 생각이 나?♡ 그렇겠지♡ 목덜미고 쇄골이고 겨드랑이고 샅샅이 훑어봤잖아?♡ 역겨운 변태새끼답게?♡”
“ㅂ…본녀는 결코 그런 적이.”
“제발 밟아주세요~♡ 라면서 빌었던 쓰레기는 어디의 누구였더라?♡ 이상하네♡ 내 앞에서 쓰레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얼빠여우의 옆 얼굴에서 사정없이 떨리는 눈이 보인다.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그.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이는 본녀의 영혼에 박힌 업일지니!”
“흐응♡ 전부 다 필요 없단 거지?♡”
“그래!”
“어쩔 수 없네~♡ 그럼 마조변태여우를 위해서 준비한 목줄은 버려야겠다~♡”
“…목줄?”
“아니다♡ 허접견한테 선물해줄까?♡ 쿠흫♡ 걔라면 분명 기뻐서…”
키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떠들던 중 얼빠여우가 다급하게 내 두 손을 붙잡았다.
워낙 그 힘이 강렬했던지라 살짝 당황했지만 얼빠여우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간절히 소리칠 뿐.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내 그대를 도울 테니까! 아니지! 제발 돕게 해다오! 내 이리 부탁을 하마!”
결국 자신의 본능을 이기지 못했구나. 이 쓰레기 변태 여우.
이딴 게 숲의 주인이라니. 그 숲에 사는 생명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경악을 할까.
뭐. 됐어. 이걸로 계획의 준비는 끝.
…
하아. 인생 진짜.
딱 대.
타리키 이 새끼야.
지금 내 마음 속에 쌓여가는 울분과 치욕과 분노를 너한테 풀어줄 테니까.
곱게 뒤질 생각은 안 하는 게 나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