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7
버로우 영지로 향하기 전 날 밤. 나를 비롯하여 악신을 물리치는 데에 가담하기로 한 이들은 모두 아르테아 가문에 결집한 상태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동이 트는 그 순간에 바로 버로우 영지에 습격을 가할 생각이었으니까.
타리키를 쓰러트리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풀린다면 반나절이 채 안 걸릴 것이라는 게 내 예상이긴 하다만 악신과 싸운다는 것은 언제나 변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니.
혹여 싸움이 길어져 밤이 찾아오는 순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
그러니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에 작전을 시작한다. 태양이 하늘을 지키는 동안 모든 일을 끝마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리 계획이 짜여 있으니 내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당장 수면을 취하는 것이 옳지만 난 밤하늘 중앙을 향해 달이 올라가는 지금도 가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하더냐?>
‘…네.’
마음의 긴장이 풀리질 않아 도저히 침대에 누울 수 없었으니까.
<이런 모습은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칠 때 이후로 처음이구나.>
‘그런가요?’
<그래. 여아 그대는 언제나 당당함과 자신감을 지닌 사람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렇네.
여태까지 이렇게 마음 졸인 적은 거의 없었구나.
내게 찾아온 위기는 처음부터 극복할 자신이 있는 것이거나 마음을 졸일 틈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었으니까.
‘저기 할아버지.’
<무어냐.>
‘할아버지는 이럴 때 어땠어요?’
할배는 이럴 때 어땠을까.
평소 할배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긴장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 말이냐? 엄청 긴장했지.>
‘…할아버지가요?’
<그래.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밤새워 신께 기도를 드린 날이 부지기수다.>
덕분에 수면부족으로 큰 실수를 저지른 적도 많다며 할배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잔뜩 긴장해서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할배의 모습이라니. 잘 상상이 안 되네.
<그게 정상이다. 여아야. 목숨을 거는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는다면 그게 사람이겠느냐.>
‘그…렇죠?’
<그래.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대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끝마쳤으니까. 이젠 타리키의 얼굴을 짓밞으며 어떤 매도나 할지 고민하거라.>
‘왜 매도하는 게 대전제인거죠?’
<할 생각 아니었느냐?>
…물론 매도를 할 거긴 하다.
타리키가 열 받아서 저주를 퍼부으면 잔뜩 신나서 있는 소리 없는 소리를 다 하겠지.
그렇지만 내가 당연히 매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곤란해!
그래서야 내가 진짜 썅년인 것 같잖아!
<뭐. 그건 되었고.>
‘뭔데요.’
<정 할 일이 없으면 수련이나 하자꾸나.>
‘큰일을 치르기 전에는 쉬라면서요?’
<밤새 침대 위를 뒤척이는 것보다야 이 쪽이 실용적이잖으냐.>
그건… 그렇지. 이대로 창밖을 구경하고 있어봐야 잠을 잘 수 없으리라 생각한 얌전히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기 무섭게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워진 훈련장이 모습을 드러냈고. 갑옷을 입은 채인 할배가 날 보고서 믿음직스런 웃음을 지었다.
*
다음 날 새벽.
여전히 달과 별이 흐릿한 구름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간.
모든 준비를 끝마친 페이비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주신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기도는 길고 복잡했지만 정작 그 안에 든 내용은 단순했다.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당신의 뜻을 펼치려는 이들을 지켜봐 주시길. 보호해 주시길. 도움을 주시길.
한참이나 이어지던 기도가 끊어진 것은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을 때였다.
“성녀님.”
문 바깥에서 들려 온 요한의 목소리에 페이비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급히 거울을 보며 몸단장을 한 후에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침이라 하기에도 이른 시간임에도 요한의 차림은 말끔했다.
지금 당장 예배에 나서도 이상이 없을 만큼.
“물론이에요. 요한 주교님께서는 어젯밤 잘 주무셨나요?”
“그렇다고 말씀드려야 할 터이지만 안타깝게도 많이 자진 못했습니다. 내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뛰어서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음에도 주책이라 이야기하며 슬며시 미소 짓는 요한의 모습에 페이비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녀가 아는 요한이라는 사람은 본인에게 엄격한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특히나 페이비에게는 더더욱.
요한은 페이비를 볼 때면 언제나 굳은 표정을 유지했고 무표정한 입술로는 질책만을 내뱉었다.
그래서 페이비는 요한을 어려워했다.
그가 사실 좋은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누구보다 진지하게 신께 다가가려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허나 지금의 요한은 달랐다.
느슨한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은 모험을 꿈꾸는 남자아이와 닮아 있었다.
페이비가 어릴 적 보았던.
“성녀님?”
“…네? 아.”
괜찮아. 페이비.
괜찮아.
이미 마음으로 받아들인 일이잖아.
다급히 표정을 다잡는 페이비를 본 요한이 한 쪽 눈썹을 슬쩍 내린다.
“죄송합니다. 저도 살짝 잠이 부족한가봐요.”
내 실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봐. 페이비는 변명을 하며 질책을 기다렸지만 요한은 살짝 한숨을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녀님을 뵈러 온 것은 알른 영애 때문입니다. 이제 결행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 방에서 쉬고 계시는 듯 하여.”
“알겠습니다. 영애님을 뵈러 가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요한이 떠나간 후 페이비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서 방 바깥으로 나온 페이비는 걸음을 망설이지 않았다.
루시가 묵고 있는 방이 어딘지 그녀는 몰랐지만 그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신성은. 태양과도 같은 따스한 빛은. 한 번 그 옆에 서 보았던 사람이라면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한 방의 앞에 페이비가 도착하기 무섭게 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허접 성녀.”
제 기척을 느끼셨나보네요. 역시 알른 영애라고 생각하며 페이비가 방문을 연 순간 페이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활짝 열린 창문. 계절이 바뀌어가며 싸늘해진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커튼.
그리고 그를 따라 춤추는 루시의 기다란 붉은 색 생머리.
가슴 한 가운데에 경건히 모아진 자그마한 두 손.
느리게 움직이는 입술. 꾹 닫힌 눈.
그리고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이른 겨울의 찬기마저 잊게 하는 은은하고도 따스한 신성.
루시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요.
그 모습에 홀려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려던 페이비였지만 그녀는 이내 제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루시의 기도를 방해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 무슨 무례인가요 페이비!
영애의 기도를 방해하다니!
지금이라도 다시 문을 닫아야 할까요?
아니 그치만 영애께서 들어오라 하셨는데?
나가면 오히려 실례인 것이.
페이비가 패닉에 질려서 어찌할 줄을 몰라하던 그 순간.
루시가 눈을 뜸과 동시에 그녀의 주변에 퍼지던 신성이 바람을 따라서 흩어진다.
“뭐해? 허접 성녀?”
“…죄. 죄송합니다아아!”
*
아무리 생각해도 페이비는 나를 친구보다는 존경의 대상 혹은 모셔야 할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 겨우 기도 방해한 걸 가지고 이 난리라니.
<지금 같은 경우에는 저 아이의 반응이 정상이다. 아침 기도를. 그것도 주신의 사도가 하는 기도를 방해했으니.>
‘그런가요?’
할배는 페이비의 반응이 그리 이상한 게 아니라 설명했지만 난 여전히 페이비의 반응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국 기도라는 건 허접 주신한테 말을 거는 거잖아?
좀 대충해도 문제없는 거 아닌가?
봐.
[일일 퀘스트 클리어!]
[신성이 소폭 증가합니다!]
[기품이 소폭 증가합니다!]
내가 대충대충 해도 허접주신이 대만족해서 보상을 주잖아.
교회 사람들이 너무 허접 주신을 어렵게 생각하는 거 아냐? 이 녀석이 치졸한 변태긴 해도 까탈스럽진 않다고.
<…네가 너무 주신을 가벼이 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만.>
어이없다는 듯한 할배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페이비를 진정시킨 나는 그녀를 먼저 보낸 후 인벤토리에서 갑옷을 꺼내 착용했다.
처음 이 갑옷을 입을 때는 어찌해야 할 줄을 몰라 했었는데 이젠 생각하는 것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네.
하긴. 이 갑옷을 입은 지도 오래 됐으니까.
준비를 끝마친 내가 응접실로 향했을 땐 이미 나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모여 있는 상태였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드디어 내가 선물했던 검을 장식장에서 빼낸 칼이 고개를 숙였고.
“방금 전엔 죄송했습니다. 영애님.”
그리 하지 말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페이비가 또 다시 사과의 말을 전했고.
“오셨습니까.”
요한이 성서를 품에 안은 채 목례를 건넸으며.
“모든 준비는 끝마쳤습니다.”
알새틴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고.
“내가 미쳤지. 욕망에 패배하여 숲을 내버리고 오다니.”
소파에 앉아있는 얼빠여우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멍청한 자신을 욕하고 있었다.
쟤는 어제부터 계속 저러네.
욕망에 패배했으면 그냥 거기에 충실하기라도 할 것이지. 왜 둘 다 못해서 저 난리를 피우는 지 원.
진짜 마음에 안 들어.
그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가리는 손을 치워버렸다.
얼빠여우와 나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한다.
“야. 쓰레기 여우♡ 언제부터 네가 멀쩡했다고 난리야?♡ 항상 역겨운 행동밖에 안 하던 변태 주제에♡”
“…”
“목줄차고 바닥을 기고 싶으면 주인님 말을 잘 들어야지?♡”
벌 받고 싶으면 제대로 일 해♡ 이 쓰레기야♡
라고 속삭이듯 이야기하며 마무리를 지었더니 얼빠여우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매도를 들어야 기운을 차린다니. 진짜 변태 새끼라니까.
…혹시 얘 일부러 매도 들으려고 이런 거 아냐?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얼빠 여우라서 합리적인 의심인 것 같은데.
으. 진짜 기분 나빠.
역겨움을 담아 얼빠여우를 노려봐준 후에 고개를 들었더니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혀 있었다.
…공간 술사를 제외한 모두가 태연한 게 너무 짜증나. 이래서야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인 것 같잖아.
그리고 말야. 칼 넌 대체 왜 이걸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건데!
아! 진짜! 제발! 좀 정상으로 돌아와 주면 안 될까?!
기사다운 기사가 되겠다던 넌 어디로 간 거야! 과거의 넌 좀 더 멀쩡했었다고!
얼굴을 쓸어내린 후 공간술사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순간이동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바라신다면 언제든 갈 수 있습니다.”
창밖을 살피면 하늘이 보랏빛에서 주홍색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보인다. 태양이 떠오르는 중인 것이다.
그를 확인한 후 다시 안을 둘러보자 모두들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들 준비 끝난 거지?
알겠어.
‘바로 가죠.’
“바로 가자. 이동용 노예.”
“…크흠. 예. 알겠습니다.”
공간술사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음에 따라 바닥에서 푸른 색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를 확인한 나는 눈을 감고서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내 계획은 할배가 완벽하다 그럴 정도라고. 이제 남은 건 계획을 실행하고 지가 이길 줄 알았던 타리키를 비웃어 주는 것 뿐이야.
“허?!”
그 때였다. 공간술사의 입에서 경악이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법이 방해 받고 있습니다!”
…타리키. 그 녀석이 눈치를 챘구나.
“젠장! 취소가 불가능 합니다! 최대한 좌표를 고정해 보겠지만 기대하지 마십시오!”
공간술사의 무책임한 외침이 지나고서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의 풍경이 뒤바뀐다.
아르테아 가문의 깔끔한 응접실에서 아무것도 없는 푸른 색의 하늘로.
하하! 미친! 손님이 왔다고 스카이다이빙 체험을 시켜 주는 거야?!
중력을 따라 몸이 가속하는 것을 느끼며 아래를 살핀다.
일단 버로우 영지에 제대로 도착하기는 했네.
응접실에 있던 인원 전원이 한 곳으로 전이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고.
이 정도면 타리키가 방해하는 와중에도 공간술사가 제 역할을 다해줬다고 봐야겠지.
그러니 이제는 나머지가 일 할 시간이야.
‘얼빠여우!’
“얼빠여우!”
“알겠다! 내 대처하마!”
여러 신비한 도술을 다루는 얼빠여우에게 대처를 맡긴 나는 저 아래에서 넘실거리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서 방패를 다잡았다.
우리를 집어삼키기 위해 쏘아지는 검은 색의 마력 포탄.
이야. 스카이다이빙도 모자라서 폭죽까지. 손님을 모실 준비를 철저히 했구나?!
“아가씨! 저건 제가!”
‘됐어요!’
“필요 없으니까 기다려! 허접견!”
과거의 나라면.
처음으로 나크라드를 마주했을 적의 나라면.
저걸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허나 이제는 아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
겨우 반 년 아니냐고?
아니지.
이 썩은물에게 반 년이라는 건 반 년 이나라고 해야 할 기간이니까.
입술 끝에 힘을 더하면서 방패 끝에 신성을 집약하자 그 신성이 퍼져 나가 포탄을 막아낼 정도로 거대한 방패를 형성한다.
그러기 무섭게 포탄이 신성으로 이루어진 방패에 부딪힌다.
그 위력이 얼마나 거센지 내 몸이 중력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려 하지만 그 뿐.
어둠의 앞에 선 빛에는 자그마한 금조차 보이지 않는다.
야. 타리키.
만약 네가 준비한 게 이 따위 것들뿐이라면.
난 좀 실망할 것 같아.
이 음침한 허접 쓰레기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