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9
검에 집약되어있던 신성이 점차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게 보인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신성이 아닌 허접 주신이 직접 나에게 선물해주었던 신성.
여러 신들의 가운데에 있는 자가 품고 있던 그 무엇보다도 신성한 기운.
아무리 이 곳이 타리키의 기운이 널리 퍼져 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주신의 신성 앞에서 어둠은 무력할 지어니.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어둠이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게 보인다.
그 모든 걸 확인한 나는 검에서 손을 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접 주신의 신성을 몸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신성영역의 효과가 강하게 발현되네.
덕분에 기적을 일으킬 기틀을 만들어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타리키가 뒤통수를 치려 드는 것도 막을 수 있겠어.
<그런 엉망진창인 기도로 이런 결과물이 만들어지다니.>
점차 위세를 떨치는 신성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할배가 헛웃음을 흘렸다.
…기도가 엉망진창이긴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도보다는 신성모독에 가까운 물건이었으니까.
<주신의 사도이기에 그런 것인가.>
‘아니에요. 할아버지.’
<흠?>
‘그냥 주신께서 이런 걸 좋아하실 뿐인거에요.’
아무리 자신의 사도라 할지라도 자신을 모욕하는 말을 하는 자에게 신이 자신의 힘을 빌려줄 리가 없잖아?
그냥 그 페도 변태 주신은 귀여운 여자애가 자길 모욕하는 게 좋을 뿐인 거야!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신성영역이 제대로 펼쳐질 리 없잖아!
<헛소리는 그만하면 되었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데요.’
<그보다 앞이나 봐라. 그대의 계획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니.>
쯧. 오늘도 할배에게 허접 주신의 진실을 알리는 데 실패했네. 그렇지만 할배 부정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진 않아요.
언젠가 당신은 허접 주신이 구제불능의 페도 변태 로리콘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제가 납득하게 만들 거니까.
그리 생각을 하면서 방패를 다잡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남은 것은 페이비와 요한이 제대로 기적을 만들어내기를 기다리며 버티는 것 뿐.
<어둠이 다가오고 있다.>
할배가 경고의 말을 내뱉은 그 순간.
이 쪽으로 달려오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바닥에 널부러졌다.
얼빠여우가 벌인 일인가 싶어 고갤 돌리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한 게 아니라고? 그러면 이건 도대체 뭐야?
의아함을 품은 채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사람들에게 깃들어 있던 타리키의 마력이 빠져나와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보았다.
인파로 짓누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타리키가 전략을 바꾸는 건가.
이번에는 뭘 할 거야? 무슨 짓을 벌여서 나한테 박살이 날 거야?
신경을 곤두세운 채 방패를 다잡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기병입니다!”
저 멀리에서 기병이 먼지를 흩날리며 돌진해오고 있었다.
악신의 마력에 의해 기괴하게 변해버린 거대한 말과. 검은 색으로 물든 갑옷을 입고 검정 연기를 흩날리며 달려드는 기병무리.
저는 이미 기사라기보다는 어둠으로 이루어진 파도였고, 대지를 집어삼키려는 쓰나미였다.
<한 점을 돌파해 박살내겠단 것인가.>
‘제가 나서서 막아내면.’
<지금 네게 그럴 여유가 있느냐?>
…없다. 지금 나는 신성영역을 펼치고 유지하는 데에 대부분의 신성을 쏟고 있으니까.
저 기병무리의 돌격이 만들어내는 충격을 감당하긴 버겁겠지.
<모든 걸 네가 처리하려 할 필요는 없다. 그러기 위해 많은 이들을 데려 온 것이지 않나.>
할배의 말이 옳았다. 괜히 앞으로 나서다 계획에 변수를 만들 바에야 내가 데리고 온 이들을 믿는 게 맞다.
앞으로 나서고픈 마음을 꾹 누른 채 추이를 지켜보던 그 때.
얼빠여우가 움직이는 안개로 된 여우들이 기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시의 사람들을 잠재울 때처럼 기병을 향해 움직였지만 기이하게도 기병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이미 악몽의 한 가운데에 있기에 잠들지 않는 것인가. 재미난 수작이군 그래.”
재미나다는 말을 입에 담은 얼빠여우였으나 그녀의 입에는 자그마한 미소도 담겨있지 않았다.
평소 내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진지한. 한 숲을 관장하는 짐승다운 얼굴을 한 그녀가 가뿐히 손가락을 움직이자 여우의 형상을 한 안개가 흩어지더니 이윽고 기병의 돌진 경로에 집약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흐릿한 안개이기에 기병의 시야를 방해할 수나 있을까 싶었던 안개였지만 그 안개는 너무나도 간단히 내 상식을 박살내버렸다.
콰아아앙! 기병의 돌격을 막아내는 것으로 자신이 단단한 벽이라는 걸 입증했으니까.
이게 숲의 주인이 지닌 힘?
그 광경이 너무도 대단해서 얼빠여우의 본성이 마조변태라는 것조차 잊고 감탄하던 나였지만 정작 얼빠여우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왜 그런 얼굴이야? 너 방금 제대로 돌격을 막아냈잖아?
이런 나의 의문은 얼빠여우가 무어라 대답을 해주기도 전에 해소되었다.
나의 뒤편에서 방금 전에 들었던 것보다도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으니까.
“아주 사방에서 난리군. 난리야.”
얼빠여우가 짜증을 내는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이어지는 굉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돌격. 돌격. 그리고 또 다시 돌격.
안개가 견고한 벽이라면 자신들은 몇 번이고 거기에 부딪혀 벽을 부수어 보이겠다는 듯한 그 광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소리를 키웠다.
…미친. 방금 전의 인파도 탐색전이었다는 거야? 뭐 이딴 화력이.
“아니군. 사방이 아니라 하늘에서까지 오는가.”
<여아야! 위다!>
위? 위에서 뭐가 오기에 얼빠여우와 할배가 함께 소리를 치는 거야?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본 순간 나는 보았다.
저 위에서 떨어지는 인간의 형체를.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색의. 아니 강제로 검게 물들여진 검을.
…버로우 공작.
젠장. 그 짧은 시간에 버로우 공작을 지배하는 데에 성공한 거야?!
빠른 속도로 하강하던 버로우 공작이었지만 정작 그가 바닥에 착지하는 소리는 너무도 가벼웠다. 꼭 깃털이 바닥에 내리 앉은 것처럼.
그리고 나서 우리의 앞에 선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슬며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저주받을 아르마디의 사랑을 받는 아이야.
공작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공작의 것이면서 공작의 것이 아니었다.
– 희망을 품었느냐? 그대의 계획이 생각대로 되리라 여겼느냐?
타리키. 어둠의 악신이 공작의 몸을 빌려 내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
– 이 곳에 자리한 순간부터 그대가 마주할 결말은 예정되어 있거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녀석이 팔을 벌리면서 그리 이야기를 하기 무섭게 버로우 영지에서 느껴지던 악신의 기운이 한층 더 짙어졌다.
어째서인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신성 바깥에 있는 바닥에서 흘러나온 어둠의 마력이 정신을 잃은 사람들을 향해 입을 벌렸으니까.
…제기랄. 막아야 해.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글쎄다. 아직 결말도 나지 않았는데 그리 확언하는 건 별로 좋지 못한 듯 하다만.”
그를 보고서 다급히 움직이려던 나였지만 그보다 얼빠여우가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그녀가 도시에 퍼트린 안개가 어둠을 가로 막고 시민들을 집어 삼키는 걸 방해한 것이다.
– 짐승 따위가 어디서 망발이더냐.
“미안하다만 본인을 짐승취급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여아뿐이다. 징그러운 악신이여.”
타리키의 노골적인 분노를 받아내면서도 얼빠여우는 미소를 지었다.
허나 누가 보더라도 그녀에게 여유가 없음은 분명했다.
어둠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니까.
– 스스로를 지킬 여유조차 없는 주제에 허세를 부리는 구나.
녀석이 검을 휘두른다.
얼빠여우와 버로우 공작 사이에는 분명 상당한 거리가 존재했으니.
본래라면 그의 검은 얼빠여우에게 자그마한 영향조차 주지 못해야 했다.
허나 일정 경지에 이른 무인의 검은 상식을 가볍게 부수어 버리고 말았다.
공작의 검격을 타고서 흘러나온 악신의 마력이 참격이 되어 얼빠여우에게 쏘아진 것이다.
얼빠여우는 그를 보고서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대로 도시에 펼쳐지는 마법을 막느라 여유를 잃어버린 것일 테지.
허나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세상 어느 탱커가 캐스팅 중인 마법사를 홀로 두겠는가.
얼빠여우의 앞을 가로 막고서 참격을 바라본다.
지금 써먹을 수 있는 신성은 그리 많지 않지만.
괜찮아.
여태까지 쌓아 온 나의 전투논리가 말한다.
막아낼 수 있다고.
철벽이 고한다.
버틸 수 있다고.
그 둘의 의견이 일치한 이상 내가 저 참격을 막아내지 못할 이유는 없어.
땅을 짚은 다리에 힘을 더하고.
방패의 손잡이를 강하게 붙잡고.
입술을 꾹 깨물고.
동료를 노리는 공격을 막아선다.
버로우 공작의 무위와 악신의 마력이 뒤섞인 공격은 상당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의 몸이 점차 뒤로 밀려나고.
방패를 붙잡고 선 팔이 비명을 내지르고.
참격을 밀어내는 안키르에 스며든 빛이 흐려진다.
허나 거기까지였다.
악신의 마력이 담긴 참격은 내 몸에 부담을 주었을 뿐 안키르에는 자그마한 상처조차 내지 못했다.
“애개♡ 겨우 이 정도?♡ 버로우 공작이 많이 늙긴 했네♡ 힘없이 늘어진 성기마냥 허약한 검이라니♡ 버로우 가문의 후계가 없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거대한 방패의 너머로 내뱉은 도발에 버로우 공작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그와 함께 쏘아지는 새로운 검격.
지금 내 몸 상태로는 저 연격을 막아내는 게 버거울 테지만 난 그 검격에 대비하지 않았다.
버로우 공작이 검을 치켜듬과 동시에 그 뒤를 노리고서 칼이 달려드는 게 보였으니까.
– 감히 기습을!
“정당한 전략이라 해주시지요!”
버로우 공작은 다급히 검을 비틀어 칼의 공격을 막아냈다.
악신의 마력과 칼이 지닌 순백의 오러가 맞부딪히며 서로를 밀어내려 든다.
기습을 당해 불안정한 상태에서 공격을 막아낸 것이니 본래라면 상황은 공작에게 불리해야 할 터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왕국에서 손에 꼽는 무위를 지닌 공작이 악신의 마력에 의해 강화되었으니.
녀석은 오히려 칼을 자신의 힘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애초부터 불리를 예상한 것일까.
칼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그를 본 공작은 여유를 허하지 않겠다는 듯 추적하려 했지만 그 움직임은 실패로 돌아갔다.
칼의 뒤에 있던 알새틴이 자신의 화살로 공작의 움직임을 방해했으니. 칼은 깔끔하게 거리를 벌리고 다시금 공격의 기회를 노렸다.
“흐음. 새삼 이 곳에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드는 구나. 내 그대에게 지킴 받을 날이 올 줄이야.”
‘그런 말 할 시간에!…’
“그딴 헛소리 할 여유가 있으면 저 음습한 쓰레기의 마법이나 빨리 멈춰! 이 개허접 변태 여우!”
입술을 꾹 깨문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얼빠여우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거기에 짜증으로 대응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방금 전에 난 타리키가 아닌 공작을 모욕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발이 강하게 걸렸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악신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지금도 버로우 공작이 어느 정도 자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일 가능성이 높아.
…좋아. 어디 한 번 실험을 해볼까.
“발기부전 공작♡ 어딜 보는 거야?♡ 자기가 못 세운다고 다른 남자를 질투하는 건 너무 추하지 않아?♡”
“…”
“아니면 혹시 새로운 취향에 눈 떴어?♡ 이제 자기 엉덩이를 입구로 만들려고 그래?♡ 푸하핳♡ 그건 좀 재밌겠네~♡”
알새틴이 쏘아내던 화살에 대응하던 버로우 공작이 갑자기 허리를 뒤틀어서는 다소의 피해를 허용하며 내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흐응. 이럼 어느 정도 자의식이 남아 있는 거네.
타리키에게 당해 잠을 자고 있지만 그 잠이 깊지는 않은 거야.
그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는 분명하지.
잠꾸러기 공작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 귓가에 대고 목소리를 내서 깨우면 되는 거야.
“찔렸어?♡ 찔리는 구나?♡ 크흫♡ 버로우 공작이 설마 남색가일 줄이야~♡”
본의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도발을 하는 수밖에.
버로우 공작. 당신 빨리 일어나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슨 말까지 하게 될 지 모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