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뇸뇸.
입 안 가득 들어온 과일을 먹으며 생각했다.
이번 검은 나비 모험은 별게 없었네.
검은 거울을 박살낼 기회가 생길까?했는데, 왓슨이 부숴버렸다.
딱히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어서 능력 수집에는 관심이 없긴 했다.
만약 능력을 얻는다고 해도 열화 카피라서, 미니 사신을 잔뜩 날려 보내는 능력 정도로 열화되지 않을까?
인간에게 심히 해로운 왓슨도 몰래 따라가서 꿀밤 때려주려고 했는데, 파괴 조건이 곤란한 녀석이었다.
[본체의 파괴.]
심플하면서 곤란한 녀석.
요즘 저런 오브젝트들이 종종 보이던데, 서울 숲에 가서 본체 찾는 능력이라도 찾아봐야하나?
서울숲 심처에는 기상천외한 오브젝트가 많으니까 있을 법도 했다.
그래도 서울숲 심처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단 말이지.
그래서 그냥 바깥바람 쐬다 온 셈 치고 세희 연구소로 돌아왔는데…
돌아오니 연구소 사람들의 태도가 이상했다.
옴뇸뇸.
사람들이 묘하게 호의적이었다. 아니, 대놓고 호의적으로 변했다.
다른 연구소 직원들도 예린처럼 과자를 놓고 가거나, 같이 놀다가거나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야 놀 상대가 많아져서 좋지만, 원인을 모르니 뭔가 찜찜했다.
지금도 친구로 보이는 여직원 4인조가 찾아와서 입에 과자나 과일을 넣어주고 안마를 해주고 있었다.
팔다리 주물주물.
한 사람마다 사지를 하나씩 맡아서 안마를 하고 있었는데, 딱히 근육통이 생기는 신체는 아니었지만 인간 시절의 기억때문인지 몸이 노곤하게 푹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졸린 기분이야.
zz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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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한 팔다리를 주물러주던 도중에, 편안한 표정의 사신이는 눈을 감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사신이가 잠들어버렸네요.”
우리들은 딱히 말을 맞추지 않았어도 목소리를 낮추고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신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격리실을 빠져나왔다.
요즘 세희 연구소에서는 회색 사신을 돌봐주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원래부터 묘하게 인기가 많던 회색 사신이었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심해졌다.
연구소 측에서 내려온 명령 같은 게 아니라, 이번에 터진 끔찍한 사고 사진들이 돌아다니는 와중에 발표된 한 보고서 때문이었다.
연구소 복도에 비치되어 언제든 읽을 수 있도록 배치된 보고서였다.
임시 오브젝트 관리 기구에서 발행한 보고서였는데, 내용은 꽤 의미심장했다.
사신에게는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 나비를 쫓아내는 능력이 있다는 보고서였다.
거기서 세희 연구소 소속 연구원들은 회색 사신이 갑자기 한 귀여운 행동에 생각이 미치게 됐다.
정문 앞에 서서 토닥토닥 거리는 행위.
그것이 사실은 응원이 아니라 나비를 제거하는 행위였던 것이었다.
‘송파구 싱크홀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 연구소에서 감염자가 안 나온 건, 다 사신덕분이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래도 귀엽다고 인기가 있던 사신이 한층 더 애호 받게 된 것이다.
주변에서는 끔찍한 몰골의 감염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우리 연구소만 멀쩡했으니 말이다.
***
늦은 밤, 여러 직원들로 북적거리던 격리실도 이제 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고롱거리며 자는 고양이를 품안에 안고 TV를 켜자 이번에 미국에서 완공된 영체 장벽의 전경을 비춰주고 있었다.
고작 나무로 만든 장벽이 저렇게 장엄할 수 있다니, 인류가 오브젝트를 완전히 활용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발전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에서 오브젝트로 변한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인간의 방식으로는 오브젝트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논리적인 판단은 아니고, 이유는 없지만 과학과는 전혀 다른 체계의 학문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연금술이나 마법 같은 좀 더 오컬트에 가까운 유사 학문 말이다.
미국에서는 저 거대한 장벽을 완성한 뒤, 어떤 오브젝트에 대한 엠바고를 풀고 대대적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사람의 골을 빨아먹는 유령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국에서는 사람을 파먹고 사람으로 의태하는 오브젝트가 나타났는데, 미국에서는 유령상태로 접근해서 사람 골을 빨아먹는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한국은 그 근원을 파괴해서 해결했고, 미국은 영체를 막는 거대한 장벽을 세워서 해결했다.
해결은 한국 쪽이 깔끔하긴 하지만, 저런 방벽을 만드는 기술은 아직 한국에 없었다.
만약 탐정과 내가 검은 거울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저런 방벽 같은 안전을 위한 기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중앙 연구소도 없어진 시점에서 그런 연구가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
미국의 장엄한 방벽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익숙한 얼굴의 데일리 오브젝트의 사장이 뉴스에 얼굴을 비췄다.
식겁한 나는 그대로 TV를 꺼버렸다.
요즘 뉴스는 계속 똑같은 이야기만해서 재미가 없었다.
나비 사태, 데일리 오브젝트 등등.
특히 데일리 오브젝트 관련 소식은 폐업 신고 소식만 알려줬으면 좋겠다.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잠든 유령 고양이를 옆으로 치우고 격리실 밖으로 나서자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람이 너무 적다.
생각해보니 매일 출근하듯이 오던 예린도 요즘은 간헐적으로 오고 있었다.
그 자리를 채우듯이 다른 직원들이 찾아와서 별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딘가에 많은 수의 직원들의 케어를 필요로 하는 오브젝트라도 들여온 것 같았다.
묘하게 한산한 연구소가 이상해서 돌아다니다 보니, 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 익숙한 시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넓고 한적하게 잘 꾸며진 공원이 연구소 내부에 커다랗게 만들어져 있었다.
트라우마가 생길 법도 한 광경인데, 오히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설마 요즘 연구소에 사람이 없어 보이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니!
나는 입에 비릿한 미소를 품고는 온갖 격리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디냐! 개새끼!
내가 꿈꾸던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서 나는 열심히 ‘귀여운 강아지’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내가 예전에 봤던 그대로의 모습을 가진 거대한 황금 개집을 말이다.
내가 찾아낸 격리실 안에는 거대하고 웅장한 황금 개집이 놓여있었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귀여운 강아지’를 납치했다.
격리실 문? 그거야 박살내면 그만이지!
귀여운 강아지는 내가 직접 찾아가는 수고를 들여서까지 복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앞마당까지 온 것을 봐주고 싶지는 않았다.
후후, 서울 연구소 생활 5년간의 울분의 대가를 받을 준비는 되어 있겠지?
연구소 안뜰에 마련된 가짜 공원에 도착하자, 귀여운 강아지를 깨웠다.
잠들어있던 강아지는 자신이 어디론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나를 위협하려고 몸집을 마구마구 키우기 시작했다.
그 특유의 분노한 표정은 덤이었다.
사실 나는 ‘귀여운 강아지’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소위 ‘돈이 된다.’라는 자본주의적인 이유가 아니라, ‘귀여운 강아지’가 인류의 생존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도 나에게 덤벼오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나는 ‘귀여운 강아지’의 파괴 조건을 확인했다.
[심장을 물리적으로 파괴한다.]
쉽군. 아주 쉬운 조건이었다.
내가 파괴 조건을 확인하자,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귀여운 강아지는 겁먹은 개처럼 뒤로 훌쩍 물러섰다.
멍!
귀여운 강아지의 애처로운 울음은 왜 괴롭히냐고 그러는 것만 같았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강아지는 쭈글쭈글 조그마해졌다.
평소보다 훨씬 작게 말이다.
이정도면 귀여운 생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강아지에게 다가갔다.
***
푸른 잔디가 고르게 깔린 공원 한편에 강아지가 두 발로 힘겹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강아지는 힘겨운 소리로 왕왕거리며 사람들의 웃음을 이끌었고, 지나가던 행인들도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 한 공원의 풍경이었다.
머리 위에는 따스한 햇볕이 적당한 강도로 나뭇잎을 비추고 있었고, 나무 밑의 그늘에서 편하게 늘어진 채로 시원하게 울리는 매미소리를 듣고 있었다.
공원을 바라보다가 목이 마르면 유리컵에 담긴 얼음물을 목 뒤로 시원하게 넘겼다.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팔다리를 쭉 뻗고 쉬고 있었다.
공원을 뛰어다니는 강아지의 두 다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부들거리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겉보기에는 일상의 행복한 단면처럼 보였지만, 강아지는 직립보행으로 힘겹게 공원을 달리고 있었다.
사실 이 휴식 공간은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건물 내에 조성된 가짜. 가짜 공원을 돌아다니는 행인들도 모두 가짜, 연기 중인 직원이었다.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연기를 펼치고 있었는데,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실수하면 안되는 건 ‘귀여운 강아지’쪽이었으니까.
강아지는 힘겹게 들판을 뛰고, 연구소 직원들은 그런 강아지의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상황.
매우 행복해 보이는 그 상황은 금세 끝을 맞이하지 않았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강아지가 지쳐 쓰러져도 이 공원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