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0
공작이 휘두르는 공격을 받아낸 칼은 이를 악 물었다.
강하다. 너무나도 강하다.
한 번 정신을 놓는 순간 오러 채로 베여버릴지 모른단 생각이 들 정도로.
과연 버로우 공작. 왕국에서 손 꼽히는 실력을 지닌 무인다워.
1년 전의 나였다면 이 공격을 감히 받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 년 전의 나였다면 이 검을 버텨내다가 부러졌을 것이다.
허나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나의 한계를 마주하고 나아지기 위해 수도 없이 수련한 나는. 아가씨께 선물 받은 검을 든 나는.
공작의 검을 받아낼 수 있다.
– 주신의 개가 기르는 애완동물아.
칼이 근력에서 밀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술로써 만들어 낸 대치가 이어지던 중 공작이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구역질이 나올 것처럼 역겨웠으며 귓구멍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질척했다.
– 아직 완성되지도 못한 강아지가 날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네 놈은 자신의 꿈을 이루지도 못 한 채 어둠에 잡아먹힐 것이다.
어둠의 악신이 목소리가 칼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미 미쳐버렸을 수준의 정신 오염.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할지라도 이쯤 되면 혼란 속을 헤매고 있어야 할 터이거늘.
칼의 눈에선 자그마한 흔들림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 포기해라. 목숨을 구걸해라.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다.”
악신의 유혹에 흔들리는 것은 전혀 기사다운 행동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마음이 어둠 한 가운데에서 꿈을 지키라 외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마음을 둘러싼 따스한 신성이 어둠을 쫓아내며 그것이 옳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기사는 한 번 정한 주인을 바꾸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루시 알른. 그가 평생을 바치겠노라 결심한 아가씨께서 그를 보우하고 있었으니까.
– 궁금하군. 그 충성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목소리가 끝을 맺음과 동시에 칼의 그림자에서 질척한 무언가가 뻗어져 나와 그의 발목을 사로잡으려 들었다.
칼은 그를 감지하자마자 알른 가 특유의 보법으로 그를 회피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최선이 아니었다.
그가 발을 움직인 탓에 간신히 이루어지던 대치가 무너졌으니까.
검과 검의 균형이 뒤틀리며 불길한 마력이 칼의 오러를 침범했다.
– 자아. 지금은 어떻지?
자칫 잘못하는 순간 악신의 힘에 잡아먹힐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칼의 입가에는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자꾸 질척대도 말이다. 난 남색을 좋아하지 않아 의미가 없을 거다”
공작이 입술을 꽉 깨물고 그의 손에 힘줄이 새겨진 그 순간.
저 뒤 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 듣던 역겨운 목소리가 아닌 울려퍼지는 것만으로 모든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목소리가.
“푸하핳♡ 차였네~♡ 불쌍한 변태 아저씨~♡ 이제 슬슬 자기가 매력 없는 발기부전 노친네라는 걸 알겠어?♡”
루시가 웃음소리를 내기 무섭게 공작의 고개가 돌아간다.
자신의 앞에 칼이 있다는 것을 완벽히 잊은 듯한 동작.
아무리 칼이 평기사라 할지라도 알른 가문의 기사다.
이런 틈을 놓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칼이 검을 움직이자마자 공작이 다급히 움직였지만 완벽한 대처를 하기엔 틈이 너무도 컸으니.
공작은 왼쪽 어깨에 거대한 자상을 허용하고 말았다.
“…쯧.”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유효타였음에도 불구하고 칼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훌쩍 뒤로 물러선 버로우 공작이 알새틴이 쏘아낸 화살을 피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복구한 것이다.
“야. 칼. 제대로 안 베냐?”
상처가 나기는 한 걸까 싶은 공작의 모습에 뒤에 있던 알새틴이 짜증을 냈다.
“제대로 벴다. 네 놈이었다면 저걸 맞자마자 죽었을 걸.”
“근데 왜 저 인간은 멀쩡한데.”
“그야 저 놈이 추잡하게 싸우고 있으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단순한 버로우 공작이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공작은 강하지만 루시의 도발에 당해 틈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이상 결국 패배를 맞이했을 터.
헌데도 상황이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유는 공작이 악신의 마력을 지니고 있는 탓이었다.
전반적인 신체의 강화 및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빠른 회복.
악신의 마력을 이용한 여러 장난질.
거기에 더해 시간이 지날 때마다 심해지는 정신오염.
루시가 영역을 선포해서 망정이지 지금도 이 주변을 어둠이 둘러싸고 있었다면 칼을 비롯한 이들은 이미 어둠에 잡아먹혀버렸을 터.
“…추잡이라. 맞는 말이야.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지랄하는 걸 듣고 있으면 부정할 수 없어.”
“뭐가 문제지?”
“근데 추잡한 걸로 따지면 우리 쪽도 마찬가지잖아.”
알새틴이 가리킨 것은 루시와 루시가 있는 곳을 노려보는 중인 버로우 공작이었다.
“왜 노려보는 거야?♡ 차인 울분을 이 귀엽고 자그마한 여자애한테 풀려고?♡ 역겨운 쓰레기한테 어울리는 발상이긴 하네~♡ 그치만 무리~♡ 발기 부전 공작한테 뚫릴 정도로 내 방패는 연약하지 않거든♡”
있는 말 없는 말을 내뱉으며 상대를 분노케 해 시선을 끄는 전략.
저 전략은 분명 유효했지만 알새틴은 저게 명예로운 방식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허나 칼의 생각은 달랐다.
“무슨 헛소리냐. 동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강자의 시선을 끄는 것의 어디에 추잡함이 있지?”
칼이 검을 고쳐 잡으면서 단언하자 알새틴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아.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두 사람 다 서로에게 할 말은 많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이제 다시금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으니까.
*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버로우 공작이 내지르는 검격을 막아냈다.
으아. 진짜 더럽게 강하네!
방금 전부터 방패를 든 팔이 미친 듯이 아픈 게 뼈에 금이 간 것 같은데?!
평상시라면 아르마디의 손길을 이용해 피해를 회복할 나였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신성영역을 유지하는 것도 벅찬 마당에 그런 걸 쓸 여유가 있을 리 없잖아!
“좆도 안 서면서 여자애를 덮쳐서 뭐하려고?♡ 날 붙잡아 봐야 자괴감만 들 뿐 아냐?♡ 발기부전 공작?♡”
이를 꽉 깨문 채 다시금 도발을 내뱉었다. 그러자 공작이 다시금 검을 휘두른다.
녀석이 내지르는 검을 다시금 방패로 받아냄과 동시에 뼈를 타고서 뇌까지 고통이 전해진다.
“아가씨!”
다급히 달려 온 칼이 공작을 떼어내 준 틈을 타 가방에서 물약을 꺼내어 마셨다.
금이 갔던 뼈가 붙음에 따라 눈물이 새 나올 정도의 통증이 스쳐갔지만 이를 꾹 깨물고서 비명을 참았다.
젠장. 버로우 공작 이 새끼는 왜 잠에서 깨질 않는 거야.
지가 무슨 공주야? 칼이 왕자님 코스프레를 하고 키스라도 해줘야 해?
하. 진짜 돌아버리겠네!
상황이 좋지 못했던지라 수위를 생각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도발을 내뱉었음에도 버로우 공작은 세뇌에서 풀려 나오지 못했다.
도발이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아.
타리키가 목소리를 내는 횟수도 줄었고 악신의 권능도 거의 이용하지 않는 걸 보면 세뇌가 이전에 비해 약해진 건 맞을 거야.
근데 저 녀석이 깨어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칼과 알새틴이 협력해 공작과 대치를 이루는 것을 보며 주변을 살핀다.
페이비와 요한은 주변의 소란 속에서도 차근차근 기적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 기적의 원류인 할배의 판단으로는 80퍼센트 정도 완성되었다는 듯 했다.
<늦구나. 본래 계획했던 대로라면 이미 완성되었어야 했다.>
‘악신의 기운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강한 탓이겠죠.’
신성영역을 펼쳐 어둠이 새어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칼과 알새틴이 정신오염을 호소할 정도다.
페이비와 요한도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됐어요. 문제가 없다면 이 쪽에서 노력하면 그만이에요.’
그리 생각하며 뒤편의 얼빠여우를 보면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얼빠여우가 분명 강자의 한 축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악신과는 격의 차이가 있다.
자신의 구획을 벗어난 숲의 주인이 악신의 구역에서 악신과 힘대결을 하고 있는 것이니.
아무리 얼빠여우가 강하다 할 지라도 슬슬 힘이 부칠 수밖에 없지.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닌가.
입술을 꾹 깨문 나는 그 곳에서 새나오는 피맛을 느끼며 인벤토리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 얼빠여우에게 던져 주었다.
“여아야. 이건?”
‘선물이에요.’
“약해빠진 얼빠여우에게 주는 선물이야.”
신성이건 마력이건 종류에 상관없이 플레이어가 지닌 기운을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물약.
본래는 버로우 저택에 들어가기 전에 써먹으려고 어렵게 준비한 물건이지만 지금은 뒤를 생각할 때가 아니니까.
“…귀한 선물 고맙구나.”
물약을 마신 얼빠여우가 흘리는 웃음을 뒤로 한 채 방패를 치켜들었다.
이대로 대치를 이어 가더라도 기적이 완성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
상대의 생명력은 무한한데 우리의 체력은 실시간으로 깎여나가는 중이니까. 지금은 어찌저찌 대치를 이어나간다 치더라도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 버릴 거야.
하아. 여태까진 마지막 선만큼은 넘지 않으려 그랬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어쩔 수 없네.
버로우 공작. 이거 다 당신이 너무 잠이 많아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했다고 나중에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얼마 안 되는 신성을 폐에 담아 목소리와 함께 내뱉는다.
“발기부전 공작♡”
칼과 대치하던 버로우 공작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그 눈동자에 묻어난 것은 순수한 붉은색의 분노.
“네 아들은 허접해도 사람을 구하려다가 죽은 착한 허접이었어♡ 근데 넌 뭐야?♡ 차였다고 자기를 찬 남자한테 검을 휘두르질 않나~♡ 여자애를 때려서 울분을 풀려들질 않나~♡ 무덤에 있는 네 아들이 이 꼴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응?♡”
내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그 붉은색이 점차 진득하고 질척해져 간다. 그의 마음에 담겨있을 미련처럼.
“대답 안 해?♡ 아아. 못 하는 거구나?♡ 마음을 줬다가 같은 상처를 받을 게 무서워서 둘째를 무시한 겁쟁이니까♡ 아들의 대답을 상상하는 것도 무서워서 못 하겠다~♡ 그치?♡”
공작은 나를 노려보면서 검을 휘둘러 칼과 알새틴을 떨쳐 냈다.
바로 내 쪽으로 달려들 것이라 생각해 방패를 강하게 붙잡았지만 아니다.
그는 가만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내 말이 틀렸어?♡ 유품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서 모든 걸 팔아 넘겼잖아?♡”
“…닥쳐!”
긴장 속에서 한 마디를 더 내뱉었더니 처음으로 공작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비겁하고 심약한 겁쟁이 공작 같으니♡”
“닥치란 말이다!”
좋아. 공작의 세뇌에 균열이 생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아가면 돼.
조금만 더 열 받게 만들면 세뇌를 떨칠 수 있을 거야.
그 동안에 하도 많은 도발을 해온 탓에 내 머릿속엔 공작을 열 받게 만들 무수히 많은 방법들이 떠올랐다.
다들 상대를 열 받게 만들기에 적절해 보였지만 내 직감이 이야기하는 최고이자 최악의 방법은 단 하나 뿐이었다.
“노안이어도 이 정돈 보이지?♡”
방패를 옆으로 치운 나는 방금 전 인벤토리에서 꺼낸 목걸이 하나를 공작에게 보여주었다.
“자 인사해♡ 당신의 허접한 아들이 허무하게 죽으면서 남긴 볼품없는♡…”
“네 녀어어어어언!”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입을 닫기도 전에 공작이 울분에 찬 외침과 함께 돌진했으니까.
검에 깃들어있는 것은 악신의 마력이 아닌 회갈색의 오러인가.
하. 그러게 잠꾸러기 아저씨. 좀 일찍일찍 일어나셨어야지.
그랬으면 내가 이런 말까지 할 일이 없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말입니다. 자다 깼으면 주변을 좀 둘러보시죠.
안 그럼 뒤통수에서 뭐가 떨어질지 모르잖아요.
콰직!
공작이 드러낸 틈을 놓치지 않은 칼이 자신의 검면으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날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오러로 강화된 검은 충분한 흉기다.
그런 물건을 칼이란 이름의 인간 흉기가 휘둘렀으니 버로우 공작의 뒤통수에 얼마나 강한 충격이 가해졌겠는가.
머리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난 후에도 비틀거리며 앞으로 걷던 공작은 이내 바닥에 널부러지고 나서도 도로를 긁어가며 앞으로 움직이다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안 죽었죠?’
<걱정마라. 기절했을 뿐이니.>
할배에게 확인을 구한 나는 조심스레 그의 근처로 다가가서는 앞으로 뻗어진 버로우 공작의 손 위에 아들의 유품을 꼭 쥐어주었다.
그리고서 마음으로 사죄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이해해달라곤 안 할 게요.
나중에 뭘 어떻게 하건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영애님!”
사죄의 말을 내뱉던 중 페이비의 다급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뭐야?! 뭔데!
또 무슨 변수가!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여기로 와 주세요!”
…
하아.
페이비.
잘 했어.
잘 했는데 있잖아.
조금만 더 빨리 해줬으면 안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