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2
카리아를 따라 저택 안으로 발을 옮기자 바닥에 널부러진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악신에게 홀려있던 자들을 기절시켜둔 것이라는 모양이다.
“고용주님 성격 상 다 죽이면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신경 좀 썼지.”
‘고생하셨어요.’
“흐응. 고생하긴 했나보네. 뼈마디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좀 봐. 이러다 몸으로 악기연주도 할 수 있겠다.”
“…좀 그냥 순순히 칭찬 좀 해주면 안 돼?”
안 됩니다. 정확하게는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칭찬을 하는 순간 평소 이상의 매도가 나올 테니까 이 정도로 만족하세요!
투덜거리는 카리아의 뒤를 쫓아 계속 저택을 걷던 중 문득 비릿한 냄새가 내 코 안으로 스며들었다.
누군가 알려준 것은 아니지만 난 이 냄새를 알고 있었다. 내가 여태까지 넘어 온 수많은 위기 속에는 항상 이 비릿한 향이 껴 있었으니까.
피 냄새.
그것도 인간의.
“아가씨.”
“…고용주님? 잠시.”
칼과 카리아의 만류를 무시하고서 점차 진해지는 냄새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수련을 거치며 예민해진 내 감각은 비린내가 시작된 지점을 포착해주었으니까.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최소한 십수명은 될 듯한 사람의 시체를 일렬로 눕힌 채 기도하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고통 속에서 죽은 게 분명한 이들의 모습은 내게 충격을 선사했지만 공황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예민해진 내 감각은 저들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생명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에 남아있는 불길한 기운.
저들은 생전 타리키를 모시던 자들일 것이다. 이 영지를 지옥으로 만들려던 쓰레기들일 것이다.
그러니 동정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지만 내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호흡이 속도를 올린다.
“아가씨.”
‘괜찮아요.’
“허접주제에 누굴 걱정하는 거야?”
처음 내 손으로 무언가를 죽였을 때 칼에게서 들은 조언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엔 남아있다.
지금은 이게 정상.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무뎌지게 되겠지.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일은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지켜보는 거야. 저 모습에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달래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으려니 내 뒤편에서 긴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아. 진짜. 야 이 변태 자식아. 정리해 두라고 했잖아.”
카리아가 남자에게 무어라 그랬음에도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감은 채 묵묵히 기도를 올릴 뿐.
그 모습에 카리아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런다고 남자에게서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고용주님. 오해할까봐 이야기를 해두자면 일부러 죽인 건 아냐.”
‘알아요. 카리아.’
“알아. 주책 많은 아줌마.”
이걸 가지고서 카리아를 질책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가 타인을 죽이지 않고자 하는 건 신념이 아닌 내 자신의 부족 때문. 이 부족함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 어쩌겠는가.
내 말 한 마디에서 무언가를 알아차린 걸까. 카리아는 그 이상 무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내리 앉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페이비를 비롯한 일행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알새틴이나 얼빠여우야 당연히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요한 또한 무표정했으며. 심지어 페이비조차도 죽은 자들을 향해 목례를 건넬 뿐이었다.
모두가 이런 풍경에 익숙한 것이다. 나만을 제외하고는.
미숙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기분에 헛웃음을 흘리고 있으려니 남자가 기도를 끝마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리아님. 제 아무리 악인이라 할 지라도…”
그는 카리아에게 무어라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의 선명하고도 집요한 눈동자를 본 순간 난 이 남자를 어디에서 봤는지 떠올렸다.
그. 뭐시냐. 미와 변태를 모시는 변태였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새끼가 얼빠 여우에 비견되는 변태라는 거.
“영애! 꼭 다시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아아아!”
“히약?!”
피칠갑을 한 채 달려드는 변태의 모습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선 순간 칼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그는 즉시 자신의 주먹 위에 오러를 덧씌우더니 변태를 향해서 주먹을 내질렀다.
자그마한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는 깔끔한 일권.
거기에 얻어맞은 변태의 몸이 허공을 난다.
본래라면 그 비상은 벽에 부딪히는 것으로 끝맺음 지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규칙이니까.
허나 변태의 몸은 허공에서 갑작스레 멈춰버렸다. 어느새 그의 주변을 둘러싼 안개가 그 몸을 붙잡았기에.
“조져.”
얼빠여우가 목소리를 내기 무섭게 변태가 바닥에 처박히더니 그 위에 질량을 지닌 안개 여럿이 생겨나 변태를 짓밟기 시작했다.
…어. 일단 저 놈을 쫓아내 준 건 고마워.
근데 있잖아. 저거 괜찮은 거야?
저러다 죽는 거 아냐?
“괜찮아. 고용주님. 저 놈 쉽게 안 뒤져.”
이런 내 생각을 읽은 듯 옆에서 박수를 치던 카리아가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잘은 모르겠지만 쌓인 게 많은 것 같네.
괜히 말을 꺼냈다만 불똥이 튈 거 같으니까 가만히 있자.
“마음 같아선 저 쓰레기가 맞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따라와. 고용주님.”
“그래. 가거라. 이 놈은 내가 적당히 손 보고 있을 테니.”
얼빠여우에게 변태를 맡기고.
아니 생각해보니까 얼빠여우한테 맡겨도 되는 건가?
둘 다 징그럽기로는 극에 달한 쓰레기들인데 저 둘을 가만 내버려둬도 괜찮은 걸까?
나중에 의기투합하기라도 하면 진짜 재앙이 될 것 같은데.
…괜찮겠지.
얼빠여우가 변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동족혐오를 하는 변태니까.
둘을 내버려두고서 그 자리를 떠난 후 카리아가 우리를 안내해 준 곳은 저택의 한 방이었다.
그 방은 꼭 모델하우스 같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자그마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곳. 그런데 청소는 깔끔하게 되어 있어서 먼지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곳.
난 이 방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버로우 가문 사람 이외의 그 누구도 몰라야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바깥에서 온 나만은 알 수밖에 없었다.
여기 죽어버린 버로우 가문 장남의 방이잖아.
“나크라드는 고용주님이 오자마자 열등공자를 데리고서 이 안으로 들어갔어.”
성격이 안 좋네. 나크라드. 여기에다가 던전의 입구를 만들다니.
과연 쓰레기를 모시는 중2병 쓰레기다워.
“고용주님.”
‘네?’
“뭐.”
“고용주님이 보기에 이 던전은 어때? 평범한 던전처럼 보여?”
‘아뇨.’
“노처녀 아줌마. 노안이 심하게 왔구나. 네 눈에는 저게 평범한 던전 같아?”
방 한 가운데에 자리한 던전은 일반적인 던전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내가 아드리를 구하기 위해 들어갔었던 던전.
아그라가 아닌 다른 악신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무언가를 쐐기 삼아 구성되는. 단 한 사람밖에 들어갈 수 없는 던전.
“확실히 고용주님이 던전에 관해선 스페셜리스트라니까. 정답. 이건 일반적인 던전하고는 좀 다른 곳이야. 차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큰 건 한 사람밖에 들어가지 못한단 거겠지.”
“제가 가겠습니다.”
카리아가 던전에 관해 설명하기 무섭게 칼이 앞으로 나섰다. 위험한 장소라면 자신이 향하는 것이 당연하단 그 모습은 실로 기사다운 모습이었다.
단 한 가지. 주인의 의사를 신경쓰지 않았단 점을 제외하면.
‘칼…’
“허접. 가만히 있어.”
야. 칼. 내가 이 던전 하나 공략하자고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이제 와서 이걸 남한테 양보하겠냐?!
기사란 녀석이 상도덕이 없어. 상도덕이.
판 다 차려놨는데 거기에서 제일 맛있는 걸 빼먹으려 드는 게 맞다고 생각해? 어?!
내 개가 되고 싶다면 최소한 기다려 정도는 배우란 말야!
“허나 아가씨!”
‘칼. 당신이 저보다 던전에 관해서 잘 아나요?’
“잘 하는거라고는 검 휘두르는 것밖에 없는 강아지가 왜 이렇게 나대는 거야? 네가 나보다 던전에 관해서 잘 알아?”
“…그건. 아닙니다만.”
“영애님. 칼 교수님의 말이 옳아요.”
칼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주춤거리자 이번엔 페이비가 목소리를 냈다.
“영애님의 몸상태는 최악이잖아요. 저 안으로 들어갔다가 무슨 위험이라도 겪으면!”
뭐어. 그렇지. 솔직히 말해서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긴 해.
근데 있잖아. 난 이런 상태에서 움직이는 데에 무척이나 익숙하다고.
알른 가문에서 훈련을 할 땐 이것보다 더 심할 때도 있었어.
이건 별 거 아냐!
‘이건 제가 해야만 해요!’
“허접 성녀. 이걸 개허접인 너네들한테 맡기라고? 진심으로?”
그러니까 나한테서 던전을 빼앗아 가지 마! 저거 하나 보고 여기에 온 거란 말야!
페이비는 내 말을 듣고서 무어라 답을 하려 했지만 그것보다 요한이 페이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성녀님. 그만하시죠.”
“그렇지만 주교님!”
“영애께서 택한 일입니다.”
가만 요한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페이비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페이비를 내버려 둔 채 내 앞으로 온 요한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신성이 집약되어 있는 구체였다.
“제 몸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신성입니다. 부디 영애의 뜻대로 유용하게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요한이 전해 준 신성을 받아들자 몸 안에 기운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신성이 완벽하게 회복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정도면 나크라드를 박살내기에는 충분하다.
과거 나크라드에게 능욕당했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저도! 저도 드릴게요! 영애님!”
요한이 준 신성을 받아든 채 몸을 점검하고 있으려니 페이비가 다급히 내 옆으로 달려와서는 내게 신성마법을 걸어주었다.
방금 전 기적을 일으키느라 대부분의 힘을 써버린 탓에 그녀의 마법은 성녀라는 명성에 비해서 미약했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진짜였으니. 신성마법은 분명한 효과를 발휘했다.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낀 나는 페이비에게 어떻게 감사를 전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재앙이 일어날 게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난 말로 감사를 전하는 대신 그저 페이비를 향해 웃어주기만 했다.
내 웃음에 페이비가 웃음으로 답례한 것을 보면 이게 옳은 선택이었겠지.
그 모든 과정이 끝나고서 내가 앞으로 나섰을 때 나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마지막으로 점검을 해보자.
여기저기 구부러지긴 했지만 아직 갑옷은 멀쩡해.
안키르에는 여전히 상처 하나 없지.
메이스야 언제나 그렇듯 최상의 상태고.
나야 뭐 언제나 준비 되어 있지.
그런 게 썩은물이란 인종이니까.
“다녀와. 고용주님.”
‘금방 갔다 올게요.’
“아줌마의 주름이 더 늘어나기 전에 돌아올게.”
“…아니. 진짜아아아. 이럴 때까지 그래야겠어?”
앓는 소리를 내는 카리아를 뒤로 한 채 던전 안으로 한 발을 내딛은 그 순간 할배가 목소리를 냈다.
<여아야.>
‘왜요?’
<나는 말이다. 가끔 네게 괴이한 축복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네 속마음을 그대로 전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저도 자주 그래요.’
메스가키 스킬이 없었다면! 이라는 생각은 이미 수 도 없이 해보았다.
오죽하면 제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뭐부터 할지 계획을 짜놨을까.
물론 그 계획이 실현 될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우리 개허접 변태 쓰레기 주신께선 메스가키 스킬을 없애 줄 생각이 없으신 듯 하니 어쩌겠어.
‘근데 그건 갑자기 왜요?’
<아니구나. 네 마음을 전할 수 있었더라도 넌 강한 체를 했을 터이니>
‘네? 뭔 소리에요. 그게?’
<하. 됐다. 신경 쓰지 마라. 이제부터 해야 할 것에나 집중하도록.>
‘…할아버지. 그러는 게 더 신경 쓰이는 거 아세요?!’
아. 진짜. 이제부터 집중해야 하는데 괜히 머리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고요!
할배에게 투정을 부리며 한 걸음을 더 내딛은 순간 주변의 풍경이 뒤바뀐다.
[어둠의 안에서 그대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으리라.]
자아. 그러면.
타리키가 준비한 테마파크를 즐겨보도록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