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숨 가쁘게 도망치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분명 그 녀석들이 한 일이야!”
대장을 따라 나왔던 동료 대부분은 패닉에 빠져 흩어져 버렸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2년 동안이나 멀쩡했던 보스의 오브젝트가 갑자기 오작동을 일으키면서부터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앙상한 콘크리트 사이로 길쭉하게 튀어나온 철근에 눈을 꿰뚫리는 일?
있을법했다.
갈라진 콘크리트 바닥이 갑자기 무너져 내려 동료 하나가 그 속으로 추락해 죽는 일?
있을법했다.
수류탄이 달린 군장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습관이 있는 동료의 수류탄 안전핀이 저절로 빠져 폭발하는 일?
있을법했다.
기름 같은 질감의 빗물에 미끄러져 옥상에서 추락하는 일?
있을법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니, 절대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들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공포에 질려 크게 소리 질렀다.
“저주야. 유령의 저주라고!”
몇몇은 공포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주? 유령? 말도 안 돼.’
남자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분명 대장이 잡으려던 녀석들이 배후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의 곁에는 아직 냉철함을 잃지 않은 동료들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도망친 사냥감의 뒤를 쫓았다.
“잠깐!”
선두에 선 동료가 갑자기 모두를 멈춰 세웠다.
“저기 뭔가 있어. 핏빛으로 얼룩진 무언가가!”
순간 유령처럼 하얗고 핏빛으로 얼룩진 무언가가 골목 어귀에서 스쳐 지나갔다.
“으아악!”
동료 하나가 질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유령이야! 유령이 나타났어!”
그는 공포에 휩싸인 채 골목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댔다.
골목의 어둠 속으로 총알이 빨려 들어갈수록, 콘크리트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함께 불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젠장.”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고 위태로운 건물들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협적으로 솟아 있었다.
“그만 해! 제발 멈춰!”
남자는 광기에 사로잡힌 동료에게 달려가 총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총알에서 시작된 건물의 진동이 점점 강해지더니 결국 건물의 일부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쾅!
먼지와 잔해가 사방을 뒤덮었다.
기적적으로 남자는 깔리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동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려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남자는 마치 자동차에 치인 것처럼 뼈가 부러지고, 피부가 찢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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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굴러서 골목의 어둠을 빠져나와 보니, 쫓아가던 사냥감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아. 하아. 살아남은 건가?”
남자는 생존을 축하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붕괴한 건물의 어둠 속에서 핏방울이 묻은 하얀 덩어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을 인도하는 사신의 모습이었다.
“사… 살려줘….”
남자는 힘겹게 고갤 돌려 쫓고 있던 사냥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하늘에서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죽음을 직감하며 눈을 감았다.
***
자유 도시 연합 외곽, 스캐빈저의 영역.
모종의 이유로 스캐빈저들이 추격을 그만둔 것으로 보였지만, 청 일행은 여전히 조심조심 골목을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청의 머리 위에는 정체불명의 털 뭉치가 올려져 있었다.
털 뭉치는 마치 자신을 모자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조금 납작해져 있었다.
“그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저격총을 어깨에 멘 여자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청에게 물었다.
“응, 괜찮아.”
청은 머리 위의 털 뭉치를 들어서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
그리고 털 뭉치에서 튀어나온 조그마한 손발을 톡톡 건드리면서, 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마치 정신 오염된 사람을 보는 것처럼 찜찜하게 바라보았다.
피까지 묻어있었던 흉흉한 오브젝트를 저렇게나 친근하게 여기다니?
여자는 걸음을 빨리해서 앞장서서 걸어가는 남자와 나란히 섰다.
(아직도 못 찾았어?)
여자는 남자에게 붙어서 소곤소곤 말했다.
(내가 ‘청’처럼 기계에 능숙한 줄 알아? 찾고 있으니까 기다려.)
남자는 커다란 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그마한 스마트 폰을 두들기고 있었는데, 청에게 달라붙은 오브젝트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있었다.
남자는 정보를 찾는데 생각보다 애를 먹고 있었다.
자유 도시 연합에서 중국 쪽 네트워크로 접속이 쉽지 않은 데다가, 중국에서 해외 네트워크로 접속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찾았다!)
그렇게 남자는 힘겹게 이리저리 우회해서 인터넷을 들쑤시던 끝에 저 정체불명의 오브젝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름 : 주황 사신.>
<등급 : 다른 회색 사신의 파생처럼 특급 오브젝트로 예상된다.>
<특급 오브젝트인 회색 사신의 파생 오브젝트이다.>
<비행 능력과 구름 고기들을 조종하는 능력 외에는 밝혀진 능력이 없다.>
여자는 화면의 뜬 정보를 보고 깜짝 놀라서 큰소리를 지를뻔했다.
(특급? 특급이라고?)
자유 도시 연합 주변은 사냥해서 의수 같은 장비로 개조할 만한 오브젝트가 상당히 빈번히 나타나지만, 이상하게도 특급 오브젝트가 나타난 적은 없어서 더욱 놀라웠다.
(특급이라니. 용병 매뉴얼을 보면, ‘특급’은 대처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
(뭐, 한국에서 지정한 등급이니까, 우리랑은 체계가 다를 수도 있어. 그래도 섣불리 자극하지 말고 지켜봐야겠지.)
(그래.)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청을 바라보며 속닥거리는 동안, 일행은 어느새 거대한 벽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안 벽이야. 이제 이곳만 넘으면 의뢰 완료!”
청은 굉장히 힘들었는지, 조금은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보안 벽을 올려다보았다.
***
‘거대 엄마 골렘’에 반짝이는 별빛을 깃들게 한 것으로 ‘거대 골렘 만들기’는 끝이 났다.
그 ‘거대 엄마 골렘’은 마시멜로 평원을 장식하는 거대한 구조물이 되어버렸다.
아마 푸른 사신들이 부르면 소환되는 방식으로 사용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 골렘!>
<진짜 엄마 골렘!>
거대 엄마랑 똑같이 커다랗고 빛나는 골렘이 만들어져서 그런지, 푸른 사신들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나도 행복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금 사신들이 휴가를 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내 격리실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엄마 휴가!’
‘휴가!’
휴가 중에는 언제나 황금 사신들과 같이 다녀야 한다는 점만 빼면 평소랑 다를 게 없었다.
더듬이부터 시작해서 손가락, 발가락,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사이까지 황금 사신들이 달라붙어 버렸다.
으으, 걸리적거려.
황금 사신이 쿠션처럼 말랑말랑하지 않았다면 엄청 불편했을 텐데, 말랑말랑해서 참을 만했다.
나는 등을 폭신한 침대에 파묻고, 말랑 따끈한 황금 사신을 이불 대신 덮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TV를 틀고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번 뉴스 속보 전해드립니다.]
[중국 공안과의 협조를 통해 황금뿔을 밀수하던 일당이 검거되었습니다. 검거된 용의자들은 온몸을 오브젝트로 개조한 충격적인 상태였습니다.]
[이는 오브젝트 개조자들이 절대 빠져나올 수 없게 막아놓은 자유 도시 연합 봉쇄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중국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봉쇄 시스템을 철저히 재점검하기 위해 자유 도시 연합 인근에 협회 소속 전문가들을 긴급 투입했습니다.]
[중국 당국은 앞으로도 불법 밀수와 오브젝트 개조에 엄중히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최신 소식이 있는 대로 계속 전해드리겠습니다.]
[이상 뉴스 속보였습니다.]
황금뿔을 녹여서 만든 금괴가 뉴스 화면에 비치고 있었다.
보통의 금과 달리, 태양을 품은 것 같은 따뜻한 색의 금덩어리.
같이 TV를 보는 황금 사신의 뒤통수랑 비교하면 확실히 비슷한 금색이었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황금 사신들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저 해맑은 표정으로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황금색 더듬이를 살랑살랑.
가장 맏이인데, 공부 좀 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황금 사신의 더듬이를 콕콕 찔렀다.
그러자, 황금 사신은 내 손가락을 살짝 물고 히히 웃었다.
뭐, 귀여우니까.
필요 없나?
***
자유 도시 연합, ‘위 가문’의 영토 외곽.
거대한 건물처럼 커다란 보안 벽을 통과한 청과 그 일행은 의뢰 물품을 전달할 장소에서 수령자를 기다리며 작게 다투고 있었다.
“청, 다시 생각해 봐. 이번 의뢰 뭔가 조금 꺼림칙해.”
여자는 청에게 달라붙어서 의뢰 자체가 수상하니, 포기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의뢰 포기, 다시 의뢰품을 들고 일을 가져다준 중개인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사실 이번 의뢰는 이상한 점이 꽤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추적해 온 스캐빈저.
예상보다 많은 숫자의 습격.
스캐빈저의 수장 ‘전차’의 등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사라진 스캐빈저들.
하지만 청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면서 완고하게 거부했다.
“연합을 다스리는 세 가문 중 하나인 ‘위 가문’의 의뢰야. 포기하면 용병 일 하기 힘들어져.”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한 지역을 다스리는 스캐빈저의 우두머리가 다가올 정도의 의뢰품이면, 포기했을 때가 더 문제일 수도 있어.”
그리고 청은 진지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가문 의뢰’를 맡아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근처에 서 있던 여자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청의 머리 위에 모자처럼 얹어진 주황 사신은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이뤄줄게. 그 소원.’
주황 사신은 자기 애착 인간은 듣지 못할 의지를 흘리며 다짐했다.
저벅저벅.
여자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하려는 순간, 정갈한 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자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젠장 가문 놈들은 볼 때마다 소름 끼친단 말이야.”
가문에서 나온 사람은 정갈한 회색 양복을 갖춰 입은 것 ‘처럼’ 보였다.
문제는 옷과 신체의 구분이 없이 모두 이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반쯤 상한 고등어를 육각형 모양으로 잘라서 얼기설기 꿰매놓은 것 같은 생김새.
마치 ‘옷 입은 사람 모양’ 조각상처럼 피부와 옷이 달라붙어 있는 생김새.
그리고 외계인처럼 흰자가 없이 온통 검은색 눈동자로 가득한 눈.
도무지 익숙해지기 힘든 생김새였다.
“물건을 가져왔군.”
가문에서 나온 수령자의 말에, 남자는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앞에 내려놓았다.
수령자는 가방을 받아 들고, 잠시 그 무게를 가늠하듯 손에 쥐고 있었다.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수고했군. 물건 확인되면 약속된 금액이 입금될 것이다. 이만 돌아가라.”
수령자의 어조는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다.
마치 프로그램된 기계처럼,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의 기복도 없었다.
일행을 향한 그의 시선은 무심한 듯 차갑기만 했다.
그렇게 대화는 끝났다.
청과 그 일행은 익숙한 것처럼 아무런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괴상한 털 뭉치 머리 장식처럼 자신을 위장하고 있던 주황 사신은 잔뜩 긴장한 채, 그 ‘수령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로운 오브젝트!’
오브젝트를 얼기설기 이어 붙인 스캐빈저들은 인간이었지만.
저 수령자는 아주 해로운 데다가, 단 한 번도 인간인 적이 없는 100% 순수한 오브젝트였다.
***
청 일행이 떠난 공터는 적막에 잠겨 들어갔다.
수령자는 그런 적막 속에서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고 특별한 구조로 만들어진 엄중한 봉인을 풀고 배낭을 열었다.
그러자 찬란한 금빛이 공터에 어른거렸다.
배낭의 내용물은 한국에서 밀수되어 온 정육면체로 가공된 황금뿔 덩어리였다.
배낭을 다시 어깨에 멘 그의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주변을 살피며 경계의 눈길을 보냈지만, 고요함만이 그를 맞이할 뿐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긴장을 놓은 듯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수령자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마치 공간 너머 허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스캐빈저들이 냄새를 맡았던 것 같지만… 물건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목소리에 힘을 싣고 덧붙였다.
“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본 수령자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맴돌았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얻은 사람처럼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수령자는 배낭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대업에 쓸만한 순수한 인간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대감과 동시에 신중함이 묻어났다.
배낭을 단단히 붙든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먼지 사이로, 수령자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