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3
던전 안으로 들어간 순간 내 시야에 비친 것은 방금 전 보았던 버로우 저택의 풍경이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일상 속에서 시간이 멈추어 버린 저택이라 해야 할까.
바닥을 닦으며 수다를 떨다 멈추어버린 시녀들.
그 모습을 못 마땅한 듯 바라보다 굳어버린 시녀장.
초침을 따라 움직이다 초침과 함께 멈추어버린 괘종시계의 추.
복도를 분주히 걸어가던 시종.
무거운 짐을 영원히 들고 있어야 할 요리사.
카메라 속 사진에 발을 들인 것 같은 풍경을 가만 바라보던 나는 심호흡을 하며 안키르에 신성을 담아 주변으로 펼쳤다.
어둠을 물리기 위해서.
허나 주변의 풍경은 바뀌지 아니했다.
…아. 이거야?
새끼. 제일 개 같은 걸로 준비했네.
<너답지 않게 신중하구나.>
‘여기에 대해선 아는 게 없거든요.’
타리키가 나만을 위해 만든 이 세상에만 존재하는 던전.
음습한 쓰레기 로리콘이 자신만의 로맨틱함을 담아 준비한 선물.
잠시라도 마음을 놓는 순간 그대로 목이 날아가겠지.
처음 공략하는 던전인데 강제 원코인 플레이라니. 게임에 이런 기믹이 있었다면 제작진 새끼들 대가리가 있냐고 그랬을 텐데.
애써 웃으며 긴장을 달래고 있었더니 할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모른다고?!>
‘네.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농담하는 게지?>
‘주신께 맹세코 전 이 던전에 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불경한 내가 허접 주신한테 맹세해봐야 믿음이 안 가는 거 아닐까 싶었다만 다행히 할배는 내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더냐! 몸 상태도 안 좋은 녀석이 널 죽이려고 만든 곳에 발을 들였다고!?>
‘이 정도는 괜찮아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타리키 그 음습한 멍청이가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요?’
할배에게 가볍게 대꾸하면서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멈춰버린 버로우 저택의 풍경 속에서 자그마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갑옷이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사령기사겠네.
수는 둘이고.
무장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검이구나?
직감에 따라 방패를 움직인 나였지만 철벽은 나에게 다른 곳을 막아야한다고 이야기했다.
아. 여기가 아니었어?
티잉!
방어가 불안정했던 탓에 중심이 살짝 흐트러졌다.
이대로 전투를 계속했다간 피해가 누적되겠다 판단을 내린 난 방패 면에서 신성을 터트리는 것으로 사령을 멈춰 세우고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신성의 소모가 약간 컸지만 몸에 부담이 누적되는 것보다는 이게 나아.
<무슨 일이냐?!>
‘할아버지. 소리 안 들려요?’
<무슨 소리가 난단 것이냐! 이 곳은 고요하다!>
젠장. 안키르의 능력이 할배에게까지 미치지 못 하는 가보네.
‘오감 교란이라고 아세요? 타리키를 상대하다 보면 겪어볼 수 있는 건데.’
<…그게 이 던전 전역에 펼쳐져 있다고?!>
오감 교란.
봉인에서 부활한 타리키와 보스전을 치르다 보면 마주할 수 있는 패턴.
타리키의 권능에 의하여 오감을 강탈당하는 기믹.
게임 본편에선 화면이 검게 물들고. 소리가 멈추고 HP바건 상태창이건 까맣게 칠해지는 식으로 구현됐었지.
타리키가 이만큼 강하고 까다로운 존재란 걸 보여주는 기믹인데 공략하는 입장에선 모르면 뒤져야지로 밖에 안 느껴지더라.
물론 공략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안키르처럼 어둠을 거둘 수 있는 아이템을 지니고 온다면 청각을 되찾을 있거든.
청각 이외의 다른 감각? 그건 복구 불가능. 오롯이 사운드플레이를 하는 것으로 패턴을 넘어서야 타리키를 쓰러트릴 수 있다.
이야기로만 들어도 엿 같고 실제로도 욕지거리가 나오는 패턴이지만 이 기믹의 평가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기믹이기도 하고. 공략만 제대로 숙지하고 나면 깨는 것 자체는 쉬웠으니까.
고인물 중에선 상위 악신의 패턴인데 이것보다 더 어려워야 하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꽤 있을 지경이었지.
정작 이 기믹이 사람들의, 정확하겐 소울 아카데미에 푹 빠진 사람들의 증오를 사게 된 건 본편이 나오고 반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 때 한 악질 모드러가 타리키의 던전 전체에 오감 교란 기믹을 집어넣을 수 있음을 밝혔거든.
참 그 씹새끼는 착하고 부지런한 씹새끼였어. 다른 악질들을 위해서 기믹 집어 넣은 방법이랑 활용법까지 설명서를 만들어 줬으니까.
덕분에 그 뒤로 오감 교란 던전을 몇 번이나 마주해야 했었는지.
다시 돌이켜봐도 끔찍하네. 한 번 실수하는 순간 뒤져야 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또 다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방패를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내 감각을 믿지 않고 오롯이 철벽의 외침에만 의존했다.
나는 실수할 수 있지만 철벽은 언제나 최선의 움직임만을 알려주니까.
철벽이 가르쳐 주는 것을 뒤따라가듯 움직이다 보니 상대의 공격에 반격을 가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지만 난 조급해 하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도박수를 던지면 어떻게 되는 지를 한 기사가 친히 알려 주었기에.
막아내고. 막아내고. 또 다시 막아내고.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서서히 내 감각이 철벽의 외침과 닮아가기 시작했다.
‘오른쪽 위에서 대각선.’
오른 쪽 위에서 직… 아. 이 소리가 대각선이야?
알겠어. 수정할게.
차츰차츰.
‘횡으로 크게 베기.’
횡으로 크게. 이건 정확했고.
‘그 후 왼쪽에서 다른 기사의 돌격.’
왼쪽에서 협공까진 알아 맞췄는데 이게 돌격이었구나.
어쩐지 소리가 무겁더라.
판단과 판단 사이의 틈이 격차를 좁히다.
‘양 쪽에서 함께 공격.’
양 쪽에서 함께 공격.
어느 순간 두 판단이 완벽히 일치하는 때가 찾아왔다.
신기한 느낌이었다.
내게 존재하는 감각이라고는 소리 뿐인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사진과도 같은 버로우 가문의 풍경 뿐인데.
내 앞에 서 있는 기사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 했으니까.
이제 슬슬 반격을 시작해볼까.
내 오감 대부분이 맛이 간 상태일 지라도 상대에겐 오감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니 녀석들의 귀에는 내 목소리가 들리고.
목소리가 전해진다면 도발을 할 수 있지.
“개변태뼈다귀들♡ 지금 여자애 눈을 가려 놓고 뭘 하려는 거야?♡ 좆도 없으면서 왜 이리 욕망에 충실한 건지 모르겠네~♡ 생전에 욕구불만이었어?♡ 여자 손도 못 잡는 찐따들이었구나?♡ 그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내 귓가에 검을 치켜드는 소리가 들린다.
위에서 아래로.
‘위에서 아래로.’
위력만을 신경 쓴 멍청한 공격.
‘강한 공격.’
회피한 후 틈을 노려서 대가리를 깨부순다.
‘막아내는 것보다 회피가 안전.’
콰직!
두개골이 박살나는 소리가 고막을 찌르듯 파고든다.
메이스를 든 손에 촉감이 전해지지 않아서 아쉽네. 메이스를 휘두르면서 제일 즐거운 순간이 손에 묵직한 감각이 전해지는 때인데 말야.
남은 사령기사를 처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감각을 되찾은 이상 사령기사는 프레이는커녕 아서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장난감일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두 놈을 처리하고 나니 저택 입구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멈춰버렸던 버로우 가문의 풍경이 사라지고 방금 전 전투로 엉망이 되어버린 곳으로.
그로부터 머잖아 오감이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피비린내였다.
너무도 짙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향취가 코를 찌른다.
<여아야! 아래를 보지 마라! 절대로 고개를 아래로 내리면!…>
무엇을 본 것일까 할배가 다급히 소리를 쳤지만 그 때는 이미 내 턱이 아래로 향해 있었다.
아. 이래서 보지 말라 그랬구나.
거기에는 기사가 있었다.
하얀 해골도 아니고. 썩은 살갗이 붙어있는 사령도 아닌.
사람.
머리가 깨져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어버린. 유언 대신 바닥에 핏자국을 남긴 이들의 얼굴이 바닥에 뉘여져 있었다.
그를 마주한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억지로 억누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몸은 이미 내 의지를 떠난 상태였으니까.
몇 번이고 속을 게워내다가 쓰라린 목과 함께 고개를 들었을 때에 난 또 다시 생기를 잃어버린 이들의 눈을 마주했다.
어디를 쳐다보는 것인지도 모를 그.
<루시이이이!>
머리를 가득 채우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루시! 정신 차려라!>
‘…차렸어요.’
<그럼 고개를 치켜 들어서 천장을 봐라! 그런 후에 네 아래에 있는 기운만을 느껴라!>
‘그게 무슨 소리에요?’
<잔 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보거라! 빨리!>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할배가 시키는 대로 아래의 기운을 감지했다.
기이했다. 내 감각은 방금 전 보았던 기사의 시체들을 마물이라 판단 내렸다.
인간의 자취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가짜?’
<그래. 가짜다.>
‘그치만 방금 제가 봤던 건.’
<생각해보거라. 이 곳은 사람 한 명밖에 들어올 수 없는 던전이다. 이 곳에 또 다른 인간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할배의 말이 옳았다. 던전에 제약이 걸려 있는 이상 이 곳에 나 이외의 사람이 들어오는 건 불가능.
그러니까 지금 내 아래에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처럼 보이는 저것은.
가짜.
타리키가 나를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
…음습한 쓰레기 새끼 같으니. 애초부터 이걸 노렸구나?
던전의 기믹으로 나를 제압하려는 생각은 없었어.
공략될 것을 가정하고서 내 정신을 갉아먹어갈 생각이었던 거야.
<알겠느냐? 그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마물을 쓰러트린 것 뿐이다. 그러니.>
‘알겠어요. 할아버지. 알았으니까 잠시만요.’
어이가 없네.
이게 타리키 네가 생각한 내 공략법이야?
죄책감 속에 파묻어서 질식사시켜 버리는 거?
하. 이 음습한 씹새끼 같으니.
너무 악신다운 방법이라서 극찬의 말이 절로 나오네.
그래. 인정할게. 네 수직질은 존나게 효과적이었어.
할배가 아니었더라면 난 아직도 저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을 테니까.
더 짜증 나는 부분은 이게 타리키의 수작질이란 걸 알아차린 지금도 고개를 내리는 게 무섭고,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역겹다는 거야.
…콰직!
인간의 시체를 흉내 내던 것의 머리를 박살냈음에도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선 붉은 감정이 부글거렸다.
새로운 던전을 공략한단 즐거움은 엣 저녁에 사라져 버렸고. 이제 남은 것은 그저 타리키를 향한 분노 뿐.
눈을 감고서 가빠졌던 호흡을 정돈한 나는 다시금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여아야. 괜찮으냐?>
‘아뇨.’
솔직히 말해 전혀 괜찮지는 않다.
방금 전 눈을 감은 순간 망막에 두 기사의 얼굴에 새겨지던 걸 보면 당분간은 잠도 제대로 자기 어렵겠지.
‘그렇지만 이 던전을 박살내는 데는 아무런 지장 없어요.’
내 선물에 상대가 공들인 선물로 보답했으니 나도 다시 뭔갈 보여줘야지.
아아. 나크라드의 얼굴이 딱딱하면 좋겠다.
그래야 메이스를 많이 때려 박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알겠다.>
‘근데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방금 전처럼 루시라고 안 불러줘요?’
<ㅁ…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구나. 환청을 들은 거겠지.>
‘아닌데요? 완전 제대로 들었는데요? 엄청 간절한 목소리로 루시이이이! 하고.’
<에잇! 그런 소리는 됐고! 지금은 던전을 공략하는 것에나 집중해라!>
푸하핳. 할배. 그 나이 먹고 너무 귀엽게 구시는 거 아니에요?
…
고마워요.
덕분에 좀 기분이 나아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