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도시 연합 뒷골목.
청은 PIG 아저씨의 연락을 받고 아지트에서 나와 흐릿한 네온 빛이 드문드문 깜빡이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안개처럼 떠다니는 독성 물질들은 마치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전봇대를 휘감았다가 다시 뭉쳐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디서도 보기 힘든, 몇 번을 봐도 신기한 광경.
청은 호기심에 손을 뻗어 흘러가는 물감 덩어리를 만져보았다.
노란색의 물감 덩어리는 몽실몽실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휘감다가 다시 뒤로 미끄러져 나갔다.
마치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오염된 깊은 바닷속을 헤엄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깊은 물 속에 잠긴 것 같은 거리에는 외롭게 빛나는 네온사인만이 깜박였고,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라면, 오브젝트 폐를 가진 이곳 주민도 외출을 피할만한 날이었다.
그런 만큼 청은 평소보다 중무장한 채로 거리를 걸었다.
후드에 마스크, 고글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무장하고 있었다.
후드티와 펑퍼짐한 바지 안에는 잠수복 같은 밀폐형 슈트까지 입고 있었다.
오브젝트 피부가 없는 청에게는 오염 물질이 피부에 직접 닿는 것은 꽤 위험했으니까.
그렇다고 날씨를 핑계로 나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PIG 아저씨에게 의뢰했던 물품이 기대되기도 했고, 이런 날씨에 의뢰하러 가는 경우도 꽤 많았으니 익숙해지는 수밖에.
청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머리 위에 얹어진 주황 사신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길거리를 걸어가며, 품 안의 주황 사신에게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다.
“용병 일을 하다 보면 다들 내 몸에 오브젝트를 이식하는 걸 권하더라고.”
“일을 물어다 주는 중개인부터 시작해서, 용병들까지 전부 그러더라.”
“난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 멀쩡한 팔다리를 자르고, 오브젝트를 붙이긴 싫어.”
“하지만 마스크를 쓰고 다녀도 점점 숨 쉬는 게 불편해지는 것 같아. 언제까지 오브젝트 없이 나아갈 수 있을까?”
용병 일과 오브젝트 의체에 관한 이야기부터.
“자유 도시 연합을 지배하는 건 3대 가문이라고 하지만, 용병들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더라고.”
“거신.”
“그 남자를 진정한 도시의 지배자라고 생각하는 용병들이 많아.”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의 이야기.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해.”
“이 도시에 어머니의 유품이 있거든, 그걸 되사려고 ‘자유 도시 연합’으로 들어온 거야.”
“그리고 다시 이 죽음으로 가득한 도시를 떠나는 것까지가 내 계획이야.”
“앞으로 3년만 더 버티면 돼. 물론 여기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절대로 쉽지는 않겠지.”
그리고 그녀의 꿈과 미래 계획 같은 나름대로 중요한 이야기까지 떠들고 있었다.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해버린 걸까.’
청은 말하다 보니, 너무 말했다는 생각에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브젝트는 인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설.
하지만 신기하게도 주황 사신과는 말이 통하는 느낌이라서, 너무 신나게 떠든 감이 있었다.
주황 사신은 조그맣고 통통한 얼굴로 도리도리하기도 하고, 끄덕이기도 했다.
마치 그녀의 심경을 이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황 사신과 떠들다 보니, 어느새 PIG 아저씨의 공장이 가까워져 있었다.
네온사인으로 가득 찬 도심의 뒷골목을 지나, 도시에서 가장 외진 곳에 PIG 아저씨의 공장이 있었다.
청이 느끼기에 공장 주변은 언제나 어둡고 쓰레기가 나뒹굴어 마치 디스토피아의 한 장면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이 주변은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았다.
아마 스캐빈저가 튀어나올 것 같은 흉흉한 풍경이라서 그런 걸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조용한데?’
청은 너무 조용한 분위기가 어색하게 느껴져서, 주황 사신을 꼭 껴안고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장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더욱 위화감이 강해졌다.
너무 조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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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처럼 짙은 공해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 너무 사람이 없었다.
‘공해 중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의문을 품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날카로운 금속성의 섬광이 번뜩였다.
청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예고도 없이 등장한 칼날의 속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
차가운 칼날이 그녀의 목을 잘라버리려는 순간, 청은 눈을 꼭 감고 주황 사신을 끌어안았다.
***
미니 사신 정원, 설원 한복판.
나는 얼음으로 멋지게 만들어진 얼음 궁전을 내려다보며, 약간 뿌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와, 드디어 끝났네.
절대로 끝날 것 같지 않던, 황금 사신 얼음 궁전 복원 작업이 끝나버린 것이었다.
‘완성!’
‘완성!’
황금 사신들은 미니 사신용 얼음 궁전이 완성되어서 즐거운지.
미니 사신용 궁전 내부를 뚜방뚜방 돌아다니거나.
궁전 주변에서 만세 거리며, 폴짝폴짝 뛰거나.
내 어깨 위에 앉아서 궁전을 내려다보거나.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좋아하고 있었다.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좋아하고 있었지만, 태양처럼 환한 표정만큼은 모두 똑같아 보였다.
얼음 궁전 근처에 앉아서, 황금 사신들을 구경하던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의지를 흘렸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네.’
그러자 모든 황금 사신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나를 향해서 고개를 동시에 돌렸다.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기분이라서, 절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그렇게 나를 바라보던 황금 사신들은 신나게 놀던 것을 까먹은 것처럼 갑자기 우울한 표정으로 나에게 엉기기 시작했다.
‘엄마!’
그러고는 내가 떼어내기 힘든 머리카락 속으로 숨어들어 가서, 내 머리카락을 단단히 붙들었다.
비교적 붙잡기 쉬운 곳에 달라붙은 황금 사신 하나를 잡아서 떼어내자, 다시 붙여달라는 것처럼 손발을 허우적거렸다.
‘앙대!’
마치 애완 티라노가 죽은 것만큼이나 절실해 보였다.
너무 필사적으로 보여서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자, 행복한 표정으로 내 머리카락 속에 자리 잡았다.
얼음 궁전 복원을 시작하면서 황금 사신이 너무 달라붙기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면 달라붙는 아이들만 궁전 복원을 맡은 걸까?
예린이처럼 황금 사신들의 생김새와 성격을 구분할 수가 없으니, 이럴 땐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나는 머리카락 속의 황금 사신들을 내버려 둔 채, 고민을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순서를 잘 정해야 했다.
해야 할 일 1번.
뀨히히 아귀 굽기.
해야 할 일 2번.
주황 사신 굽기.
해야 할 일 3번.
자유 도시 연합 가기.
안타깝게도 얼음 궁전이 완성되어 가자, 하얀 아귀와 주황 사신은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황금 사신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것처럼 고개를 도리도리했다.
도망간 녀석들을 쫓는 데는 도움이 안 되었지만, ‘자유 도시 연합’은 잘 아는 곳인지 금세 대답이 돌아왔다.
‘인간 없어!’
‘해로운 오브젝트 많아!’
‘오브젝트 가득!’
어디로 가야 재밌을지 생각하던 도중, 엄청나게 커다란 쇳덩어리를 뚜방뚜방 옮기는 검은 사신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삐-.
삐-.
마치 아기들의 신발에서 나는 삑삑 소리처럼,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주위에 경고하는 검은 사신들이었다.
그리고 검은 사신들은 나를 발견하자, 쇳덩어리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검은 사신들이 대답을 시작했다.
‘제임스!’
‘메카 티라노!’
그리고 검은 사신은 나를 향해 얇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마치 장난감 조립 설명서처럼 그림만으로 표현된 설명서였다.
‘!’
내용을 살펴보자, 그것은 메카 티라노 조립 설명서였다.
‘드디어!’
연금술사와 제임스가 의기투합한 것을 보고, 나는 황금 사신들에게 한 시간에 한 장씩 제임스의 정수리에 메카 티라노 그림을 가져다 두라고 했었다.
나의 메카 티라노를 위한 완벽한 계책이었다.
그리고 나의 뛰어난 계책이 드디어 그 결실을 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순수 메카 티라노가 아니라, 야광 공룡이 입는 메카 티라노 슈트였다.
싸움을 붙여보지는 못하겠네….
그래도 내 심장은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것처럼 기대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메카 티라노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수많은 기능이 내장되어 있었으니까!
히히.
완성하는 대로 메카 티라노로 성능 테스트 겸 자유 도시 연합으로 날아가야겠어.
***
당장 칼날이 목을 관통하려는 순간, 청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콘크리트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
그 덕분에 날카로운 칼날은 목표를 빗나가 청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청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적이 있었던 방향으로 총을 쏘았다.
탕. 탕.
하지만 발포음만 울려 퍼질 뿐, 총알이 맞은 흔적이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청은 다른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동료들에게 습격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휴대전화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전파 방해인가? 굉장히 본격적인 습격이야. 도대체 목적이 뭐지?’
상대방은 분명 전문적인 킬러였다.
청은 이대로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저 버티는 동안, 이상한 점을 눈치챈 동료들이 서둘러 구하러 오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파인 구덩이 속에 계속 있으면 수류탄 등에 죽을 뿐이니, 청은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구덩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그러나 구덩이 밖의 광경은 청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가로등 위에 조그마한 발을 딛고 서서, 하늘을 향해 손을 내민 털 뭉치 주황 사신.
그 손짓에 따라 하늘이 격렬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썬더!’
주황 사신은 장작을 조금씩 태워 가며, 주위의 확률을 조작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벼락이 떨어져 내렸고, 건물에서는 콘크리트 조각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오염 물질들이 소용돌이치며 적들의 정화 필터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주황 사신에 의해 확률이 조작된 오염 물질은 정화 필터를 그냥 통과해 버렸다.
그렇게 적들은 벼락에 맞아 쓰러지고, 떨어진 철근에 꿰뚫리며, 독성 물질을 흡입하고 죽어버렸다.
청은 어느새 머리 위로 돌아온 주황 사신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끝난 거야?”
그러자, 주황 사신은 그 말이 맞는다는 것처럼 둠칫거렸다.
청은 구덩이 밖으로 천천히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은 검은색 복장으로 무장한 괴한들의 시신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던 장비는 청이 용병 생활을 하면서도 거의 보지 못했던 최첨단 장비였다.
게다가 자기 몸을 살 한 점 남기지 않고 전부 오브젝트로 개조해 버려서, 죽음과 함께 시체는 거의 흔적만 남은 상태였다.
아쉽게도 흔적만 남은 시체에서는 습격자의 정체 같은 것은 알아낼 수 없었다.
‘PIG 아저씨는 괜찮을까?’
청은 자신을 구해준 주황 사신을 쓰다듬으며 PIG 아저씨가 걱정되어 공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공장에 도착한 청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공장 내부는 흐릿한 핏자국과 함께 PIG 아저씨의 달팽이 의체와 똑같이 생긴 의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청은 충격과 혼란스러움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청은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을 억눌러가며, 흐릿하게 이어진 핏자국을 따라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