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5
장남의 만류를 무시한 채 앞으로 발을 내딛었더니 녀석의 자신의 나무 봉 끝에 기운을 덧씌웠다.
“멈추지 않는다면 제압하겠다!”
선명한 적의를 담은 위협이었지만 난 눈앞에 넘실거리는 오러를 보고서도 웃음을 흘렸다.
왜냐하면 내 눈엔 저 오러가. 아니 오러의 흉내를 내는 것의 정체가 보였으니까.
겉에 자기 마력을 덧씌워서 그럴 듯하게 만들었을 뿐 정작 저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악신의 마력.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 이 던전부터가 악신이 만들어 낸 곳인데 보스가 그 영향을 받지 않을 리 없잖아?
특히 이 던전의 쐐기가 된 찌질 공자께선 막 아카데미의 입학했을 무렵의 내게도 처 발릴 만큼 허접하시니 악신의 영향도 많이 받았겠지.
“뭐야?♡ 그걸로 안마라도 해 주려고?♡ 와~ 정말 위협적이네~♡ 나 안마 아파서 싫어하는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의 너머로 바람을 가르고 봉이 날아드는 소리가 들린다.
도발에 너무 쉽게 넘어오는 거 아냐?
이렇게 다혈질이어서야 신사가 되기는 글렀네.
거기에다 궤도도 너무 뻔하잖아.
이 정도면 막아달라고 부탁하는 수준인 걸.
보란 듯 웃음을 지으며 방패로 공격을 막아낸 순간 팔을 타고서 찌릿한 통증이 차올랐다.
패링을 했음에도 이 정도인가.
버로우 공작을 상대하며 생겨난 부상의 흔적도 흔적이지만 장남이 지닌 힘 자체가 상당하네.
전투가 장기전으로 이어지면 방어 채로 박살이 나겠는 걸.
“다시 한 번 말하지. 물러서라.”
“동생 앞이라고 멋있는 척 하는 거야?♡ 사실은 겁먹어서 도망치고 싶은 거면서 허세부리긴~♡ 쫄보 주제에♡”
그러니까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간단해.
이 싸움을 장기전이 아닌 단기전으로 만들어내는 것.
내가 지쳐 쓰러지기 전에 상대를 박살내는 것.
며칠 전 해골을 상대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대치되는 행동양식이지만 이번에 한해선 괜찮을 거야.
난 이미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 지를 파악하고 있으니까.
“물러서지 않겠다면. 제압하는 수밖에!”
“해 봐♡ 할 수 있다면♡”
자신만만하게 목소리를 내며 상대의 움직임을 살핀다.
내가 이 보스룸의 풍경을 보자마자 떠올린 추측이 맞는 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어진 장남의 봉을 막아낸 순간 확신했다.
추측한 대로 장남이 버로우 가문의 창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거면 쉽지.
그도 그럴 게 버로우 가문의 창술은 날 상대로 상성이 안 좋으니까.
버로우 가문의 창술은 안 맞고 잘 때리면 누구라도 이길 수 있다! 란 이념을 무술로 만들어낸 듯한 물건이다.
창이 지닌 긴 간격을 이용해 상대에게 피해를 누적시키고. 서서히 격차를 벌려나가는 것으로 적을 말려 죽이지.
공작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 창술은 분명 훌륭한 무술이다.
당장 할배조차도 이 창술을 구경하며 기틀이 좋다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렇지만 여기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상대를 말려 죽인다는 것은 결국 자기가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야.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다면 말라 죽는 건 적이 아닌 자신이 되어버리지.
“안마 해주는 거 아니었어?♡ 왜 봉으로 허공만 때리는 거야?♡ 거기에 투명인간이라도 있는 건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마구잡이로 봉을 휘두르는 장남처럼.
“투명인간 씨~♡ 안마는 훌륭한가요?♡ 힘이 부족해서 아쉽다고요?♡ 그치만 어쩌겠어요~♡ 봉을 휘두르는 게 개허접 약골인데~♡”
난 말야. 아카데미의 대련 수업에서 자칼이 휘두르는 버로우 창술을 지겹도록 구경했어.
녀석이 다른 사람과 대련하는 걸 지켜보면서 저기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구상해뒀다고.
찌질하고 겁 많은 자칼 공자께서 만날 도망치는 바람에 실증을 하진 못했지만 아무래도 내 전략은 옳았던 모양이야.
봐.
온전한 몸 상태에. 체력도 완전하고. 나보다 신체 스펙도 좋은 버로우 장남께서 아무것도 못 하고 휘둘리기만 하잖아.
뭐어. 이걸 마냥 장남의 잘못이라고 하긴 그렇지.
그는 분명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창술이 추구하는 바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니까.
다만 메스가키 스킬의 앞에서 그 모든 노력이 무력해졌을 뿐.
어쩌겠어. 메스가키 스킬이 밸런스 붕괴급 개사기 스킬인 것을.
이 던전을 만들어낸 타리키도 도발 몇 번 당하면 부들부들 거리면서 저 메스가키가!를 외칠 걸?
“여자애한테 놀림 당하는 걸 동생한테 보여주는 기분은 어때?♡ 부끄러워?♡ 치욕스러워?♡ 화가 나?♡”
도발이 이어짐에 따라 장남의 몸놀림이 점차 지리멸렬해져 간다.
창술의 기본을 지키기보단 어떻게든 내 앞에 있는 메스가키를 참교육 시키겠단 의지가 느껴지는 움직임.
덕분에 난 손쉽게 장남이 지닌 여러 약점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무기를 휘두르기기에 사이사이의 틈새가 커.
걸음걸이를 신경 쓰지 않아서 중심이 안정적이지 못 해.
가끔 거리조절을 잊어버린 채 앞으로 발을 내딛어.
“지금쯤이면 네 멍청한 동생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 형 사실 완전 한심한 개허접이었구나♡ 하고 말야♡”
방패의 너머에서 이성을 잃고 돌진하는 장남의 모습이 보였다.
저 움직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일부러 방패를 내려 머리를 노출했다.
대놓고 여기를 노리라 이야기하는 함정.
장남이 이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를 의심했겠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감정에 잡아먹힌 뒤다.
의심을 품는 것보다 창을 내지르는 것이 빠르다.
머리를 비트는 것으로 기다렸다는 듯 창을 회피.
그러면서 방패로 몸을 밀쳐서 넘어트린 후.
메이스로 얼굴을 찍어 마무리를.
지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메이스가 바닥에 꽂히기 전에 장남의 몸이 흩어져 버렸으니까.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든 나의 시야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는 게 들어왔다.
넓다랬던 공작가의 초원에 나무들이 자라나더니 이내 보스룸이 어딘지 모를 숲으로 바뀐다.
“마물!”
나뭇잎을 떨어트릴 듯 커다란 외침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망가진 마차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죽었거나 죽어가는 이들이 있었고.
그 앞을 지키듯 서 있는 사람은 방금 전과 달리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는 장남이었다.
“네 놈의 상대는 나다!”
2페이즈인건가.
발악이 심하네.
방금 전에 발렸으면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라고.
어차피 네가 쓰는 게 버로우 가문의 창술인 이상 또 발릴 텐데 굳이 싸우고 싶어?
아님 나한테 도발을 당하면서 이상한 취향에라도 눈을 뜬 거냐?
<여아야. 방심하지 마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
음습하게 약점을 파고드는 게 타리키잖아요. 방심 안 해요.
제가 괜히 방금 전에 싸우면서 신성을 아낀 게 아니라고요.
할배에게 대꾸하며 방패를 치켜 든 그 순간.
갑자기 철벽이 내게 위험을 고했다.
장남과의 거리가 저만치 벌어져 있음에도.
그리고 주변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에도.
난 철벽의 목소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 주었던 스킬이기에 무작정 그 목소리를 따라 방패를 움직였다.
그리고 내 방패가 철벽이 말한 위치에 도달하기 무섭게.
방패가 뒤로 밀려나더니.
팔의 뼈를 타고서 고통이 전해졌고.
그 고통에서 빠져 나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 몸이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아.
이거 좆 됐네.
잠시 검은색으로 물들었던 정신이 다시금 색을 되찾았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고통이었다.
전신에 아프지 않는 곳이 없어서 어디가 아픈 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고통.
그 다음은 던전을 공략하면서 지겹도록 느꼈던 혈액의 향취였고.
그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누군가가 날 붙잡는 듯한 촉감이었다.
이쯤 되니 다음에 찾아올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에 난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내 앞에 기사의 시체가 보였고. 시녀의 시체가 보였으며. 시종의 시체가 보였고. 그리고 또 누군가의.
“커흡!”
…
오감이 정상이 아니기에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귀에서 이명이 울리는데다가 얼굴의 통증이 심대한 것으로 보아 얼굴을 걷어차인 게 아닐까 추측할 뿐.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려했지만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힘을 줄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네.
어떻게든 일어나보려 발버둥을 쳐봐도 내 몸은 계속해서 시체의 위에 처박히기만 했다.
뼈가 부러진 건가.
이야. 이거 진짜 제대로 좆 됐…
“큽!”
무엇인가가 내 옆구리를 툭 하고 걷어찼다.
내 몸을 옆으로 돌리기 위한 의도인 듯 충격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엉망인 몸엔 그것마저도 충분한 고통이었으니.
등 뼈를 타고서 스멀스멀 공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직은 공포 극복이라는 댐을 넘을 정돈 아니었지만.
이대로 갔을 때 결말이 어떨지는 분명했다.
“끄으아아아악!”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하던 그 때 누군가 내 관자를 즈려 밟았다.
신발의 뒤꿈치로. 정성스레 고통스러울 수 있도록.
“이겼다고 생각했나?”
비명의 사이로 나크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까짓 던전 별 것 아니라 생각했나?”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듯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그럼 의심했어야지. 왜 이렇게 순조로울까. 하고 말야.”
공략이 간단하게 의도였다고?
그게 무슨.
아. 아아아.
앞에 적을 늘어놨던 건 내 정신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었구나.
정신을 건드리는 척 하면서 내가 어떻게 던전을 공략하는 지 지켜 본 거야.
그리고 알아차렸겠지.
내가 청각을 이용한다는 걸 말야.
던전을 공략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저 쪽에서 나란 인간을 공략하는 중이었구나.
그래. 그랬지.
이 녀석들은 게임 속의 적이 아니야.
스스로가 생각하고 사고하고 판단하는 녀석들이라고.
당연히 저 쪽에서도 어떻게 하면 날 공략할 수 있을지 고민하겠지.
하하. 멍청했네. 멍청했어.
“뭐. 이런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고. 이제부턴 네 년을 어떻게 괴롭혀 줄지를 생각해야 하니까.”
뭐. 그래도 돌파구가 없지는 않아.
아직 넘실거리는 공포는 댐을 넘지 못했으니까.
“일단 물어보겠다만. 산 채로 회가 뜨이다 죽기 직전에 재생당하는 것과. 알몸으로 마물의 한 가운데에 던져지는 것 중에 뭐가 좋지?”
“…허세 멀대 …너랑 노는 건 없어?♡”
“하. 그딴 식으로 생명을 구걸…”
“넌… 실좆이잖아♡… 너한테는… 강간 당해도 처녀는 지켜질 것 같단 말야♡…”
아파.
아파.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어딘가에 처박히면서 가라앉았던 의식이 부상했다.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아파.
누가 도와줘.
하. 새끼. 강하게도 걷어 찼네.
파파.
마마.
누구.
누군가.
뭐. 그래도 당초의 목표는 이뤘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방금 전의 충격으로 신성이 차올랐으니까.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제발.
아르마디님.
제가 어지간하면 당신께 부탁을 드리지 않는데. 이번에는 진짜 목숨이 위험한 위기거든요?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수많은 신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위대한 이이시여. 이 부족한 사도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소서.’
아르마디의 자비를 사용하기 위해 기도를 올린 순간 내 심장에 신성이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확신했다.
아직 내겐 한 번의 기회가.
나크라드 저 자식의 얼굴에 메이스를 박아넣을 기회가 남아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