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7
루시와 함께 던전에 들어왔을 때 루엘이 보았던 것은 정지되어 있는 저택의 풍경이었다.
어떤 실력 있는 화가가 그린 그림 같은 모습.
이 던전에는 무엇이 준비되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루엘이 처음으로 위화감을 느낀 것은 그 풍경화 속에 루시가 존재치 않았다는 것이다.
뭐지? 여아가 이 곳에 있는데 어찌하여 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지?
당혹에 빠진 루엘에게 답을 건네준 것은 루시였다.
그녀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며 느껴지지도 않는 적의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나며 이 던전 전체에 도사린 게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다.
오감 교란.
적이 지닌 모든 감각을 앗아가는 타리키의 권능 중 하나.
과거 용사 일행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힘.
루엘은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의 위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주신께서 기적을 일으켜주시지 않았더라면 루엘은. 아니 용사 일행 전원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을 터이니 말이다.
내가 알기로 오감을 앗아가는 권능은 타리키가 지닌 것 중에서도 높은 수준에 자리한 것.
아직 부활하지도 못한 녀석이 그 권능을 이 던전 전체에 펼쳤다고?
심지어 여아가 펼친 기적에 의해 상당한 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그런 짓을 벌이려면 타리키 자신조차도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터인데.
루시의 말이 입증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시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무렵. 풍경화의 일부가 녹아내리며 루엘의 감각이 돌아온 것이다.
전투로 인해 엉망이 된 저택의 풍경.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루시.
그리고.
바닥에 깔린 두 구의 시체.
그를 본 순간 루엘은 확신했다.
어둠의 악신이 루시를 위협으로 여기고 있단 사실을.
봉인되고서 수백 년 동안 모은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아 부어서라도 루시를 무너트리고자 한다는 것을.
그를 위해 악신이 택한 방식은 최악이었다.
육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상태에서. 정신을 갉아먹는 것으로 상대를 더 궁지로 몰아 붙여.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다니.
안 된다.
이것은 지금의 여아에게는 이르다.
아직 여아는 한 사람의 사도로써 완성되지 못했단 말이다.
사람의 죽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스스로의 목숨을 내거는 아이가 이를 어찌 견딘단 말인가.
거짓된 죽음조차도 버티지 못하는 유약한 아이가 어찌 이를. 이를 견디겠느냐.
바닥을 짚은 채 속을 게워내던 루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몸을 일으키더니 짐짓 강한 체를 해보였다.
걱정하지 말라고.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리 이야기를 하며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녀였지만 루엘은 꾸며낸 당당함 속의 진실을 봤다.
아래를 내려다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 눈을 말이다.
그녀의 증세는 던전을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점차 심각해졌다.
메이스를 붙잡은 손이 떨렸다.
속으로 자꾸만 중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앞으로 나아가길 두려워했다.
언제나 당당함을 잃지 않던 루시가 무너져가는 모습에 루엘은 속이 찢어져가는 듯한 심정을 느꼈다.
그를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루시가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단 것이다.
주저앉고 싶을 터인데. 앞으로 나아가는 게 무서울 터인데.
울음을 터트리고 싶을 터인데.
그녀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것처럼.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력감 속에서 루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도를 하는 것 뿐이었다.
부디 여아가 온전히 이 던전을 빠져나갈 수 있기를.
당신의 뜻을 이루려는 아이에게 축복을 전해 주시기를.
부디.
부디.
부디.
…
<여아야?>
무어냐. 어찌된 것이냐. 왜 그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가.
<장난치지 말거라.>
그대의 방어술은 대륙에 이름을 떨칠 정도로 뛰어나다.
그런 그대가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실패할 리 없지 않은가.
그대처럼 뛰어난 무인이 무기를 손에서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제발. 여아야.>
괜찮을 것이야.
설령 방어에 실패했더라도. 위기에 처했더라도 괜찮을 게 분명해.
그대는 위대하신 주신의 사도이지 않은가.
그 분께서 항상 그대를 지켜보고 계실 터이니 기적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
우리가 보살핌을 받았던 것처럼 그대도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것이야!
<루시. 부탁이니 대답을 해다오.>
분명.
분명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한단 말이다.
<루시이이이!>
루엘이 죽어라고 루시의 이름을 부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리를 내질렀다.
영광을 잃어버리고.
육신을 잃어버리고.
비루한 혼만이 남아 무기에 깃들어 있을 뿐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었기에.
…무력하구나.
너무도 무력해.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저 멀리에서 따스한 신성이 느껴졌다.
아무리 두터운 어둠 속에서라도 찾아낼 수 있을 빛이.
저것은 분명.
‘할아버지.’
루시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루엘은 자기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릴 뻔 했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그대가 살아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야.
루엘은 자꾸만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상황을 물었다.
루시가 대답해 준 상황은 최악이었다.
유일하게 믿을 구석이었던 청각마저도 무의미해졌다는 것이지 않나.
루엘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다급히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서.
허나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과거 죽음의 위기를 수도 없이 넘겼던 루엘조차도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헌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위기를 자신의 몸으로 마주해야하는 루시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던전을 공략하며 당당함을 가장하던 때와는 다른.
스스로 확신하기에 낼 수 있는 자신 넘치는 목소리.
루엘은 그녀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가 저런 목소리를 낼 때엔 언제나 상식에서 벗어나는 무언가를 보였기에 입을 다물었다. 루시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루시가 다시 전투를 시작했을 무렵에도 루엘의 시야에 비치는 건 풍경화 뿐이었다.
적막한 주변에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지.
다만 그를 붙잡은 손의 너머에서 따스한 신성이 느껴졌기에 루시를 믿고서 기다렸다.
그녀의 뒤를 주신께서 보우하심을 믿고 견뎠다.
그러던 어느 순간. 루엘의 시야를 가득 채우던 풍경화 중 일부가 흘러내렸다.
그 너머에서 보인 것은 루시의 발걸음이었다.
한 시도 걸음이 쉬지 않는 것을 보면 루시가 무언가에 성공한 모양이구나.
오? 이번에 또 다시 풍경이 사라졌군.
이것은 루시의 다리 부근인가.
방금 전보다 더 넓은 풍경을 보게 된 루엘은 머잖아 경악을 느꼈다.
루시가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들리는 것조차 없을 터인데. 그녀의 발은 시종 경쾌하게 움직이며 상대의 모든 공격을 무위로 돌려놨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지?
말이 안 되지 않나.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공격을 모두 다 회피하다니!
이런 것은 전성기의 본인도. 아니 그 괴물 같았던 용사 녀석도 불가능한 일이다!
단순히 직감이 좋단 수준이 아냐.
예언.
그래.
예언이다.
미래에 펼쳐질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런 일은 결코.
루엘이 경악 속에서 생각을 거듭하던 그 때에 또 다시 주변의 풍경이 흘러내린다.
“넌 대체 뭐냐! 무엇이냔 말이다! ”
이번에 드러난 것은 엉망이 되어 있는 적의 얼굴이었다.
코뼈가 비틀어졌고.
턱이 박살 났으며.
한 쪽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워 하는.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물들어 있는 그 추한 얼굴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자신의 앞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푸하핳♡”
루엘이 그를 마주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풍경이 흘러내린다.
“뭐긴♡”
피로 물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선명한 붉은 색 눈동자.
“보면 알잖아?♡”
입가에 지어진 짐승처럼 사나운 웃음.
“이 귀엽고 착한 여자아이는 말야♡”
하하. 그래. 이래야지.
“네 멍청한 머리를 깨부숴서 네 연인이 있는 천국으로 데려다 줄 천사라고!♡”
그대는. 루시 그대는. 이런 얼굴을 짓는 것이 제일 잘 어울린다.
퍼억!
깔끔하게 내리쳐진 메이스가 나크라드의 얼굴에 처박힘에 따라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아♡ 맞다♡ 넌 지옥에 처박힐 테니까 평생 연인과 만날 일은 없겠네♡ 네 연인인 추녀한테도 이 편이 나을 거야♡ 자길 버렸던 쓰레기가 변태 스토커마냥 따라 붙으면 징그러우니까♡”
*
초원에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옴에 따라 초록의 풀들이 흩날린다.
징그러운 것들만 보고 느끼다가 이런 풍경을 다시 보게 되니 기분이 좋네.
눈 앞에서 바닥을 기면서 도망치려는 저 쓰레기 자식만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도주하는 녀석의 뒤를 따라가 뒤통수를 짓밟았다.
그러자 나크라드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처럼 자그마한 여자애가 짓밟아봐야 뭐 얼마나 아프겠어?
다 엄살이지 엄살.
“죽…여버릴 테다. 반드시 네 년을…”
“크흡♡ 와아~♡ 너무 무섭다~♡ 바들바들 떨면서 이야기하지만 않았어도 좀 덜 추했을 텐데~♡”
“결코… 편하게 죽여주지 않을 거란 말이다…”
나크라드는 내 발 밑에서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내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손 위에 타리키의 기운이 엮이며 무언가를 형성하려 했다.
<여아야! 저건 이전에 보았던 마법과 같다! 도주하려는 것이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왜 가만 있는 것이냐! 어서 막아야!…>
‘막고 있어요.’
허나 타리키의 기운은 중간에 흩어져 버릴 뿐이었다.
‘그쵸?’
<…허. 그대에겐 다 생각이 있었구나.>
‘그럼요. 제가 누구인데요.
당황한 나크라드가 몇 번이고 다시 시도를 해 보지만 이번에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타리키의 마력은 모여들 뿐 제 형체를 갖추지 못했다.
안키르가 타리키의 마력이 모여드는 곳을 비추고 있었기에.
“뭐 해?♡ 연인을 버렸을 때처럼 추하고 더럽게 도망치려는 거 아니었어?♡”
“…대체. 무엇을.”
내 신성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지라 안키르의 도움을 받더라도 막대한 기운을 쫓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방금 전 눈이 돌아가서 있는 힘 없는 힘을 모두 쏟아 붇고 탈진해버린 나크라드의 마법을 흩어버리는 건.
충분히 가능해.
“이제는 도망치는 것도 못 하는 거야?♡ 유일하게 잘하는 것마저 잃어버리다니♡ 불쌍해라~♡”
복수를 다짐하던 나크라드의 얼굴이 점차 공포로 물들어 간다.
다른 사람을 괴롭힐 땐 즐거웠지?
그런데 이걸 어째.
이제 괴롭힘을 당할 처지가 되어 버렸네?
“ㄱ…그래. 네 년은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던 나크라드가 획기적인 걸 떠올렸다는 듯 목소리를 드높인다.
“역시 변태 멀대네♡ 나에 대해서 어쩜 그리 잘 아는 거야?♡ 역겨워♡ 토할 것 같아♡”
“하하! 그래! 유약한 네 년은 결코!”
“그러니까 죽이지만 않으려고♡”
“…뭐?”
잃어버렸던 오감이 돌아옴에 따라 내가 지니고 있던 여러 능력 또한 정상으로 돌아왔다.
해골에게서 받았던 약점파악이라는 능력 또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
으음. 그러니까 여기랑 여기를 괴롭히면 이 쓰레기가 아주~ 아주~ 기뻐해 준다는 거구나?
재밌겠다~♡
“자아♡”
“안 돼. 안 돼. 그만 둬.”
“즐거운 놀이시간이야♡ 좆밥 멀대♡”
이 장난감은 얼마나 튼튼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