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
그 후로 확인을 해보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할배가 내 모든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할배에게 말을 걸려 할 때에만 그에게 내 목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난 입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할배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마터면 루시 아가씨 괴담에 메이스에 말을 건다는 내용이 추가될 뻔 했네.
<축복의 영향이라는 게냐?>
‘네.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면 그런 어투가 되더라고요.’
<그것 참 괴이한 축복이구나.>‘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 메스가키 스킬을 집어넣은 게 나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이딴 스킬을 직접 선택했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뻔했으니까.
그치만 몰랐다고!
빙의할 줄 몰랐단 말이야!
내가 빙의할 줄 알았으면 메스가키 스킬 같은 걸 집어넣었겠냐.
온갖 사기 스킬이랑 사기 스킬은 다 때려 박고 거기에 치트까지 써놨겠지!
나는 인생을 날로 먹고 싶은 사람이라고.
<내 신의 아래에서 귀의한 지 오래이나 여전히 신의 뜻을 알기가 어렵구나.>
그래도 잘 됐다.
이제는 내 고생을 알아 줄 사람이 하나 생겼으니까.
그 대상이 치졸하고 성격 더러운 할배라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메스가키 스킬의 왜곡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단 게 어디냐.
근데 있잖아.
대화 상대가 생긴 건 생긴 거고 복수는 복수지.
나는 대화를 위해 잠시 내려두었던 메이스를 다시 집어 들었다.
<여아야? 무얼 하려는 겐가?>
‘복수를 하는 중입니다. 할아버지.’
<우리의 오해는 다 풀린 것이 아니었느냐?!>
‘오해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제가 아는 건 할아버지가 절 괴롭혔단 사실 뿐입니다.’
<내 사과하마! 내가 워낙에 예전 사람인지라 생각 없이 행동을 했다! 미안하다! 진심을 담아 고갤 숙일테니.>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다고 멈출 생각이 없거든요.’
할배. 메이스에 들어있는 당신한테는 과연 오감이 남아 있을까?
촉각이라던가 후각이라던가 하는 거 말이야.
나 지금 그게 너무 궁금하거든?
그래서 한 번 호기심 천국을 해봐야겠어.
메이스의 머리를 짬통에 박으면 할배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올까.
<여아야! 우리가 함께 보낼 세월이 가볍지 아니할 터인데 초장부터 이리 사이가 틀어져서야 되겠느냐?!>
‘할아버지 말은 똑바로 해야죠. 처음에 우릴 어긋나게 만든 건 할아버지잖아요?’
한 때 영웅이라 불리며 대륙을 호령했던 성기사께서 왜 이리 나불대는 게 많은지 모르겠네.
후달리시나봐요?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다시 영지로 돌아온 나는 던전으로 떠나기 전과 비슷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던전 안에서 10레벨을 달성했으니 그만큼 능력치의 상승제한이 높아지지 않았는가.
최소한 아카데미 시험을 볼 때까지는 능력치들을 꽉 채울 생각이었기에 난 한치의 쉼도 없이 단련을 계속했다.
철벽이 스킬이 고하는 대로 칼이 내지른 검을 튕겨낸 나는 숨을 멈추며 메이스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여태까지는 실력차이 때문에 방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 칼은 틈을 드러냈다.
드디어 한 방을 먹일 수 있어!
<아직 아니다. 일부러 틈을 내어준 것이야. 한 걸음 뒤로 물러나라.>
바로 공세를 이어나갈 생각이었지만 할배의 조언을 듣고서 되래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칼이 눈썹을 약간 치뜨며 재차 검을 움직였다.
할배의 말대로였다.
내가 빈틈이라 생각했던 건 빈틈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을 뿐.
평소에는 잔소리가 많은 꼰대 할배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잔뼈가 굵은 영웅답다니까.
항상 이렇게 멋진 모습만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
요 며칠 간 할배와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사람은 사고방식이 자신이 죽은 그 때에 멈춰버린 인간이었다.
영웅이었던 그가 활동했던 시기가 대략 삼백년 전쯤의 이야기이니 그 시절에 머물러있는 이 할배가 얼마나 꼰대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성기사이자 귀족인 이 할배는 세상 모든 일에 트집을 잡았다.
내가 뭐만하면 여아가 그래서는 안 된다느니.
걸음부터가 기품이 없다느니.
식사의 예절을 준수해야 한다느니 뭐니.
처음에는 참고 들어줬지만 이런 일이 이삼일 반복되다보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짬통에 들어가고 싶냐 그랬더니 이전보다 좀 얌전해지기는 했다.
허나 이 할배가 귀찮은 인간이라는 것은 똑같았다.
꾸준히 내 행동에 한 마디를 더하는 것이 얼마나 거슬리는지.
마음 같아서는 할배의 혼이 담긴 이 메이스를 가져다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러기에는 할배가 해주는 조언이 너무도 유용했으니까.
메이스를 다루는 전투법에 관해선 역사상 제일이라 해도 좋을 할배의 조언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는 혼자서 미래를 보고 오기라도 한 것 마냥 몇 수 앞을 들여다보며 내가 어찌 움직여야 할지를 이야기해주었다.
그 조언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레 이게 최선이었음을 알게 됐지.
할배가 도움이 되는 부분은 단순히 전투에 있어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메이스의 숙련도를 쌓는 부분에 있어서도 도움이 됐다.
어떻게 하면 메이스를 더 잘 휘두를 수 있을지에 대한 할배의 조언은 내 둔기 숙련도가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있는 방식이었다.
내가 할배가 말하는 것에 따라 메이스를 휘두르니 이전보다 가파른 속도로 메이스 숙련도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전투에도 수련에도 도움이 되는 무기라니!
이 정도로 압도적인 효율을 선물하는 무기를 어찌 포기하겠는가.
설령 할배의 잔소리 때문에 여성탈모가 오는 한이 있어도 효율을 위해서는 참고 견뎌야 했다.
썩은물이라면 때로는 참고 견딜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아가씨!”
한창 칼과의 대련에 열을 올리고 있던 중 저 멀리서 시녀가 부르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말씀하신 시간입니다!”
‘벌써요?’
“벌써?”
이제 슬슬 몸에 열이 오르고 있는데 끝을 내야 한다고?
지금부터 두 시간 정도는 더 움직이면서 땀을 빼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내가 방패를 든 손을 내리자 칼도 자신의 검을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오늘은 일찍 끝마치시는군요?”
‘갈 데가…’
“바깥에 나갈 생각이야. 너도 준비해.”
땀 좀 씻어내고 옷도 갈아입어야지.
지금 같은 꾀죄죄한 모습으로 바깥에 나갈 수는 없잖아?
나는 그래도 괜찮지만 베네딕이 발작을 하니까.
신경을 쓰긴 해야지.
*
“아가씨.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이 허접 기사가 또 지랄이네. 예쁘다는 말 하지 말라 안하든?
내가 미간을 찌푸리기 무섭게 작게 만들어 주머니에 넣어 둔 메이스에서 할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사의 말이 옳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명화 속의 미인이 따로 없구나.>
‘할아버지. 닥쳐요.’
<왜 나한테만 그러는 게냐!>
예쁘다는 말을 듣고 기뻐할 남자 새끼가 어디 있겠습니까.
할배. 내가 지금 어쩔 수 없이 여성스러운 옷을 차려 입고 있긴 하지만 내가 바라서 입은 건 아니거든요?
근데 옆에서 주접을 떨면 화가 나요? 안나요?
<그럼 네 기사한테도 화를 내야 하는 것 아니더냐?!>
‘쟤는 포기했어요.’
예전에도 자꾸 헛소리를 하길래 몇 번 혼을 내줬는데도 불구하고 포기하질 않아서.
자신이 생각하는 기사의 모습엔 저런 느끼하고 더러운 말을 하는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나 뭐라나.
말을 해도 들어먹지를 않는 정신병자를 설득한 자신이 없었던 나는 그냥 칼이 하는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처음에만 저러고 나중에는 호위에 집중하느라 입을 다무니까.
<하. 포기했다니. 사실 너도 아름답다는 말을 즐기고 있는 것 아니더..>
‘할아버지. 또 짬통에 담가 드려요?’
<닥치고 있으마.>
이 할배가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머리가 훼까닥 돌아버린 것도 아니고 내가 바라서 치마를 입겠는가.
이는 어디까지나 베네딕의 지시다.
어지간한 일은 모두 다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베네딕이지만 복장에 관한 문제에 한해서는 타협이 없었다.
‘저택에선 어떤 옷을 입어도 좋다만 바깥에서는 부디 영애답게 입고 다녀주면 좋겠구나.’
이 부탁을 들어주기 싫었던 나는 땡깡도 부리고,
베네딕에게 밉다고도 해보고,
애교도 부리고,
정말로 오만 일을 다 해보았지만 베네딕은 답잖게 완고했다.
어쩌겠는가.
결국 나는 베네딕의 배려를 받는 몸이다.
베네딕이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저택 바깥으로 나올 때면 판타지에서 흔히 볼 법한 귀족 영애의 복장을 입어야만 했다.
어차피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그 곳의 교복을 입어야 할 테니 미리 적응을 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다만 내가 입는 건 본래 루시가 가지고 있던 옷은 아니다.
그녀가 소유하고 있던 옷들은 하나 같이 너무 화려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것들밖에 없었으니까.
아무리 영애다운 옷을 입어야 한다지만 프릴이 프릴프릴한 옷은 입을 자신이 없었던 나는 베네딕에게 부탁해 새로운 옷을 맞췄다.
새 옷이라고는 해도 결국엔 하늘거리는 치마인지라 입을 때 치욕스럽단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아직 이 치마라는 것에 익숙해 지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내게 어울리는 복장이다만 입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안정감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바지의 딱 달라붙는 듯한 그 감촉이 없으니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언젠가 익숙해 질 것을 알지만…
솔직히 그 날이 오는 게 두렵다.
<그런데 말이다. 여아야.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
‘교회요.’
<교회?>
‘네. 주신 교회.’
당신이 성인으로 등재되어 있는 그 곳을 말하는 겁니다. 할배.
아그라의 저주를 해주했다고 보고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저주를 해주하면서 아그라의 눈총이라는 패널티를 안게 되었는데 챙길 건 챙겨야죠.
아그라의 저주를 해주했음을 주신 교회에 인정받고 주신 교회의 상징 중 하나를 손에 쥘 수 있다면 내 평판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아마도.
나를 외톨이로 살고 싶지 않다!
기왕에 소울 아카데미의 세상에 들어온 김에 내가 좋아했던 여러 캐릭터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그 길이 멀고도 험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어!
이건 지금 내 삶의 유일한 원동력이나 마찬가지라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른 가문 영지에 있는 주신 교회의 앞에 도착했다.
알른 가문 자체가 워낙 규모 있는 곳이다보니 이 곳에 있는 교회도 결코 자그마하지 않았다.
입구에 서 있는 두 개의 정교한 동상과 여러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거대한 문.
거기에 더해 유리에 그려진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현실에 있었다면 관광지가 되었을 것이 분명한 교회의 모습에 속으로 감탄을 한 나는 새삼 주신 교회가 거대한 곳임을 느꼈다.
게임에서 봤을 때도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보니까 진짜 어마어마하네.
이 건물을 짓는데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죄송합니다. 아직 예배를 준비하고 있어서요. 잠시 돌아갔다 나중에.”
예배당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입구 근처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신부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른 시간이라며 우리를 돌려보내려던 그는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깜짝 놀라서는 뒷걸음질을 쳤다.
“…루시 백작 영애님?”
뭔데. 반응이 왜 그런건데.
단순히 내 악명을 들어서 저러는 건 아닌 거 같고.
설마 루시가 너한테 뭐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