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린은 세희 연구소 셔틀버스에 타서,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바뀌네.’
한때는 폐허처럼 보였던 송파구의 풍경도 점점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싱크홀 속에 숨어있던 아귀가 사라지고, 제임스 타워가 생기면서 일어나는 변화였다.
새롭게 생겨나는 건물들과 새로 개업한 음식점들.
흐느적거리는 바람 풍선들이 호객하는 모습들이 자주 보였다.
그렇게 유리창을 통해서 풍경을 구경하던 도중,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치는 것을 보며 예린은 작게 웃었다.
황금 사신이 가방의 지퍼를 천천히 열려고 하다가, 더듬이가 지퍼에 껴버린 것이다.
황금 사신은 예린이 고개를 돌려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더듬이를 빼내려고 열심이었다.
양손으로 지퍼를 마구 밀어내며, 고개를 도리도리.
유령화를 쓰면 간단히 빠져나올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황금 사신들은 유령화를 정말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느낌이었다.
미니 사신 전문가를 자처하는 예린이 생각할 때, 유령화를 안 쓰는 이유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미니 사신만의 특별한 신념 같은 것이 아니라, 황금 사신들은 몸에 닿는 촉감을 중시해서 그런 것 같았다.
인간에게 유독 달라붙는 성향만 봐도 그랬다.
온몸으로 찰싹.
인간을 좋아하는 다른 미니 사신과 비교해 봐도 조금 특이한 행동이었다.
피부로 눈처럼 주변을 보는 회색 사신이 옷을 안 입는 거랑 비슷한 걸까?
아, 눈 마주쳤다.
마침내 지퍼에서 더듬이를 빼낸 황금 사신과 예린은 눈이 마주쳐 버렸다.
황금 사신은 ‘헉!’하는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놀랐다.
표정만 봐도 ‘미행이 들켜버렸어!’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따라왔었구나?”
예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황금 사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히히.
장난이 들킨 아이처럼 웃던 황금 사신은 멋쩍은 표정으로 예린이의 손에 달라붙었다.
또각또각.
셔틀버스에서 내린 뒤,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원룸.
예린은 탁자 위에 황금 사신을 내려두고, TV를 틀었다.
[과거 민간인 납치, 사망자 통계 조작, 횡령 등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해체되었던 중앙 연구소의 후신, 협회 연구소에서 조금 전 놀라운 소식을 발표했습니다.]
[인간과 거의 비슷한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명령과 지시를 정확히 수행할 수 있는 오브젝트 인형을 협회 연구소에서 개발했다는 소식입니다.]
[이는 그동안 오브젝트 기술 분야에서 후진국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던 우리나라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미국 오브젝트 협회는 수동적이지 않은 오브젝트를 활용한 기술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반면, 한국 오브젝트 협회는 이번에 개발된 오브젝트 인형에는 충분한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다고 강조하며,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TV에서는 오늘 오브젝트 협회에서 발표한 인형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형? 저런 걸 개발하는 부서가 있었던가?’
나름대로 협회 연구소에 아는 사람이 있는 예린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극비의 프로젝트라면 몰랐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부패하고 무기력한 협회 연구소에서 기밀을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오브젝트 관련 사고는 사신이가 해결해 주겠지.’
왠지 큰 사고가 날 것 같았지만, 예린은 회색 사신에 대한 끝없는 신뢰로 넘겨버렸다.
한편 예린의 집에 놀러 온 황금 사신은 TV에는 관심도 없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예린의 보물 1호를 관찰하고 있었다.
‘엄마?’
프릴이 잔뜩 달린 펑퍼짐한 드레스를 한껏 챙겨 입은 납 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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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양산까지 쓰고 있어서, 도무지 회색 사신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황금 사신이 보기에는 텅텅 비어있는데도, 왠지 엄마의 느낌을 약하게나마 풍기는 신기한 인형이었다.
예린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오늘 해야 할 놀이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회색 사신 인형을 이용한 황금 사신과의 소꿉놀이!
그 소꿉놀이는 황금 사신에게 초월적으로 상냥한 엄마가 나타나는 행복 가득한 놀이였다.
황금 사신은 그렇게 상냥한 엄마 인형과 과자를 먹고, 같이 퍼즐을 하며 놀았다.
하지만 즐거운 일에는 언제나 끝이 있기 마련.
황금 사신은 밤 10시를 넘어가자, 급격히 졸려 하더니.
급기야는 놀다가 쓰러져서, 탁자 위에 콩하고 머리를 박아버렸다.
예린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더니, 황금 사신을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
나는 미니 사신 정원 마시멜로 평원에 앉아서, 손에 헤일로를 들고 살펴보고 있었다.
능력 무효화 헤일로, 완전 회피 헤일로, 환상 구현화 헤일로.
전부 똑같이 생긴 헤일로들.
마치 천사의 고리처럼 빛을 내면서, 하얗고 동그란 고리.
그리고 똑같이 머리 위에 쓰면 온몸이 갈라지고 무너져 내리며 고통스러운 헤일로들.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은 그 고통에 대한 것들이었다.
내가 심장에서 꺼내 쓴 헤일로는 전혀 아프지 않았으니, 무언가 해결 방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첫 번째로 고려할 만한 것은 바로 헤일로의 개수였다.
미궁의 환상 속에서 헤일로를 두 개 썼을 때처럼, 헤일로는 많이 쓰면 쓸수록 그 고통도 심해졌으니까 당연히 할만한 추론이었다.
심장에 기본으로 하나가 있으니, 헤일로를 쓰면 고통이 생긴다는 가설이었다.
이 가설이 진실이라면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심장에서 헤일로를 꺼내서 하늘에 걸어두면 되니까.
문제는 나도 꺼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생각할 만한 가설은 헤일로의 색깔이었다.
죽음을 보는 헤일로는 모양도 조금 달랐지만, 색깔이 익숙한 황금색이었다.
황금색은 바로, 내 심장에서 타오르는 장작의 색깔이었다.
나머지 헤일로들도 장작의 색으로 물들이면 손쉽게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었다.
그래서 나는 헤일로를 꺼내둔 채, 온갖 실험을 하고 있었다.
심장에 넣으려고 해보기도 했고, 고기를 굽듯이 헤일로를 나뭇가지로 널어놓고 장작으로 구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도 색은 변하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색채 우주의 나쁜 녀석들이랑 싸울 때 헤일로가 필요하긴 한데, 때가 되면 알아서 해결되겠지 뭐.
나는 헤일로를 모두 하늘로 돌려보내고, 바닥에 누워버렸다.
그러자 활활 타오르고 있는 지렁이가 눈에 들어왔다.
자유 도시 연합을 다녀와서 생긴 지렁이 모양 젤리 3 형제였다.
나는 그 특색 없는 젤리 3 형제를 잘 접합해서 호객용 바람 인형처럼 만들어버렸다.
몸통에 지렁이 하나, 양팔에 지렁이 각각 하나.
히히.
거기에다가 불을 붙이니, 진짜 호객용 인형처럼 하늘을 향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뀨히히.”
그리고 그 지렁이를 보며, 하얀 아귀들이 잔뜩 모여들어서 웃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얼음 궁전 사태’를 까먹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후후.
하지만 나는 그저 하얀 아귀들을 일망타진할 기회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얀 아귀 숫자가 너무 줄어든 것 같아.
이쯤 되면 진짜 엄청난 숫자의 하얀 아귀가 모여들어야 하는데, 너무 적네.
시선을 돌리자, 들판을 한가로이 뛰어다니는 4족 보행 황금 사신들이 보였다.
황금 사신치고는 너무 유행이 오래가는데?
내 마음속에서 수상한 느낌이 무럭무럭 돋아나기 시작했다.
***
황금 사신은 온 사방이 뒤죽박죽이고 정신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
그런 황금 사신의 뒤편에는, 최근 둥글둥글해진 엄마가 무서운 표정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황금 사신은 잡아먹어야지!’
엄마는 마음만 먹으면 금세 따돌릴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황금 사신의 근처에는 같이 도망치고 있는 황금 사신들이 뛰고 있었다.
엄마처럼 동글동글해진 황금 사신들이었다.
그리고 황금 사신이 자기 몸을 내려다보니, 배가 조금 통통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잡았다!’
옆에서 달리던 황금 사신이 엄마의 손아귀에 잡혀서 끌려가 버렸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엄마가 바로 뒤까지 쫓아와 있었다.
‘!’
그리고 커다란 손이 황금 사신에게 천천히 다가와, 덥석 잡아버렸다.
‘앙대!’
황금 사신은 먹히지 않기 위해서 버둥거렸지만, 결국 커다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
푸르스름한 새벽녘.
황금 사신은 악몽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버렸다.
꾸물꾸물 기어서 예린의 품 밖으로 나온 황금 사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금 사신은 꿈이 뭔지는 잘 몰랐지만, 현실이 아니라는 점에 크게 안심했다.
그래도 조금 불안해서 그런지.
황금 사신은 팔다리 같은 신체를 세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배를 내려다본 황금 사신은 깜짝 놀랐다.
‘살쪘어!’
자기 뱃살을 조물조물하던 황금 사신은 뭉크의 절규처럼 양 뺨에 손을 올렸다.
“사신아. 같이 놀자.”
절망하는 황금 사신에게 갑자기 들려오는 예린의 잠꼬대.
황금 사신이 고개를 돌려보니, 예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양의 장작이 납 인형과 황금 사신에게 끊임없이 흡수되고 있었다.
***
항구에 정박한 커다란 유람선 앞.
사실 구름 고기를 타고 바로 한국으로 날아가도 괜찮았겠지만, 청은 한 번쯤 유람선을 타보기 위해 항구로 날아온 상태였다.
건물처럼 커다란 유람선을 올려다본 청은, 여러 가지가 기대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중국에서만 살았던 그녀는 해외로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들뜨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목적지가 주황 사신의 고향인 한국이라니!
물론 한국은 오브젝트 시대에 조금 위험한 나라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아무리 위험해 봐야 자유 도시 연합 정도는 아니겠지.
캐리어의 바퀴가 갑판 위를 달그락거리며 지나가자, 코끝을 간지럽히는 상쾌한 바닷바람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바다 내음이 가득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그녀는 유람선 난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듣기 편한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가운데, 유람선은 출항 준비로 분주했다.
갈매기들은 마치 배웅이라도 하듯 유람선 주위를 날아다녔고,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는 눈 부신 햇살이 바다 위에 부서지며 일렁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물결과 어우러진 나른한 오후의 정취 속에서 주황 사신이 청의 뺨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주황 사신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가 들려왔다.
“오빠. 이번에 가는 곳이 한국이라고 했던가?”
“음.”
그곳에는 멋들어진 코트를 입은 백인 남성과 굉장히 젊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상당히 닮은 데다가 나이 차이가 좀 있어서 부녀관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
여자의 머리 위에 올라선 보라 사신!
안대를 쓴 보라 사신과 왕관 주황 사신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여자는 굉장히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청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와, 주황 사신인가요?”
여자는 청을 배려해서인지, 간단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그 순간, 유람선의 굵직한 기적 소리와 함께 한국행이 시작되었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며, 유람선이 한국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새하얀 갈매기와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수평선을 배경으로, 청은 어쩐지 이들과의 인연이 생각보다 길게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