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3
내가 여태까지 습득해 온 여러 스킬의 튜토리얼을 수행하면서 느낀 건데.
이 튜토리얼이라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의 일반적인 튜토리얼이랑은 약간 개념이 다른 것 같아.
내가 아는 튜토리얼이라는 건 걸음마를 떼는 법을 알려주는 거야. 수학에서 더하기와 빼기의 개념을 알려주는 느낌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편하려나?
근데 아르마디님께서 선사하신 이 튜토리얼은 이미 어느 정도 기초를 갈고 닦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진행되는 거 너무 많아.
당장 내가 처음 경험했던 방패의 달인 튜토리얼 부터가 그랬어.
이미 어느 정도 방패를 잘 다룬다는 전제 하에 그 기능을 더 잘 쓸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이었지 처음부터 기능을 하나하나 알려주는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다른 튜토리얼들도 비슷했다.
철벽의 튜토리얼 같은 경우에도 이미 철벽이 목소리를 내는것보다 먼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진행이 됐고.
신성 투술 같은 경우에도 신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클리어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으니.
전제조건이 달려 있는 이유도 분명했어.
그 전제조건을 넘어서지 못하면 튜토리얼을 클리어 할 수 없을 게 뻔했거든.
스킬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야지만 클리어할 수 있는 튜토리얼이라니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튜토리얼이라기보다는 심화에 가깝지 않아?
이렇게 말은 하지만 딱히 불만은 없다.
아니 불만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감사하단 생각을 자꾸 하게 될 정도야.
튜토리얼을 수행하면서 배운 것도 여러 가지 존재하고.
튜토리얼을 수행하는 과정 자체도 상당히 즐거웠거든.
특히 신성 투술의 튜토리얼을 진행할 때가 최고였어.
그 튜토리얼은 어떤 젊은 성기사 하나와 싸우는 거였는데 상대의 기술이 워낙에 좋아서 머리 쓰는 재미가 있었지.
특히 좋았던 건 그 녀석이 도발을 당할 때 보여주는 반응이 찰졌다는 거야.
나중에 가서는 이게 메스가키 스킬의 튜토리얼인지 신성 투술의 튜토리얼인지 모르게 될 정도였다니까?
할배가 적당히 하라 그래서 멈추긴 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면 일부러 살려둔 채 가지고 놀지 않았으려나.
뭐어. 어쨌든 그런 식으로 열심히 튜토리얼을 수행하다보니까 어느새 끝이 찾아왔다.
전제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공포 극복이나 영웅의 기백 같은 스킬을 제외한 모든 스킬의 튜토리얼을 끝마친 것이다.
아직 피곤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아. 그러고 보면 메스가키 스킬도 어쨌든 간에 스킬이지 않던가? 그럼 튜토리얼을 할 수 있는 거 아냐?
‘메스가키 스킬의 튜토리얼을 하고 싶어요.’
연습모드에 앉아 있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중얼거려 보았더니 내 앞에 창이 떠올랐다.
[‘메스가키’ 튜토리얼]
[전제조건 1. 기적을 품었던 목걸이의 습득(달성!) 2. ???(미달성)]
이것도 튜토리얼이 있긴 하네. 모드로 생겨난 스킬도 스킬은 스킬이라는 건가.
근데 왜 메스가키 스킬의 전제조건이 목걸이의 습득인 거야?
그게 메스가키 스킬이랑 무슨 관련이 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였지만 그런다고 답이 나오진 않았다. 목걸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아예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것도 당장 튜토리얼을 실행할 순 없는 모양이네.
아아. 진짜 몸이 신성에 적응하려면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야?
이제 할 수 있는 것도 다 했는데 슬슬 깨어날 수 있게 해주면 안 되나?
튜토리얼 과정에서 배운 걸 현실에서 시험해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데.
‘할아버지. 할아버지.’
“무어냐.”
‘몸이 신성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생기길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에요?’
체감 시간으로 따지면 이미 한 나절은 충분히 지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변화가 끝나질 않는 건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변화가 생기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걸까?
“사람마다 다르긴 하다만 어린 녀석은 성장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회춘을 했지. 신체의 전성기에 맞춰서 말이다. 이 격이 오른다는 게…”
‘…성장이요?!’
할배가 한 말은 꽤 길었지만 그 중에서 내 귓가에 꽂힌 단어는 하나 뿐이었다.
성장.
신체의 전성기에 맞춰서 육신이 바뀐다.
그렇다는 건 드디어 이 꼬맹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누구를 만나더라도 위를 올려다봐야 하는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어쩌면 평생 키가 안 자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드디어! 드디어 키가 크는 거구나!
얼마나 클까? 지금 내 키를 생각하면 분명 눈에 확 띄는 변화가 있을 거야.
5센치? 아니면 10센치?
아아. 곤란하네. 10센치가 갑자기 확 커버리면 적응하는 것도 힘들 거 아냐.
시야가 확 달라져서 걷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할지도 몰라.
그리고 또 그만큼 성장하면 팔의 길이라던가 손의 크기도 달라질 테니 메이스를 휘두르는 법도 바꿔야 할 테고.
옷도 다 새로 맞춰야 하겠지.
아.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귀찮은 것밖에 없잖아?
그냥 키 같은 거 안 자라는 편이 더 낫겠네.
후흫. 후흐흐흫.
“여아야. 혹시나 싶어 말하는 거지만 너무 과한 기대는 가지지 말거라. 앞서 말했듯 사람마다 다른 변화가 생겨나니까.”
‘에이. 할아버지. 저도 다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10센치는 기대도 안 해요.
그래도 8센치 정도는.
아니 5센치 정도라도.
진짜 최대한 타협해서 3센치 정도는 자라나지 않겠어요?
“…나중에 어찌 된다 하더라도 본인에게 무어라 하지 않기다?”
‘안 한 대도요. 괜한 걱정 하시긴.’
*
루시가 갑작스럽게 쓰러진 날의 밤. 페이비는 여전히 루시의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여전히 몸 상태는 좋아요. 워낙에 많은 단련을 거듭해 오신 분이라 그런지 신체의 회복이 빨라요.
고갈되었던 신성 또한 빠른 속도로 차오르고 있으니 머잖아 평소와 같은 따스함을 되찾겠죠.
그러니까 몸의 상태만 본다면 언제 깨어나시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건데.
“어째서 깨어나시지 못하는 걸까요.”
페이비가 무심코 중얼거리는 소리를 냈음에도 거기에 대답해 줄 이는 없었다. 이 방에 자리한 것은 페이비와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는 루시 뿐이었으니까.
“예술 교단의 사도님께 들었어요. 지금 영애님께서 겪으시는 현상은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걸.”
예술 교단의 사도. 프레테는 루시가 쓰러지고 나서 몇 시간이 흐른 후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루시를 찾았다.
이 계획을 주도한 것이 그녀이니만큼 루시가 있는 자리에서 설명을 하고 싶다고 말이다.
‘영애께서 쓰러지셨다고요?!’
허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까지도 루시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처음에는 당황하여 눈을 감은 채 편안히 숨을 내쉬는 루시의 모습을 살피던 그였지만 프레테의 당황은 순식간에 안도로 바뀌었다.
‘뭔가 했더니 신성의 격이 오른 것이었습니까.’
‘신성의 격이 오른 것이라고요?’
그 안도에 물음을 던진 것은 요한이었다.
그는 프레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물음을 던졌다.
‘예. 분명합니다. 저도 겪어보았고, 격이 오르는 이를 옆에서 간호한 적도 있거든요. 착각일 리는 없습니다.’
요한이 신성의 격이 오른단 현상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신을 모시는 이들에게서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
신께서 자신의 신도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 신께로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돕는 것.
신을 모시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보는 일을 어찌 모르겠는가.
‘영애께선 주신을 모시는 사람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의문을 품은 이유는 단순했다.
주신 교회의 역사에서 주신을 모시는 사람 중 신성의 격이 오른 사례가 존재치 아니했으니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알른 영애께서 최초의 사례가 되면 되는 것인데.’
‘…그거야 그렇습니다마는.’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일어나실 테니 전 다시 버로우 영지로 돌아가 일을 처리하다 영애께서 깨어나시면 돌아오겠습니다.’
이런 대화가 나누어질 때에 옆에 있었던 페이비는 프레테와 요한의 대화를 모두 다 귀에 담았지만.
“그치만 전 도저히 마음 편하게 있을 수가 없네요.”
그럼에도 그녀는 편히 루시가 깨어나는 걸 기다리지 못했다.
성녀로써 살아오는 동안 신성의 격이 오르는 현상을 본 적이 없는 그녀다.
격이 오르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생겨날 지도 모르고.
영애께서 잘못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혹시 예술 교단의 사도께서 잘못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닐까하는 걱정도 있었기에.
페이비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루시를 바라보며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위대하신 주신께서 영애님을 사랑하시니 영애님께 문제가 생길 일이 없단 걸 알지만요. 만약 영애가 잘못된다는 생각을 하면 전.”
페이비는 말을 하다 말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편안히 잠을 청하고 있는 루시의 모습을 살폈다.
아카데미 수업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주무시는 것말고 침대에 누워 주무시는 것은 처음 보네요.
예전에 숲으로 현장 학습을 나가셨을 때에도 매번 불침번을 자청하셨잖아요.
분명 그 때 너희 같은 허접들한테 불안해서 어떻게 경계를 맡기겠냐고 그랬던 게 생각나요.
그러고 보면 그렇네요. 그 때에도 영애께선 희생을 자처하셨군요. 애써 강한 척을 하시면서 저희를 위해.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던 페이비는 문득 자신의 눈꺼풀이 내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무수히 많은 위험을 넘어 온 페이비다.
어젯밤에도 제대로 된 잠을 청하지 못했던 그녀가 피로를 느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이라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자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터이나 페이비는 그러는 대신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루시가 깨어날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만약의 경우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루시를 돕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일어났을 때에 웃으면서 맞이 해주고 싶었으니까.
허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페이비의 고개는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한계에 달한 몸이 점차 정신을 이기고 있는 것이다.
안 돼요. 페이비. 자면 안 돼요.
몇 번이나 뺨을 두드리면서 졸다 깨고 졸다 깨기를 반복하던 페이비는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에 빠져 버렸다.
그런 그녀가 다시금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녀의 귓가에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오던 때였다.
너무나 깊은 잠에 빠져 스스로가 잠들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뜨고는 자신의 어깨 위에 이불이 얹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어라? 이건 뭐지?
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텅 비어 있는 침대를 보고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 잠들었던 건가요?!
어느새!?
언제부터?!
아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
영애님은 어디로 간 거죠?!
침대에 안 계시는 걸 보면 분명!
“흐흥.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다급히 고개를 돌린 순간 페이비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날카롭고도 선명한 붉은 색의 눈동자.
얄미우나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웃음.
겨울에 내리는 눈처럼 말끔한 하얀 색 피부.
길게 늘어진 붉은 색 머리카락.
나이에 비해 자그마한 체구.
목소리를 낸 사람이 지닌 모든 특징은 분명 루시를 닮아있었다.
다만 한 가지. 페이비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그녀가 지닌 분위기였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향하게 되는 그 매혹적인 분위기는 이전의 루시에게는 없었던 것이었으니까.
“하여간 개허접 변태 로리콘 주신 답네. 이 모습이 자신의 변태적인 취향에 걸맞다는 건가? 진~짜 역겨워.”
…
저런 불경한 말씀을 하시는 거 보면 영애님이 맞으신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