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5
카리아가 나를 데려간 곳은 그리 먼 장소가 아니었다.
아르테아 항구가 있는 번화가의 뒷골목. 아르테아 저택에서 걸어서 몇 분이면 도착할 장소가 우리의 목적지였다.
“아르테아 항구는 오는 사람도 많고 가는 사람도 많은 곳이니까. 무언가를 숨기기에도 소문을 퍼트리기에도 좋은 장소거든.”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여기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뱃사람들이다.
며칠 머무르다 다른 곳으로 향하고 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언젠가 이 곳에 방문할 이들.
매일매일 거리의 얼굴이 바뀌는 곳에서 누군가를 기억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리라.
“그치만 고용주님에 한해서는 예외네. 소문만 여기저기에 퍼질 것 같은 걸?”
‘그러게요.’
“그러게. 이렇게 역겨운 변태 새끼들이 많을 줄이야. 평생 개처럼 일해도 내 발 끝조차 못 핥아 볼 허접 쓰레기들이 주제를 모른다니까.”
다만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나라는 존재만큼은 이 항구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 붙고 있었으니까.
내가 이 세계에 온 후로 나는 항상 주목의 대상이었다.
대개는 나쁜 쪽이긴 했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건 너무나도 일상적인 일이었지.
그 때에 나를 향하는 시선의 종류는 대부분 껄끄러움이었다. 루시 알른이라는 이름에 담긴 역사가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었던 것이다.
허나 오늘은 달랐다. 오늘 나를 향하는 시선에는 기분 나쁜 질척함이 묻어나 있었다.
저들이 루시 알른이라는 이름을 모르기 때문은 아니다. 날 가만 바라보다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질겁을 하며 고갤 돌리는 걸 보면 저들은 분명 내 악명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녀석들은 내 악명을 알고서도 저딴 시선을 보낸단 거다.
격이 오르면서 생긴 변화가 그렇게나 극적이었나?
난 아무리 거울을 노려봐도 크게 달라졌다는 걸 못 느끼겠던데?
“너무 노렸던 대로 잘 돼서 좋네.”
‘노렸다고요? 이걸?’
“뱀같은 아줌마. 뭘 노렸다는 거야?”
“이럴 땐 차라리 여우같다고 해주면 안 될까? 뱀 같다는 건 너무 독해보이잖아.”
‘여우가 더 별로 아닌가요?’
“여우? 너 설마 얼빠여우를 닮았단 소리를 듣고 싶은 거야?”
“…그으건 아니지. 응. 뱀이 낫네. 뱀이 나아.”
고개를 주억거리던 카리아는 이내 주변과의 소리를 차단하고는 내 물음에 답해 주었다.
“심문관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려면 버로우 영지에 없었단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하잖아.”
아아. 그렇구나. 항구의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어 두면 그 누구도 내가 버로우 가문에 머물렀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이래서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다 그랬던 거구나.
“그리고 겸사겸사 고용주님한테 자기 변화를 체감시켜주려는 의도도 있었고.”
‘…쓸데없는 배려에요.’
“누가 아줌마 아니랄까봐 주책이 심하기는. 좀 젊게 살아. 평생 혼자 살 거야?”
“…진짜 내가 입은 은혜만 아니었으면!”
당장에라도 꿀밤을 먹이고 싶다는 듯 부들부들 떨리는 카리아의 손을 본 난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로부터 몇 분 정도를 더 걸어서 도착한 장소는 한 식당이었다.
꽤 인기가 좋은 듯 수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며 소란으로 건물 안을 가득 채우는 곳.
풍채 좋은 아주머니가 거친 뱃사람들을 가뿐하게 휘어잡는 풍경을 보던 난 나도 모르게 카리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에 자칼이 있는 것이냐 묻기 위해서.
“여기가 맞아.”
보면 알 거라 말한 그녀는 이내 종업원 하나를 붙잡고 무어라 이야기를 했다.
종업원이 우릴 데려다 준 곳은 2층에 있는 개인실이었는데 카리아가 벽 한켠을 장식한 사슴의 뿔을 당기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드러났다.
“이제 의심이 사라졌어?”
난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카리아가 만들어 둔 비밀 장소가 내 혼을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뭐야! 완전 멋있잖아! 진짜 첩보원 같아!
와아. 진짜 카리아 얘는 악신의 주박에서 풀려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시스템을 구축한 거지? 유능해도 너무 유능한 거 아닌가?
“별 거 아냐. 제자 녀석이 구축해 둔 시스템을 약간 손봤을 뿐이니까.”
이게 별 거 아니면 카리아가 생각하는 별 거는 대체 뭘까.
이것이 과거 베네딕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의 유능함인가.
진짜 같은 편이라서 다행이야.
…앞으로는 아줌마나 노처녀 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자. 여기.”
자칼은 지하에 숨겨진 수많은 방 중 하나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언제 멎어버리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희미한 숨소리. 찌푸려진 미간. 입 밖으로 튀어나왔을 뿐 말이 되지는 못하는 희미한 목소리.
녀석의 모습은 과거 나크라드에게 당해 쓰러졌던 페이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어때? 고용주님이 해결할 수 있겠어?”
‘네.’
“당연한 걸 왜 물어 보는 거야? 그런 쓰잘데기 없는 걱정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남자를 잡아챌 수 있을 지나 고민하는 게 어때?”
“진짜 말을 말아야지.”
투덜거리는 카리아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면서 자칼의 몸을 눈에 담는다.
그러자 자칼의 심장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타리키의 기운이 보였다.
심장을 잡아채고서. 혈액 속에 조금씩 자신을 흘려 넣어. 몸 전체를 자신의 기운으로 물들이려는 수작이.
그를 살피고 있자니 새삼 신성의 격이 올랐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보이는 모양이구나.>
‘네. 잘 보여요.’
이전의 나는 타리키의 기운을 조금도 감지하지 못했다.
페이비가 쓰러졌을 때에도. 나크라드가 버로우 영지를 장악했을 때에도. 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서 타리키가 수작을 부렸단 걸 알아차렸을 뿐 그 기운을 눈에 담을 순 없었지.
그렇지만 이제는 가능하다.
신성의 격이 오르고 그에 맞춰 육신이 변화한 지금은 타리키의 기운을 볼 수 있다.
자칼의 몸에 새겨진 괴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따로 해 줄 말은 없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넵.’
숨을 가다듬으며 몸 안에 신성을 퍼트린다.
얼마 전 고된 싸움 끝에 고갈 되었던 신성은 이전보다 진중하고 고강해진 채로 내 안에 채워졌으니. 몸 전체가 따스한 기운으로 감싸지는 데에는 초침이
한 번 움직일 시간이면 충분했다.
이걸로 밑준비는 끝났고. 어디 한 번 시작해보자.
진정한 아르마디의 자비를 써보는 거야.
나는 여태까지 아르마디의 자비를 단순히 스킬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체력의 회복과 함께 상태이상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실제로도 지금까지 난 계속 아르마디의 자비를 그렇게 사용해왔을 뿐 그 이상을 고민하지 않았다.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이었던 내 지식이 아르마디의 자비를 그런 식으로밖에 쓸 수 없다 이야기했으니까.
허나 스킬의 튜토리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미처 생각지도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아르마디의 자비는 주신의 이름이 붙어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아르마디가 지닌 권능 중 일부를 부여받는 스킬이다.
단순한 힐 기술이 아니라 권능의 일부를 나눠받는 형식이란 말이다.
아무리 허접하고 무능한데다 자신의 변태적인 성취향을 충족시키는 것에만 열정적인 변태라 하더라도 주신은 주신.
녀석이 지닌 권능 중 일부를 부여 받았는데 겨우 그 정도 밖에 못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르마디의 사도가 됨에 따라. 녀석의 신성 중 일부를 이어 받음에 따라 알게 된 스킬의 본질은 이러했다.
괴로움을 거두는 것.
체력을 회복 시켜주는 것도. 상태이상을 없애 주는 것도. 모두 다 부수적인 효과였을 뿐.
아르마디의 자비가 지닌 본질은 괴로움을 거두는 권능이었다.
잘난 듯 이야기하긴 했지만 난 아직 이 권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아르마디의 자비라는 스킬을 제대로 파악한 게 오늘 새벽의 일인데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난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은 나일지라도 자그마한 여자애한테 처 발린 후 틀어박혀선 복수의 이빨을 가는 음침한 쓰레기의 기운쯤은 내쫓을 수 있고.
악몽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춘기 꼬맹이 정도는 구원할 수 있을 테니까.
신성을 손 위에 집약 시킨 후 그 손을 자칼의 심장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자 맞닿은 피부를 타고서 나의 신성이 자칼의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심장에 박혀 있던 타리키의 기운은 신성을 느끼자마자 발악하듯이 날뛰었다.
극상의 기운이 자신의 구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허나 그 발악은 무의미했다.
지금 내 신성이 지닌 격은 이 안에 어둠을 심은 나크라드보다도 드높을 지어니. 어둠이 아무리 발악을 한다 하여도 빛의 앞에선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을 터.
어느 순간 버틸 수 없음을 느낀 것일까. 타리키의 기운이 일순에 자취를 감추었다.
자신이 이 몸에서 도망쳤다 여기게 만들려는 생각이겠지.
허술한 수작질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칼의 몸 어딘가에 숨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타리키의 기운이 자칼의 몸 안에 머무르는 한. 그리고 그 기운으로 인해 자칼이 괴로워하는 한. 어둠은 내 시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지언데.
바란다면 그 기운을 집요하게 추적해 없애버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느긋하게 자칼의 몸 안을 신성으로 채워 나갔다.
그러자 태양이 떠오르며 어둠이 있을 곳이 사라지듯 자칼의 몸 안에 타리키의 기운이 머무를 곳이 점차 사라져 간다.
타리키의 기운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도주했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도주라는 건 도망칠 곳이 있어야 가능한 거니까.
막다른 길에 가로 막혀버린다면 눈을 감은 채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야. 좆밥 타리키♡”
결국 타리키의 기운은 발악하는 것조차 포기한 채 신성에 의해서 타들어가게 되었다.
“나중에 너도 이렇게 괴롭혀줄게♡ 기대해♡”
얼마 지나지 않아 타리키의 기운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자칼의 몸 안에서 신성을 거뒀다.
확실히 신성을 움직이는 게 이전보다 훨씬 더 수월해졌어.
겉은 잘 모르겠지만 속은 많이 바뀌었나봐.
으음. 그럼 신체 능력도 달라졌으려나?
돌아가면 칼한테 대련 좀 해달라고 그래야겠다.
지금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확인해봐야지.
– 띠링.
음? 뭐야?
보상?
새로운 퀘스트?
[악신과 계약한 자를 정화했습니다!]
[당신의 고결한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지옥에 떨어졌을 이를 구원했으니. 악인의 운명이 당신에게 종속됩니다!]
[‘자칼 버로우’의 상태가 악신의 계약자에서 당신의 종으로 변화합니다!]
[악인은 자신의 죗값을 치를 때까지 스스로의 생을 당신에게 바쳐야 할 것입니다!]
…
응?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