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8
소울 아카데미 수련장 인근에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테이블.
그 곳에 앉아 있는 것은 솔라딘 왕국의 3왕자 아서와 검술 명가 켄트 가문의 장녀 프레이였다.
소울 아카데미에 입학할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몇몇 대회에서 얼굴을 마주했을 뿐 그 이상의 친분은 존재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지만 소울 아카데미의 1학년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은 둘이 같이 있는 풍경은 그리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루시 알른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했으니까.
한 쪽은 언젠가 루시를 이기기 위해 루시에게 죽어라 구르는 사람.
다른 한 쪽은 루시만이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 생각하기에 루시에게 집착하는 사람.
둘의 목적은 달랐을지언정 루시를 가운데에 두고 모인단 점은 일치했으니. 아서와 프레이는 서로를 꽤나 편히 여기는 사이였다.
특히 그 편하다는 감정은 프레이에게서 강하게 드러났는데.
“허접.”
아무리 왕위와는 거리가 멀다 해도 왕가의 핏줄을 이었음은 분명한 아서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루시를 제외하면 그녀뿐이리라.
“…어이. 프레이 켄트.”
“말도 제대로 못하고 도망친 허접.”
“좋은 말 할 때 그만해라.”
무례는 당연하고 불경에 가까운 놀림이었지만 아서는 그 말에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얼마 전 그가 보인 행동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추태라는 표현이 걸맞는 행동이었으니까.
…아니. 이건 나만의 잘못이 아니다. 루시 알른에게도 분명한 책임이 있다.
대체 주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그리 바뀐다는 말인가!
그 짧은 시간에 무얼 겪었기에 이전에는 장인이 만든 인형 같아서 순수히 감탄하고 말 수 있었던 녀석이 어찌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채 돌아와서 그런.
그런.
“하아아.”
무슨 이유에서인지 얼굴이 벌게진 아서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속으로 헛소리를 내뱉는다 한들 어제 그가 벌인 행동이 사라지진 않으니 말이다.
보통 이쯤 되면 눈앞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볼 법도 하거늘 프레이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도 모르는 그녀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신경 쓸 리 없잖은가.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여자애가 무서워서 도망친 허접.”
“…누가 무서워서 도망쳤단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럼 뭔데?”
“난 단지 루시 알른이…”
“겁 먹은 거 맞잖아.”
“좀! 적당히! 하라고! 몇 번을 이야기하는가!”
그렇게 아서의 이성을 붙잡아주던 실이 끊기며 그의 목에 핏줄이 섰다.
“왜 그러는가! 평소에 쌓인 게 뭐가 그리 많았는가! 던전에서 지시 좀 따르라고 잔소리를 한 게 그리도 마음에 안 든 것인가?!”
“응.”
“거기에는 그대의 지분이 크지 않은가! 그대가 내 지시만 제대로 따라주었더라면!”
“그치만 3왕자님 지시는 허접해서 재미 없는 걸.”
“젠장! 더럽게도 당당하군 그래!”
화를 내도 말이 통하질 않으니 이길 수가 없다. 라는 진리를 깨우친 아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휘젓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머리를 휘젓던 그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허접인 건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루시 알른에게 놀림 당하고 싶어 하는 게 들켜 도망쳤던 녀석이!”
“…”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프레이였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아서가 그녀의 치부를 건드리기 무섭게 입을 다물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루시 알른이 자신의 상대를 안 해 줄지도 모른다며 징징거린 주제에 본인을 나무라다니! 어이가 없다!”
“…징징거리진 않았어.”
“하! 이상할 정도로 멍하기에 무슨 일이 있냐 물었더니.”
“그만.”
“목소리를 벌벌 떨며 말을 하던 녀석이 징징거리지 않았다고?! 그거 참 말이 되는 군!”
“거기까지 해. 안 그럼 벨 거야.”
눈에 실핏줄을 세운 채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었지만.
“프레이 켄트.”
“응.”
“여기까지 하지.”
“응.”
그 대치는 아서가 뒤로 물러섬에 따라 누그러졌다.
방금 전 소리를 내지르느라 기운을 다 뺀 것일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서가 중얼거리듯 목소리를 낸다.
“다시 어제의 이야기로 돌아가겠다만.”
“3왕자님이 도망친 날의 이야기?”
“다시 시작할 거냐?”
“미안.”
“어쨌건 그 때 우린 그대의 고민을 상담해주고 있지 않았나.”
소울 아카데미에서 해야하는 공부. 루시가 개인적으로 내어주는 여러 할당량. 거기에 더해 던전의 공략까지.
이 모든 걸 수행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서가 조이와 프레이와 함께 거리로 나간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프레이의 고민 상담. 최근 루시와의 사건 때문에 멍하게 지내는 시간이 많은 프레이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주말에 시간을 낸 것이다.
“그랬었어.”
“내가 떠나가고 나서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진 않았겠지?”
“응. 그냥 루시랑 같이 아카데미 거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어.”
“특이한 점은?”
“그 때 들렸던 음식점들은 하나 같이 맛있었어.”
“…지극히 그대답군.”
“그래? 고마워.”
“칭찬이… 하아. 됐다. 결국 어제 나눈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단 건가.”
바람 마법을 적절히 활용해 엉망이 되었던 머리카락을 재정비한 아서가 다시 프레이를 바라본다.
“어제 못 다한 말을 전해주자면 루시 알른이 그대를 버릴 것 같진 않단 것이다. 그 녀석이 입이 거친 것은 사실이지만 성미가 나쁘진 않거든. 그대를 친구라 여기고 있으니 계속 함께해 주겠지.”
“내가? 친구? 루시의?”
“항상 붙어서 이리저리 다니는 데 그걸 친구라 부르지 아님 무어라 하겠는가.”
“친구.”
프레이가 헤실거리며 웃음을 흘리자 아서가 힘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과거 여타 대회에서 만났을 적에는 이걸 인간이라 불러야 하나 싶을 만큼 차가웠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나도 인간적이군.
이 또한 루시 알른이 만들어낸 변화일까.
“그러니 별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만.”
“이다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이니 말을 좀 더하마.”
과거의 프레이를 알고 있는 아서는 이 변화를 좋은 변화라 생각했다.
인간미라곤 찾아볼 수 없던 프레이와 지금의 프레이 중에 누가 더 정감이 가냐 묻는다면 당연 후자였으니까.
그러니 이 변화를 조금 더 가속시키자. 그녀가 루시를 따르는 이상 오래 교제해야 할 테니 말이야.
“그대는 루시 알른을 만나기 전엔 감정을 몰랐다고 말했다. 맞나?”
“응. 맞아.”
“그리고 루시 알른을 만나 처음으로 그녀에게 분노라는 감정을 느꼈다고도 말했지.”
“정확해.”
“그렇담 말이다. 여태까지 그대가 느낀 감정은 분노 뿐이었나?”
아서의 물음에 프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군. 어찌하면 더 알아듣기 편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 이거면 되겠어.
“그대는 분노를 붉음이라 표현했으니. 그 이외의 색이 그대의 마음을 채운 적이 없느냐 묻는 것이다.”
“있어.”
프레이는 별 고민하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마음의 색이란 너무도 희귀한 것이었으니. 그 색이 자신을 채웠을 때를 기억하는 건 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루시가 나를 바보라고 불러줬을 때랑. 놀림당하고 싶다는 걸 들켰을 때랑. 그리고.”
“그거면 됐다. 프레이. 그대가 생각하기에 그 중에서 어떤 색을 더 많이 만나고 싶지?”
“색?”
“그래. 색에도 상하관계가 있을 것 아니냐. 그대가 루시 알른과 관련된 일을 가장 중하게 여기던 것처럼.”
아서의 질문을 들은 프레이가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답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에 색이 차오르기만 하면 뭐든 좋다 생각했던 그녀이기에 높고 낮음을 생각한 일이 없는 것이다.
미간을 찌푸린 채 프레이가 진지한 고민을 이어나가려던 그 때에 저 옆에서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안하신가요? 두 분?”
그 존재는 왕자와 명문 백작가의 장녀가 나누는 대화 한 가운데에 끼어들 수 있을 만큼의 지위를 지닌 이였다.
조이 파트란.
파트란 공작 가문의 영애는 한치 흐트러짐 없는 깔끔한 인사를 두 사람에게 건넸다.
“늦었군. 커튼 때문에 해가 뜬 줄도 모르고 다시 한 번 잠들었다 온 건가?”
“오는 길에 알른 영애를 만났거든요. 수줍은 많은 왕자님께서 보자마자 반해버린 영애님을요.”
“누가 누구에게 반했다는 것이냐!”
“아니었나요?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루시의 말대로 자신의 눈이 얼빵해진 것 같다고 태연스레 이야기하는 조이의 모습에 아서가 이를 갈았다.
루시 알른이 하도 이 녀석을 놀려댄 탓에 사람이 점점 뻔뻔해져 가는 군.
양갈래 머리가 같은 모양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모르는 걸 보면 얼빵한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야.
본래라면 타박을 하며 알려주었을 터이다만 오늘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어.
본인을 놀린 대가는 치러야 할 테니.
“제가 두 분께서 흥미를 지니실 법한 소식을 들고 왔답니다. 바로 알른 영애와 칼 교수님께서 대련을 하신단 소식을요!”
“두 사람이?”
“네. 알른 영애께서 먼저 요청을 하셨나봐요. 전력을 시험해보고 싶으시다면서.”
“알른 가문의 기사와의 대련이라.”
칼이 알른 가문의 기사라는 것은 공공연연한 비밀이다.
루시도. 칼도. 이 사실을 그리 숨기고자 하질 않으니 조금 신경 써서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지.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 누구냐고 물을 때 항상 언급되는 알른 가문의 기사와 루시 알른이 대련을 한다면.
루시 알른이 아무리 뛰어난 무재를 타고났다 하더라도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을 터.
그녀의 전력을 볼 수 있는 기회인가. 이는 분명 귀한 소식이야.
“흥미롭죠?”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소식이었다. 고맙군.”
어깨를 으쓱이는 조이에게 감사를 표한 아서는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는 프레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프레이 켄트.”
“…응?”
“따라 와라. 그 광경은 네가 답을 내는 데에 도움이 될 테니까.”
“무슨 광경?”
“안 듣고 있었던 거냐.”
가면서 설명을 해주겠다는 이야기에 프레이가 아서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다.
“허접들. 너무 느려터진 거 아냐?”
조이의 안내에 따라 향한 장소는 아카데미에서 대여해주는 대련실이었다.
신청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는 그 공간에 루시와 칼이 서로를 마주한 채 서 있었지만 아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루시 뿐이었다.
여전히 아서는 루시가 정확히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진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에게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녀의 매력에 이끌렸건, 아니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질투하건,
루시라는 사람을 눈에 담았다면 누구라도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겠지.
“…음? 루시 알른. 갑옷의 상태가 영 좋지 못하군. 무슨 일이 있었나?”
가만 루시를 관찰하던 아서는 그녀의 갑옷이 언제 부서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임을 눈치 챘다.
나름 수리를 한 듯 하지만 갑옷 자체에 한계가 찾아왔군. 실력 있는 대장장이라면 누구나 새 갑옷을 권할 거다.
“불쌍왕자님께선 끼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일을 겪고 왔거든요. 들으시면 엄청 놀라실 걸요?”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궁금하세요? 말씀해드릴까요?”
“그래주면 고맙겠군.”
“으음. 마음이 바뀌었어요. 비밀로 할래요.”
“…뭐?”
아서가 눈썹을 치켜 드는 걸 본 루시가 키득거리는 소리를 낸다.
“푸하핳. 말해줄거라고 생각했어요? 기대했어요? 그치만 비밀. 불쌍왕자님 같은 꼬맹이한테는 이른 일이거든요.”
이전이었다면 이 쯤에서 한 소리를 했을 아서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몸짓에도 아서의 얼굴이 벌게지며 그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이다.
“허접.”
그를 본 프레이가 과거 자신이 던전에서 혼났던 것을 되갚아 주겠다는 듯 목소리를 냈고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조이는 다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두 사람의 반응에 아서의 얼굴이 한층 더 열을 더했지만 정작 이 일의 근원인 루시는 이미 아서에게서 관심을 거둔 지 오래였다.
“야. 허접.”
“준비되셨습니까? 아가씨?”
“덤비기나 해. 개처럼 바닥을 기게 해줄 테니까.”
“기대하겠습니다!”
웃음기 서린 답변을 내놓은 칼이 발을 뗀 순간.
아서의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뭐지?
아무리 내가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건.
채앵!
아서가 뒤늦게나마 칼의 움직임을 따라잡은 건 이미 한 차례의 격돌이 지나간 후였다.
“검이 느려터졌는데? 노견이라 회복이 느린가봐?”
“하하. 아가씨! 제가 노견이면 다른 기사는 뭐가 됩니까!”
루시의 방패에 가로막힌 칼의 검이 허공에서 다음 검로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