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오무룡의 저택은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협회 인형이 폭주해서 서울 전역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처럼, 저택 내부도 엉망진창이었다.
대부분의 가구는 부서져 버렸고, 문이란 문들은 전부 박살 나버렸다.
저택 내부에 있던 인형들은 붉은 눈을 빛내며 돌아다녔다.
저택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죽어서 나자빠지거나, 오염돼서 좀비처럼 배회했다.
하지만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오무룡은 그의 비밀 연구실에서 환희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랑하던 연구실은 지금 피를 연상케 하는 붉은 액체로 뒤덮인 상태였다.
붉게 물든 연구실 중앙, 붉은 액체가 가득 찬 수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속에는 오무룡이 죽은 손녀를 본떠 만든 인형이 누워있었지만, 지금은 인형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수조 속의 붉은 액체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무룡은 그 모습을 보며 환희에 찬 소리를 질렀다.
손녀를 되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갈아 넣었던 그는, 마침내 손녀가 부활했음을 직감했다.
손녀의 시체와 수많은 손녀 클론, 그리고 손녀를 거의 완전히 복제한 손녀 인형까지 잡아먹은 액체 속에서 뭔가가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마치 수백 개의 손녀 얼굴이 뭉쳐진 듯한 흉측한 구체였다.
구체 표면의 얼굴들은 환희, 절망, 슬픔, 고통 등 온갖 표정을 짓고 있었고, 모든 얼굴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얼굴들 사이로는 손녀의 작은 팔다리가 뒤엉켜 튀어나왔다.
손녀를 재료로 했지만, 인간과 동떨어져 보이는 형상이었다.
그야말로 괴물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오무룡은 달랐다.
그는 “드디어! 드디어 돌아왔구나!”라고 외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미쳐버린 오무룡에게 손녀는 완벽하게 부활한 것이다.
그는 이미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채, 자신이 만들어 낸 괴물을 손녀라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광기의 증거였다.
***
파티가 끝나버린 세희 연구소.
예린은 여전히 소란스러운 뒤뜰을 벗어나 조용한 안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안뜰에는 황금 사신들이 물로 만든 창과 투구를 바닥에 내려놓고, 푹신한 마시멜로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쉬고 있는 몇몇 황금 사신들은 쉬러 들어오는 황금 사신들과 교대하듯이 안뜰을 나서고 있었다.
황금 사신들은 귀여운 투구를 쓰고 길쭉한 창을 든 채, 당당한 표정으로 뚜방뚜방 걸어 나갔다.
예린이 보기에 지금 안뜰은 경비를 서는 황금 사신들의 휴게실로 보였다.
황금 사신들이 전시에 안뜰을 징발한 것 같은 느낌이라서 조금 웃음이 나왔다.
작게 웃은 예린은 근처에 누워서 쉬는 황금 사신에게 다가가, 통통한 뱃살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더니, 금세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안뜰이 좁아졌어.”
원래 미니 사신 정원과 연결되어 있어 넓게 느껴졌던 안뜰이 어느새 좁아져 있었다.
“이상하네….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예린은 중얼거렸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뜰과 미니 사신 정원의 연결이 끊어지다니!’
미니 사신 정원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은 분명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의미했다.
예린은 불안한 마음에 안뜰에 있는 TV를 켜고 채널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제대로 방송하는 곳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마침내 현재 상황을 비춰주는 방송을 찾을 수 있었다.
화면 속에서 한 남자가 어두운 방 안에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기 저 밑을 보세요. 인형들이에요.”
그의 카메라가 비춘 곳에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피 묻은 관리인 인형들과 건물을 부수고 있는 커다란 건설용 인형이 보였다.
남자는 다시 커튼을 치고 속삭였다.
“당장 싸구려 인형 사는 것보단, 나중에 좋은 인형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샀으면 큰일 날뻔했네요.”
이어서 그는 인형이 없어서 서러웠던 이야기와 그 서러운 일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일화를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철컥. 철컥. 철컥.
그런데 갑자기 방문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405호 총각. 문 좀 열어봐.”
남자는 화들짝 놀라 방송 중인 핸드폰을 떨어뜨렸지만, 목소리를 듣고 안심한 표정으로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후, 집주인 아주머니네요. 심장 떨어지는 줄.”
그는 시청자들에게 말했다.
“우선 방송을 끄고, 조금 있다가 다시 방송하겠습니다.”
그리고 화면은 꺼져버렸다.
‘역시 인형 문제였구나.’
예린은 방송을 보며 인형 문제였음을 확신했다.
인형들을 볼 때마다 늘 꺼림칙한 기분이 들곤 했던 터라,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문득 사신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신이는 괜찮을까?”
예린에게는 미니 사신 정원부터 시작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울 전역을 감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예린은 누워있는 황금 사신의 말랑한 뱃살을 콕콕 찌르며 불안감을 떨쳐내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의 불안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
삐걱. 삐걱. 삐걱.
금발 소녀와 붉은 사신은 인형의 음산한 소리가 가득한 서울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 일은 내가 끝마쳐야 해.’
그녀는 오무룡 할아버지와 수많은 클론의 이야기는 그녀 자신이 끝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따라오겠다는 검은 요원마저 두고 홀로 나선 길이었다.
금발 소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지만, 그녀의 어깨 위의 붉은 사신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붉은 사신은 오랜만에 언니와 놀러 나온 것 같은 느낌으로 싱글벙글했다.
금발 소녀는 오랜 잠에서 깨어난 이후로, 다른 ‘손녀’가 어디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완벽히 미니 사신 정원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고, 손녀 쪽에 무슨 일이 생겨서 생긴 일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감정마저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마치 미니 사신들이 서로 연결된 것처럼, 수많은 손녀끼리도 뭔가 연결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억울함.’
그녀들의 고통에 찬 비명이 계속 들려오는 것 같았다.
콰앙!
그렇게 하염없이 할아버지의 저택을 향해 걸어가던 도중, 옆의 건물이 무너져 내리며 커다란 그림자가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건설용 대형 인형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자, 붉은 사신은 양손에 불꽃으로 만든 무기를 들어 올리며 의지를 뿜어냈다.
‘혁명!’
금발 소녀는 붉은 사신이 들어 올린 불타는 낫과 망치를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잠든 사이에 이상한 것을 배웠네.’
금발 소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건설용 인형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화르륵.
뭔가에 불이 붙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붉은 사신의 피부처럼.
그리고 금색으로 반짝거리던 머리카락도, 그녀의 선홍색 눈동자처럼 붉게 물들었다.
‘타올라라!’
마음속으로 염원을 보내며, 소녀는 손을 튕겨서 ‘탁’ 소리를 냈다.
그 순간 건설용 인형의 전신에서 새빨간 불꽃이 치솟았다.
사막의 불꽃.
태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장작이 있는 한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붉은 달의 화염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건설용 인형은 마치 아귀의 하얀 불꽃에 닿은 것처럼 순식간에 쇳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뚜방뚜방.
금발 소녀는 이미 해치웠다는 것처럼, 인형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쳐 갔다.
그와 동시에 전신이 붉게 물든 소녀의 몸이 점점 원래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붉은 사신은 그 모습을 보고 엄청나게 놀란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소녀의 전신이 원래 색으로 돌아오자, 붉은 사신은 폴짝폴짝 뛰며 호들갑을 떨었다.
‘엄청 강해!’
그리고 붉은 사신은 금발 소녀에게 자신의 무기를 전도하기 시작했다.
‘혁명!’
불타는 낫과 망치를 만들어서 싸우면 진정한 혁명의 투사가 될 수 있다며 속삭였다.
하지만 붉은 낫과 망치의 의미를 아는 금발 소녀는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착한 붉은 사신에게 이상한 것을 알려준 사람에 대한 분노를 조금 담아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 혁명의 무기를 알려준 게 누구야?’
‘엄마!’
‘그렇구나.’
아…. 회색 사신은 어쩔 수 없지.
***
맑은 하늘과 비 오는 구름의 경계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황금 사신의 비도 경계를 그리고 있었다.
마치 장마 전선처럼 세희 연구소를 중심으로 서울 전역으로 퍼져가는 황금 사신 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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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는 황금 사신들을 구경하며 뛰어가고 있었다.
뚜방뚜방뚜방뚜방.
목적지는 색채 우주를 끌어들이는 중심이었다.
박람회장만 난리가 난 줄 알았는데, 밖으로 나와보니 박람회장보다 더한 혼돈이 서울 전역에 내려와 있었다.
인형에게 공격당해 죽어버린 시체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그리고 그런 시체를 볼 때마다 황금 사신들은 눈물을 조금씩 흘리며, 무시하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황금 사신의 주변으로는 슬픈 기분이 마구 흘러나왔다.
너무 슬퍼서 애도하고 싶은데, 애도할 시간이 없어서 더욱 슬퍼지는, 슬픔의 연쇄로 보였다.
토도도. 토도도.
황금 사신들이 나만큼 급한 발걸음으로 인형과 인형 사이를 왕복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계속 재생하는 인형은 아주 많은 데다가, 황금 사신의 숫자는 인형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하니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마구마구 달려가서, 살아나려고 하는 인형의 심장으로 박치기!
그리고 쉴 틈도 없이 다른 인형에게 달려가서 박치기!
황금 사신 하나당 최소 인형 10기는 담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생존자를 발견하면 구름 고기를 불러서 안전하게 확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른 미니 사신들도 간간이 보였다.
검은 사신들은 거대 검은 사신으로 합체해서 인형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검은 사신의 튼튼한 위장은 훌륭한 인형 감옥이었다.
주황 사신들은 구름 고기를 부리며 인간들을 수용하고 있었고, 푸른 사신들은 다친 인간들을 치료해 주며 돌아다녔다.
다들 굉장히 바빠 보이네.
유령화를 한 채 미니 사신들의 분투를 보며 빠른 속도로 뛰어가는 도중, 하늘에서 불길한 고치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흉측한 염증처럼 생긴 붉은 고치였다.
‘아, 큰일 났네.’
그리고 나는 고치를 보자마자, 그것이 색채 우주의 외신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두근거리며 마구 맥박치던 고치가 맥박을 멈추고 점점 보라색으로 썩어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찌이익 찢어지며 썩은 핏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쿠웅.
그 핏물 속에 섞여 거대한 무언가가 지면에 떨어져 내렸다.
보라색 덩어리처럼 뭉쳐있던 그것은 마치 번데기에서 부화하는 나비처럼 보라색 팔 수십 개를, 하늘을 향해 뻗기 시작했다.
마치 소금쟁이의 그것처럼 얇고 길쭉한 보라색 팔들.
그 수없이 많은 팔 중앙에는 살점 하나 없는 갈비뼈와 기괴하게 생긴 얼굴이 하나 달려있었다.
마치 뒤집혀 매달린 인간의 얼굴처럼 뒤집힌 얼굴이었다.
온몸에 붙은 붉은색 핏물은 시간을 빨리 돌리는 것처럼 바짝 말라버렸고, 마른 핏물은 얇은 피막이 되어서 펄럭였다.
그리고 그 보라 외신은 입을 벌리고 소리쳤다.
공간을 진동시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불길한 진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