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
“영애께서 왜 여기에?”
‘전 교회에 오면 안 되나요?’
“난 교회에 발을 들여서도 안 되는 거야? 머저리 사제?”
“아뇨. 그렇진 않죠.”
내가 따지듯이 묻자 사제가 당황해서는 손을 내저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나를 달가워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루시한테 무슨 짓을 당했기에 이 큰 교회의 사제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주신 교회의 사제가 지닌 권세는 작지 않다.
대륙에서 제일 영향력이 큰 교회의 사제가 지닌 힘이 어찌 작을 수 있겠는가.
게임 내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주신 교회의 사제는 어지간한 귀족만큼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
그런 사람이 뜨악해 할 정도라면 루시가 저지른 패악질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주신 교회 내에 퍼진 루시의 평판이 어떨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거 아그라의 저주 하나를 해주한 것 가지고 해결이 되는 문제인가?
루시의 원래 평판을 상쇄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애매한 거 아냐?
루시가 저지른 패악질이 저택 내부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깨달은 나는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루시 이 년은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닌 거야.
업보도 적당히 쌓아야 수습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하아.
교회의 사제한테 지랄을 할 정도라면 자기보다 낮은 작위의 귀족들한테도 비슷한 일을 저질렀겠지.
어쩌면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허접 소리를 했을 지도 몰라.
사교장에서 욕을 들어먹는 악몽을 꾼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크흠.”
사제가 경직된 분위기를 수습하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앞에서 이미지를 다 까먹은 후였기에 조금도 멋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 곳에 방문하신 겁니까?”
‘아뇨…’
“아니.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아그라의 저주 때문이야. 머저리 사제도 저주에 대해선 알겠지?”
“네. 알죠. 혹시 주변에 저주 때문에 고생하는 분이 있습니까 ? 그렇다면 저희 교회 측에서.”
‘저주를 해주었어요. 확인해주세요.’
“머저리 사제. 네가 멍청하고 성급한 걸 티 안내도 되니까 내가 하는 말부터 들어. 아그라의 저주를 해주했어. 확인해 줘.”
“…예? 저주를 해주하셨다고요?”
내 말을 들은 사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되물었다.
그가 불신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귀족 가문의 망나니 악역 영애가 악신의 저주를 해주했다는 걸 어떻게 믿겠는가.
나 같아도 저 입장이었다면 개소리 하지 말라 그랬을 것이다.
‘네. 맞아요.’
“하아. 꼭 머저리인 티를 내네. 귀가 먹은 모양이니 다시 말해줄게. 아그라의 저주를 해주했다고.”
“정말입니까?”
‘사실이에요.’
“백작영애가 하는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머저리 사제치고는 용감한 발언이네?”
“아뇨! 아닙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주교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사제는 목례를 건네고 달아나듯이 달려가다 중간에 자신의 옷에 걸려서 넘어졌다.
그는 아픈 기색을 보였지만 고갤 돌려 멀뚱히 서 있는 내 모습을 보곤 다급히 일어나서는 발을 움직였다.
<여아야.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그거 제가 알고 싶은데요.’
진심으로.
루시가 무슨 패악질을 부렸으면 사제가 저렇게 겁에 질린 걸까.
‘칼…’
“허접. 내가 교회에서 뭐 한 일이 있었나?”
“아가씨. 설마 그 일을 잊으셨습니까?”
어지간해선 항시 평정을 유지하는 칼이 눈에 띄게 당혹스럽단 기색을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저지른 일의 수위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물어야 했다.
‘네.’
“그러니까 묻는 거잖아. 대답해.”
칼은 교회 내에서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수녀나 평신도들의 눈치를 보다 내 귓가에다 고개를 붙여서는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예전에 아가씨께서 예배를 하던 교회에 방문해 신을 모욕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잠시만요. 허접 기사씨.
내가 뭘 했다고?
신을 모욕해?
내가 눈을 끔뻑거리자 칼은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해 주었다.
어느 날 내가 멀쩡히 예배를 보고 있는 교회에 방문해 신 같은 게 세상에 있을 리 없다고 소리를 쳤던 일.
베네딕에게 주의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찾아와 교회에서 깽판을 쳤던 일.
자신을 말리려는 사제들의 얼굴을 구둣발로 짓뭉개준 후 비웃어 주었던 일.
“방금 전 저 사제님은 예전에 아가씨에게.”
‘칼. 닥쳐요.’
“허접. 닥쳐봐.”
“옙. 알겠습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칼의 증언을 차마 듣고 있을 수 없었던 나는 반 강제로 칼의 입을 틀어막았다.
<예전이었다면 불경하다고 사형당했을 일을 잘도 저지르고 다녔구나.>
‘…’
<저런 일을 저질러 놓고 기억을 못했다고? 내 어지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다만 혹여 기억에 문제가 있느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루시. 이 미친년아!
현대에서 비슷한 일을 저지르고 다녀도 정신이 나간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일을 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저지르고 다녔다고?!
말이 되냐?!
교회의 권위가 나라에 비견될 만큼 거대한 이 세상에서 신과 교회를 모욕하는 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머리가 아팠다.
루시 이 년은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베네딕이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어서 그런 걸까?
그런 거겠지.
베네딕의 위광이 없었다면 불경이건 뭐건 어떤 죄를 물려서라도 단두대 위에 올렸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게 낫지 않았을까.
불경으로 처형당했더라면 내가 빙의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사제가 당황한 것도 이해가 됐다.
그런 일을 저지른 인간이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다가 다시 교회에 왔으니 기겁을 하겠지.
또 무슨 깽판을 벌이러 온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기겁한 정도면 온건한 반응이었다.
신상심이 깊은 사람이었다면 대놓고 너 따위가 올 곳이 아니라는 소리를 했을 테니까.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바닥을 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현 상황을 정리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좆됐다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겠지.
아그라의 저주? 평판작?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루시는 지금 이 대륙에 멀쩡히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주신 교회는 소울 아카데미 스토리에 많은 관여를 하는 집단이다.
저들의 지지를 잃어버린다면 앞으로의 공략에 여러 난관이 생길 수도 있다.
아그라의 눈총을 사게 된 마당에 주신 교회한테까지 적대를 당한다고?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잖아.
이건 게임에서 컨셉플레이 같은 걸 하는 게 아니라고.
현실이란 말이야.
난 하드 모드로 살고 싶지 않아.
병신아. 생각해.
만 사천시간동안 소울 아카데미만 파고들던 그 대가리로 생각을 하란 말이야.
이대로 좌절만 한다고 뭐가달라지냐?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나는 문득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잘 생각해보면 지금 내 포지션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
한 때는 신을 불신했으나 신의 계시를 받아서 회개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가면 괜찮지 않나?
…이거 괜찮을 것 같은데.
계시를 받았다는 증명도 가능하다.
신의 축복을 받았고. 통상적으로는 해주할 수 없는 저주를 없앤데다가. 실종되었다 생각된 옛 영웅의 무기를 지니고 있으니까.
하나였다면 우연 취급할 수 있겠지만 이 세 가지가 뭉쳐버리면 이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 된다.
어느 누가보더라도 신의 계시를 받은 거라고 생각할 걸.
당장 기사단의 기사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잖아.
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나의 회개는 손해 볼 것 없는 일이다.
루시의 악명이 커다란만큼 루시가 회개해 신을 믿는다는 이야기가 주는 파급력은 상당할 것이다.
대륙 전체에 악명을 퍼트린 망나니 영애가 신을 믿고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스토리라니.
교회에서 신의 기적을 이야기할 때 써먹기에 적절한 내용이지 않나.
완벽해. 이걸로 가자.
저 쪽에서 처음부터 내가 달라졌음을 믿어주지 않아도 돼.
어차피 나는 앞으로도 아그라의 수하들과 싸우게 될 테니까.
내가 이룬 여러 업적들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회개를 믿게 되겠지.
그렇게 교회의 지지를 받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루시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도 개선될 테고.
난 천재인가?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런 계획을 내놓을 수가 있는 거지?
“백작 영애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교회의 한 가운데를 걸으며 내게 다가오는 자의 얼굴을 익숙한 것이었다.
수염 하나조차 없어 눈에 띄는 자글거리는 주름.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 자애가 담긴 듯 부드러운 눈동자.
나는 저 사람을 알고 있었다.
소울 아카데미 내에서 꽤나 비중있게 나오는 NPC중 한 명이었으니까.
교회 관련 스토리를 타면 적이건 아군이건 무조건 만나게 되는 영감님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훗날 주신 교회의 추기경 자리에 올라 교회 내 강경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는 노인.
유저들 사이에서는 통칭 꼴통 사제라 불리던 남자.
겉의 인자한 모습과는 달리 그 안에는 고슴도치를 품고 있는 까탈스러운 인간.
요한 비에라.
이 노친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지금쯤이면 주신 교회의 성지에서 자기 세력을 끌어 모은다고 고생하고 있을 시점 아닌가?!
“지난 번 영애께서 제 얼굴에 물을 뿌린 이후로 처음이니. 대략 일 년만에 보는 셈이군요.”
요한은 나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날이 서 있는 말을 건넸다.
어. 음. 죄송합니다. 주교님.
제가 주교님의 얼굴에다 물을 뿌렸었나요?
이야. 제가 그날 뭐에 씌이기라도 했나 봅니다.
부디 심신미약이라 생각하시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
속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며 주교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인자했다.
조금 다르게 말을 하자면 본심을 드러낼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펠킨 사제가 말하길 영애님께서 아그라의 저주를 해주하셨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네. 맞습니다!’
“내가 꼭 말을 두 번 해야 하겠어. 꼴통 주교?”
“하하. 죄송합니다. 워낙에 믿기 어려운 이야기인지라.”
요한은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아이에게 모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그 모습은 꼭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는 마음씨 고운 노인처럼 보이지만 다르다.
난 알고 있다. 저 속에는 냉정히 손익의 계산을 하고 있는 노친네가 있다는 것을.
허헣. 씨발. 좆됐네. 내가 게획한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이 노친네를 설득해야 한다는 소리잖아.
난이도가 너무 높은 거 아냐?
이 정도면 풍둔 아가리술이 아니라 세치혀로 번개라도 찢어야 되겠는데?!
“안으로 들어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영애님을 언제까지고 세워둘 순 없으니까요.”
‘배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세워두고 배려하는 척이야? 꼴통답네.”
요한이 웃어주는 것에 맞추어 같이 웃어줬다.
아. 제기랄.
오늘 따라 메스가키 스킬은 또 왜 이리 지랄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