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0
칼은 여전히 루시와 처음으로 대련을 했던 때를 기억했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을 뻔 했던 날.
아가씨의 자비가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꿈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그 날.
그 때의 루시는 베네딕 알른의 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약했다.
오래 달리는 것조차 못 해 바닥에 널부러지고.
방패와 메이스의 무게에 휘둘리고.
방패를 다루는 것은 그럭저럭 봐줄만 했지만 메이스를 휘두르는 것은 꼴불견이었지.
그 때의 칼은 루시가 크게 성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재능이라는 것은 어릴 적부터 싹을 보이는 것일 지어니. 그녀의 변화가 가파르리라 여기는 것은 희망적인 관측이라기 보단 맹목적인 믿음이라 불러 마땅했다.
칼만 그리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알른 가문의 영지에 있던 이라면.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1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루시는 보란 듯 자신이라는 인간이 지닌 가치를 증명해왔다. 다른 무엇도 아닌 스스로의 실력으로.
“너무 공격이 허접한 거 아냐?♡ 혹시 버려달라고 하는 거면 말로 하지 그래?♡”
“여유로운 체 하시는 거 치고 입술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신 것 아닙니까?!”
칼이 뜨거워지는 머리를 억지로 진정시키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아가씨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까다롭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지금 루시가 보여주고 있는 강점은 한 둘이 아니었다.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경이로울 정도로 단단한 방패다.
칼이 오러를 둘러서 후려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흠집조차 나지 않는 그녀의 방패는 맞은편에 선 상대의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방패만이 단단할 뿐인가?
아니.
루시가 꼭 쥐고 있는 메이스에는 칼마저 위협이라 느낄 만한 위력이 잠재되어 있다.
한 번이라도 틈을 내비치는 순간 그녀의 메이스가 틈 사이를 파고들어 뼈 어딘가를 박살내 버리겠지.
이런 요소를 더 까다롭게 만드는 것은 루시가 이 두 가지 사실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단 점이었다.
방패의 뒤에 숨어 상대를 조급하게 만들고. 그를 뚫기 위해 상대가 강수를 두면 메이스를 내비치는 것으로 상대를 위협해 물러서게 한다.
이 와중에 상대가 실수를 저지른다면 메이스를 휘둘러 상대를 박살낸다.
이런 공방을 어설프게 조합한다면 방어도 공격도 어설퍼질 뿐이지만 루시에 한해선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수많은 경험을 쌓아 온 루시는 그런 실수를 할 정도로 어설프지 않았으니까.
자신의 강점을 알고 그를 극대화하는 전투법.
말로 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이 당연한 걸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고작 1년 만에 맨바닥에서 자신의 전투법을 확립하시다니.
이미 아가씨께서는 한 사람의 기사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어졌군.
이를 상대하기 위해선. 상대가 자신의 강점을 지키려 들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든 그 강점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
적의 영역에서 벗어나 나의 영역으로 이끌어야 한다.
숙련된 기사인 칼은 이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고 이를 실행할 실력 또한 지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루시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패배견♡ 어디로 분양해줄까?♡ 너 같은 허접한 노견을 받아줄 데가 있을 진 모르겠지만 한 번 알아는 봐줄게♡”
“저 이래 뵈도 부르는 곳이 많은 사람입니다만!”
루시가 목소리를 내뱉을 때마다 칼의 머리에 뜨거움이 담겨서.
이성이 점차 흩어져서.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해도 어느 순간 검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서.
칼은 어쩔 수 없이 루시의 영역 안에서 춤을 춰야만 했다.
후흐. 정말이지 아가씨께서는 적으로 두기엔 너무도 까다로운 분이시다.
실력과 강함으로 찍어 누르는 게 아니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이지 않은가.
아가씨와 비슷하거나 저보다 약한 수준이라면 과연 아가씨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할까?
분명 이 안에서 농락을 당하다 어느 순간 이성이 증발해 메이스의 제물이 되겠지.
언젠가는 나도 그리 될지 모르고.
허나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아가씨에게 패배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지금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버려져 불쌍한 유기견이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지 않은가.
아가씨의 옆에서 이룬 것도 마땅찮은데 벌써 버러졌다간 음유시인의 이야기 속 기사가 아닌 어느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실패자로 기록이 될 터.
그러니 아가씨께 보여드리도록 하자.
이 기사가.
당신의 개가.
얼마나 날카로운 이빨을 지니고 있는지를 말이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방패를 피한 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서로 간의 거리가 벌어지며 만들어진 고요 속에서 루시는 가만히 서 칼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벌써 지친거야 허접견?♡”
“아뇨. 아가씨께서도 아시겠지만 알른 가문의 기사는 일주일 정도는 밤을 새어가며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럼 왜 도망친 건데?♡ 쫄려?♡ 메이스에 얻어맞으면 아야할까봐 그래?♡”
“이렇게 여유를 두어야 제가 펼치려는 것이 잘 보일 테니까요.”
칼은 그리 이야기하며 웃고는 자신의 오러에 색을 담았다.
얼마 전 버로우 공작을 맞상대할 때에 그랬던 것처럼. 눈꽃과도 같은 백색의 오러가 그의 검을 감싼다.
“알른 가문의 기사가 지닌 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알른 가문의 검술이 지닌 원점이자 목표. 극한에 가까운 위력을 통한 일격.
루시 아가씨. 당신의 기사가 지닌 송곳니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칼이 검을 위로 치켜 든 그 순간. 루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자신의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 위에 그녀가 지닌 신성이 집약된다.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게 평범한 신성이 아니라는 것을.
진하고 따스하며 고결한 그 신성은 많은 이들이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였다.
다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이 신성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진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방패 위에 새겨지는 신성을 본 이들은 자신이 여태까지 본 신성이 거짓이고 저 쪽이 진짜인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루시가 지닌 신성은 경이로우며 경외로웠다.
“덤벼♡ 허접견♡ 네 너덜거리는 이빨이 얼마나 뭉툭한 지 느껴보게♡”
“예. 가겠습니다.”
칼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고.
루시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고.
그의 검이 위로 치켜 올라가.
그녀의 방패 앞에 모인 신성이 그 위에 새로운 방패를 형성해.
자신이 품은 모든 위력을 아래로 내리쳤다.
자신의 앞에 영웅의 일화를 재현했다.
*
칼과의 대련 결과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결국 졌다.
원래의 목표대로 칼의 오러에 색을 담게 만드는 데 성공했고 녀석의 공격에 어떻게든 대응하기도 했지만.
방패로 막아냈다고 해서 몸에 무리가 안 오는 건 아니다 보니 결국 깎여나가다가 패배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칼이 여유를 보였던 걸 보면 아직 전력을 다한 건 아니겠지.
저 녀석 진짜 더럽게 강하다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다. 네 기사는 이미 평기사 수준은 아득히 넘어선 것 같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나도 어지간한 기사 정도는 어렵잖게 이길 수 있는 수준인데 아직 칼에겐 닿지 못하고 있으니.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칼도 오버스펙이야.
얼굴 좋지. 성격 괜찮지. 능력 있지. 나이도 젊은 편이라 유망하지.
한 가지 단점을 제외한다면 진짜 초인이라고 부를 만 해.
자기 주인한테 개취급을 당하고 싶어하는 왜곡된 충성심을 지니고 있단 걸 제외한다면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결점이 너무 크네.
뒤에 한 마디가 더 붙었을 뿐인데 이상적인 기사에서 왜곡된 성욕을 감춘 변태로 바뀌어 버렸잖아.
아무리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다지만 이건 너무 큰 결점인 게 아닐까.
<뭐어. 그래도 저 녀석이 강한 덕분에 네 능력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를 알 수 있었으니.>
‘확실히 전체적으로 능력이 늘어난 게 느껴져요.’
전반적으로 강해지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신성을 다루는 능력이다.
이전의 나는 신성을 운용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할배와 연습을 하면서 꾸준히 실력을 늘려나가고는 있었지만 내가 바라는 대로 할 수 있는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지.
허나 지금은 아니다.
신성의 격이 올라감에 따라 변한 몸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신성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 변화를 제대로 느낀 건 칼의 오러를 상대로 영웅의 일화를 재현했을 때였다.
이전의 나는 그 방패술을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할배가 감탄할 정도로 원본에 가까워지는 데 성공했거든.
아직 바뀌어버린 몸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걸 고려해 본다면 머잖아 방패술을 재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할배보다 더 뛰어난 방패술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후흐흫. 기대된다.
그 날이 찾아온다면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척 하면서 허접 할배라고 불러 봐야지. 분명 재밌을 거야.
“3왕자님. 벌써 힘들어?”
“무슨 소리를! 지친 것은 오히려 그 쪽이지 않은가!”
언젠가 찾아올 미래의 일을 상상하며 웃던 날 현실로 끄집어 낸 것은 아서와 프레이의 목소리였다.
나와 칼의 대련이 끝나기 무섭게바로 대련을 시작한 두 사람은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조이에게 사정을 듣기로 내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열이 올랐다는 모양.
잘은 모르겠지만 강해지고 싶다는 의욕이 생겼다니 잘 된 일이다.
“얌전히 항복하시지!”
“질 것 같으니까 입이 바빠지네. 허접해.”
…강해지고자 하는 의욕이 생긴 거 맞겠지?
대련하는 것만 보면 그냥 서로를 조지고 싶다는 마음밖에 안 느껴지는데.
“정말. 아직 아이 같은 분들이라니까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조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네 말이 맞아. 조이. 저 두 사람의 모습은 애가 따로 없지.
근데 있잖아.
‘영애께서 하실 말씀은…’
“롤머리가 같은 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도 모르는 얼빵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네?”
자신의 머리가 잘못되었다는 걸 몰랐던 것일까. 눈을 끔뻑거리던 그녀는 마법으로 거울을 만들어 내 자신을 비춰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언제부터 이랬던 거죠?”
‘처음부터죠.’
“언제부터긴. 얼빵 영애가 방에서 나왔을 때부터 계속 그랬지. 당연한 거 아냐?”
내 답을 들은 조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더니 잠시 정돈을 하고 오겠다며 다급히 대련실을 빠져나갔다.
저게 그렇게 창피한 일인가? 난 귀여워서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아가씨.”
내가 혼자 남겨지기 무섭게 칼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왜요?’
“뭔데?”
“던전학 교수님께서 전해달란 말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던전학 교수? 그 분이 나를 찾을 이유가 있나?
도저히 짐작 가는 부분이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칼이 말을 이었다.
“기말고사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자세히 들은 것은 아닙니다만 아가씨께 기말고사 던전의 설계를 맡겨보고 싶어하시는 듯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