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4
던전학 교수 제슬은 루시에게 던전 작성을 위한 여러 물품을 내어 준 순간부터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루시가 어떤 던전을 가지고 오더라도. 설령 처음 던전을 만들어보는 사람치고 괜찮은 것을 내놓더라도. 최선을 다해 루시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평소의 수모를 되갚아 주겠다고.
루시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한들 어디까지나 학생이다.
실전에서 던전을 공략해 본 경험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던전을 구상한 적조차 없는 그녀가 던전을 잘 만들어봐야 얼마나 잘 만들겠는가.
분명 여러 결점들이 존재할 터이니 제슬은 그걸 하나하나 지적하며 점차 쭈그러드는 루시의 모습을 감상하기만 하면 되겠지.
진짜 기대된다. 일단 중요한 건 아무리 지적할 부분이 많아도 모든 걸 지적해선 안 된다는 거야.
일단 눈에 띄는 큰 거만 언급을 해야 해.
내가 문제를 지적하면 분명 반박을 하겠지?
그럼 그 반박을 내 지식으로 박살내고 입을 꾹 다물게 만드는 거야.
그리고 나서 어깨를 늘어트린 채 입을 꾹 다문 건방진 꼬맹이한테 관대한 척 하면서 이런저런 걸 알려주는 거지.
그럼 며칠 안 가서 다시 수정을 해 올 테고 그 때 또 다른 문제점을 지적해주고.
이걸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시간이 촉박하니 어쩔 수 없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겠다 그러면.
그 때 루시 알른 그 빌어먹을 꼬맹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흐아아. 상상만 해도 여태까지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야.
“저어. 제슬 교수님. 알른 영애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오…”
그녀의 조교수는 루시 알른은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며 제슬을 만류했지만 제슬은 그 이야기에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체 몇 번을 말해줘야 해? 그건 정당한 절차에 따라 진행 된 퇴거조치였다니까?”
평민 출신의 멍청이들이 귀족을 건드린 사건이다.
자칫 잘못하면 몇 사람의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대사건이었단 말이다.
루시 알른이 선처를 해주어서 조용히 처리가 된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카데미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살벌해졌으리라.
“그리고 말야. 오히려 그 사건 때문에 마음 편히 이럴 수 있는 거야.”
만약 루시가 소문 그대로의 인간이었더라면 그 사건을 가볍게 넘겼을까?
그럴 리가.
있는 패악질 없는 패악질을 다 부려가며 가해자에게 가혹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카데미의 책임자를 무릎 꿇게 만들었겠지.
최근 그녀가 파트란 영애와 3왕자 저하와 친밀하게 지낸단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했을 테고.
하지만 루시는 그러지 않았다.
가해자를 내쫓는 것으로 만족하고 입을 다물었다.
“알른 영애는 분명 시건방진 빌어먹을 꼬맹이지만 소문 같은 망나니는 아냐.”
정당한 수단으로 모욕을 준다면 루시 알른은 분노하여 그 치욕을 되갚아 주기 위해 노력할 터이지만 자신을 잡아 죽이려 들진 않을 것이다.
제슬은 이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제발 던전 연구만 하지 말고 바깥 좀 돌아다니렴. 네가 그런 소리를 할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답답한 줄 아니?”
그래서 자신의 조교수가 겁에 질려 있는 게 너무도 답답했다. 연구자로써는 괜찮은 아이인데 왜 이렇게 현실을 모르는 건지.
“그치만요.”
“애초에 말이야. 알른 영애가 소문처럼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면 성녀님께서 알른 영애를 아끼겠니?”
“…어. 그것도 그렇네요?”
그건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한 조교수의 목소리에 제슬이 긴 한숨을 내쉰다.
“저기 교수님. 한 가지만 더 여쭤 봐도 될까요?”
“뭔데.”
“그럼 왜 이런 소문이 퍼진 걸까요?”
“여전히 알른 영애를 싫어하는 사람이 차고 넘치니까.”
안 그래도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은 다른 이들의 질투를 사기 쉬운데 루시는 뛰어난 능력을 보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동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오래 전부터 수많은 악연을 만들어 온 이가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또 다시 악연을 쌓고 있으니 루시 알른에 대한 악의 섞인 소문이 어찌 안 퍼져나갈까.
당장 제슬만 하더라도 루시에게 엿 한 번 먹여 보겠다고 이 난리를 치고 있지 않나.
“자업자득이란 거지.”
“그렇군요.”
“어쨌건 알른 영애를 상대로는 선만 안 넘으면 돼. 그럼 괜찮아.”
제슬이 자신의 조교수를 안심시킨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사무실에 나온 제슬이 이것저것을 확인하던 그 때 교수실의 문이 열리며 루시 알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엔 평소보다 추하네. 교수 나부랭이. 평생 노처녀로 살 게 아니라면 관리를 하는 게 어때? 설마 관리한 게 그 꼴은 아니지?”
“…조언 감사드립니다. 알른 영애. 그래서 이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이신지요? 벌써 던전을 완성하신 건 아닐테고 무언가 질문을 하러 오셨습니까?”
“날 네 허접한 기준에서 평가하지 말아줄래? 너 같이 우둔한 바보는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나 정도 되는 천재는 하루 만에 던전을 완성할 수 있어.”
“정말 대단하시네요. 영애.”
제슬은 하루 만에 던전의 작성을 끝마쳤다는 루시를 진심어린 웃음과 함께 칭찬했다.
처음으로 던전을 작성해보는 사람이 하루 만에 던전을 만들어냈다라.
안 봐도 뻔하지.
규격에 맞추기 위해 온갖 말도 안 되는 걸 던져넣고는 어쨌든 던전은 굴러가니까 된 거 아니냐고 그러는 걸 거야.
처음으로 마법을 써 본 꼬맹이들이 엉망진창인 마법진을 그려 놓고 어쨌든 마법이 발동됐다며 우쭐대는 것처럼.
기대가 되네. 영애의 손에 들린 저 종이에는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던전이 작성되어 있으려나.
적당히 밤중에 이불을 찰 정도로만 지적을 해야지.
“한 번 보여주시겠습니까?”
“너 같은 바보멍청이는 상상도 못할 걸작일 거야. 보고 배우도록 해. 푸흐흫. 수준이 달라서 배우는 건 무리이려나?”
평소라면 루시의 건방진 발언에 입술을 깨물었을 제슬이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엉망진창일 게 분명한 던전이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한 지금 루시가 내뱉는 발언은 곧 그녀에게 업보로 돌아갈 테니까.
일단 규격은 맞네. 시뮬레이터에 올려 봐도 이상 없이 던전이 구성되는 걸 보면 나름 신경을 쓴 모양이야.
아예 이 부분부터 틀리길 살짝 기대했는데 아쉽다.
그래도 아직 남은 게 많이 있으니까. 느긋하게 살펴보자고.
던전의 크기가 작은 대신 기믹을 넘어설 때마다 풍경이 바뀌는 형식이구나.
이럼 자원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긴 해. 던전 제작의 난이도가 높아져서 잘 안 써먹는 방식이지만.
흐음. 처음은 누구나 풀 수 있을 정도로 쉬운 퍼즐이네.
앞으로 펼쳐질 던전이 어떤 식일지 알려주는 느낌인가?
그 다음도 마찬가지. 시험을 치르기 전에 교과서를 한 번만 읽어봤어도 공략할 수 있는 수준이야.
어라? 이거 왜 정상적이지?
아니 정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잘 만들었는데?
배운 내용에 충실한데다가 던전의 구조도 멀쩡해. 심지어 학생들을 평가한다는 기준에도 맞아떨어져 있어.
미친. 처음 던전을 만들어 보는 사람이 이런 완벽한 던전을 만들어냈다고?
이게 진짜배기 천재라는 건가?!
…아냐. 아직 초반부잖아.
이 뒤편에 어떤 괴악한 게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그래. 처음에만 힘을 주고 나중에는 대충 만드는 경우도 흔하잖아. 분명 그런 걸 거야.
어떻게든 자그마한 흠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제슬이 미간을 좁히던 중.
“…응?”
물 흐르듯 움직이던 그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멈춰 섰다.
이거 특정 공격 타이밍에만 데미지를 넣을 수 있는 적 아닌가?
앞에 단서나 적의 기믹을 살펴봐도 분명 이런 종류 일 텐데 뭔가 오류가 있는 건가?
드디어 깔 거리가 생기는…
아아아! 특정 패턴에 특정 부위를 공격해야 하는 거구나!
이거 좀 까다롭네. 성급하게 움직이다가 그대로 죽기 십상이잖아.
침착하게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분명 여기서 탈락이야.
이 다음은 무력화 시켜야하는 기믹을 지닌 적인가.
앞에 단서도 충분히 주고 패턴도 알기 편하게 해주니까 이 정도야 뭐.
그리고 다음에는.
반격기?
빠르게 제압해야 하는 적 다음에 섣불리 공격하면 위험해지는 적을 넣다니.
이거 좀 악랄하지 않아?
내가 이 던전을 공략하는 1학년이었다면 분명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걸.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만들어진 던전의 모습에 제슬은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제슬은 던전이란 장소에 매력을 느껴 수많은 연구 끝에 교수 자리까지 도달한 사람이니까.
공략하는 재미가 있는 던전을 앞에 뒀는데 어찌 몰두하지 않겠는가.
“…이거 어떻게 공략하라고 만들어 둔 거야?”
제슬이 루시가 작성한 던전을 공략하고서 대략 한 시간이 지났을 즈음.
그녀의 입에서 당혹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점점 기믹이 악랄해진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건 너무 하잖아.
일정 이상의 강자라면 어렵잖게 공략할 수 있겠지만 평균적인 1학년 학생들은 아냐.
그들은 무슨 수를 써도 이걸 통과하지 못해. 시험의 문제로써는 완전히 탈락이라고.
“알른 영애. 이건.”
그리 판단을 내린 제슬이 문제를 지적하자 루시가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공략할 방법이 없어 보여?”
“…있다고요?”
“흐응~ 이 정도도 못 알아차리는 구나?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멍청하게 태어난 게 네 탓은 아니잖아?”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 제슬은 다시금 던전을 노려보았다.
루시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무섭게 노려봐도 모르지 않아? 그냥 알른 영애님~ 제가 영애보다 한참 수준이 떨어지는 멍청이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라고 빌기만 해. 그럼 착한 내가 알려줄 테니까.”
“…괜찮습니다. 영애. 제가 알아서 하도록 하죠.”
“맘대로 해 봐. 그래봐야 네 자존심만 박살날 텐데 뭐.”
루시가 어느새 출근한 조교수에게 차를 타오라 명령하는 것을 흘려들으며 제슬은 고민을 거듭했다.
강함과 상관없이 적을 쓰러트릴 방법이 있다고?
어디에?
어떻게?
여태까지 주어진 수많은 단서를 가지고 생각을 해봐도 답이 안 나와.
진짜 있기는 한 건가?
그냥 영애가 날 가지고 놀기 위해 헛소리를 한 거 아닐까?
아니면 영애 본인조차 생각하지 못한 오류가 있을 수도 있어.
일단 한 번 확인을 시키자. 이게 맞는지 확인을 시켜 본 다음에…
어? 잠시만.
혹시 이건가?
무한히 반복되는 던전이라는 걸 단순한 기믹으로 사용한 게 아니라 이 자체가 단서였다고?!
“미친.”
그렇게 던전의 끝을 맞이했을 때.
제슬은 헛웃음과 함께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봤다.
하아. 젠장.
어떻게는 알른 영애를 깎아내려고 낸 과제인데. 왜 내 마음 속 질투심이 깎여 사라지고 그 자리에 탄복이란 감정이 채워지는 건지.
“영애.”
“왜? 너무 어렵다고?”
“아뇨. 마지막에 덧붙인 걸 확인했습니다. 기회가 무한하다면 난이도는 문제없죠.”
여러 자잘한 문제가 생겨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제슬이 알아서 할 문제다.
그녀는 이미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던전을 기말시험의 문제로 내고 말겠노라 결정을 내렸으니까.
“다만 몇몇 적의 패턴이나 움직임에 대해 논의를 나누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논의라니?”
“간단히 말해서. 던전의 완성도를 더 끌어올리자는 거죠.”
조금 건드리면 더 빛날 수 있는 보석이 있는데 세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제슬이 진득한 웃음과 함께 그리 이야기를 하자 루시가 살짝 눈썹을 치켜떴다가 이내 함께 웃음을 지었다.
“이런 괜찮은 말도 할 줄 알았구나. 단순한 멍청이인줄 알았는데.”
“하하. 그래도 제가 여기에 바친 세월이 있는데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지는 제슬과 루시의 논의를 옆에서 구경하던 조교수는 저 시험을 치를 아카데미 1학년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저 더러운 시험을 채점할 자신의 명복도 함께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