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구 외곽에 위치한 제임스 타워.
한때 협회 인형들과의 전쟁 최전선에서 수많은 사람의 피난처 역할을 했던 이곳은 이제 점차 평화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타워 주변으로는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제임스 연구소의 직원들은 외벽 근처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널브러진 인형 잔해들을 치웠다.
그리고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마구 박살 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주변으로 가림막을 설치하고 복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번 협회 인형 사태 이탈자는…, 한 명인가. 다행이군.’
제임스는 협회 인형 사태 관련 보고서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오브젝트 탄환으로도 부서지지 않는 인형들이 들이닥치는 등 상당히 위험한 순간이 많았지만,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제임스의 머릿속에 문득 전 보안 팀장 알렉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유일한 이탈자인 그는 얼마 전 미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인형을 포장한 채, 정말 슬픈 얼굴로 귀국길에 올랐었지. 하지만 신기하게도 정신 오염은 없었어.’
제임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미국 오브젝트 협회에 보낼 보고서 맨 뒤에 알렉스에 관한 서류를 첨부했다.
알렉스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서, 다시 보안 팀장으로 복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름: 알렉스>
<성별: 남>
<증상: 알렉스는 특정 인형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음. 정신 오염의 영향인지, 실제 인간관계보다 인형과의 관계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등 현실 검증력이 현저히 저하된 모습을 보임.>
<대응 계획: 알렉스의 집착증세는 정신 오염에 취약해질 수 있으니, 집중적인 정신 치료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정신 오염 오브젝트와 크게 접점이 없는 보직으로 변경 후, 장기적인 인지행동치료가 필요함.>
<비고 : 정신 오염 징후가 보이지 않으니, 대 오브젝트 치료법은 필요 없을 것으로 예상됨.>
보고서를 덮고 창문 밖을 내다보자, 사람들이 공터에 모여서 황금 사신들과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황금 사신에게 볼을 들이밀며, ‘때찌’ 해달라는 사람들과 곤란한 표정의 황금 사신들이었다.
‘저 현상은 정신 오염 때문일까, 아니면 귀여운 것을 본 정상적인 반응일까.’
제임스가 황금 사신을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더니, 무언가가 제임스의 귓불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빨리 엄마 선물을 만들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회색 사신의 전령, 황금 사신이었다.
“그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곧 제작에 착수할 테니까.”
제임스는 황금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황금 사신의 입에 보라색의 새콤한 사탕을 물려주었다.
제임스는 행복한 것처럼 사탕을 먹는 황금 사신을 잠깐 바라보더니, 마지막 남은 보고서를 펼쳤다.
<비밀 연구소 탈출 오브젝트의 추적 보고서>
그 보고서의 조사 결과는 탈출한 거의 모든 오브젝트가 황금 사신에게 사살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메이커의 탈출에는 다른 오브젝트와 달리, 외부의 조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하나, 행방을 알 수 없는 ‘메이커’를 제외하고.
***
미니 사신 정원 하늘에 한 줄기 황금빛이 흔적을 남기며 하늘을 갈랐다.
뚜방뚜방
나는 그 황금색 궤적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물속에 천천히 퍼지는 잉크처럼 서서히 사라지는 궤적을 쫓아가다 보니, 황금 사신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엄마다!’
‘엄마!’
내가 온 것을 눈치챘는지, 모스 볼처럼 모여서 뒹굴뒹굴하는 황금 사신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도대체 뭘 하면 이런 덩어리가 만들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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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부딪치면 이런 식으로 엉키던데, 이렇게까지 크게 뭉친 것은 처음 발견했다.
농구공만 한 황금 사신 덩어리를 들어 올리자, 황금 사신들은 재미있다는 것처럼 히히 웃었다.
스스로는 해체되기 힘들 것 같아서, 황금 사신 덩어리에 삐져나온 팔다리를 하나씩 잡아서 끄집어냈다.
하나, 둘, 황금 사신을 뽑아내서 바닥에 내려놓자, 그 황금 사신은 폭신한 마시멜로 바닥에서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데굴데굴!’
또 이상한 유행이 퍼지고 있나 보네.
이번에는 무작정 구르는 건가.
나는 마지막 남은 황금 사신을 붙잡아서, 도대체 누가 먼저 시작한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황금 사신은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갸웃거리더니,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엄마!’
아….
그러고 보니 내가 평소에 마시멜로 평원에서 자주 굴러다니긴 했는데, 그걸 보고 배운 건가?
최근에는 안뜰의 마시멜로와 정원의 마시멜로를 번갈아 가면서 데굴데굴 왔다 갔다 했는데, 그것 때문일 수도 있겠지.
애들 교육에 좋은지 안 좋은지 알 수 없는 미묘한 현상이었다.
딱히 굴러도 나쁠 건 없겠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도 바닥에 누워서 황금 사신들이랑 같이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데굴데굴!
음.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은데, 별일 아니겠지.
나는 품 안에 황금 사신들을 잔뜩 안고, 말랑한 마시멜로 정원을 마구 굴러다녔다.
***
미니 사신 정원, 하얀 아귀 서식지.
하얀 아귀들로 가득했던 평원은 침략자 붉은 사신들과 금발소녀, 그리고 검은 요원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하얀 아귀가 통 보이질 않네.’
금발소녀는 검은 요원과 티타임을 즐기며, 마시멜로 평원에서 놀고 있는 붉은 사신들을 내려다보았다.
가장 작은 크기의 붉은 사신이 해맑게 웃으며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붉게 타오르는 망치와 낫.
그리고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의지.
‘혁명!’
그러자 주변에 잔뜩 모여든 다른 붉은 사신들이 그 모습을 따라 했다.
‘혁명!’
마치 막내 동생이 같이 놀자고해서, 놀아주는 언니들 같은 모습이었다.
금발소녀는 그 모습을 보며, 뇌리에 자리 잡은 단 하나의 의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는 어떻게 낫과 망치, 그리고 혁명을 알고 있을까.
사실 회색 사신은 TV를 굉장히 자주, 오랜 시간 동안 보곤 했으니, 알게 되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즉, 회색 사신은 ‘언어’를 이해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TV를 그렇게 자주 보는 시점에서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긴 했다.
오히려 한국 내에서 ‘회색 사신은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라는 의견이 대세인 점이 이상했다.
그렇게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금발소녀의 곁으로 붉은 사신이 다가와서 뺨을 콕콕 찔렀다.
고개를 돌려보자, 약간 시무룩한 표정의 붉은 사신이 보였다.
설마 자매들이 놀아주는 게 귀찮아지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고개를 돌려보니, 모두 곤란한 표정으로 붉은 사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아귀 안 보여. 없어졌어.’
최근에는 계속 붉은 자매 사신들이랑만 놀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하얀 아귀랑 놀고 싶어졌는지, 붉은 사신은 아귀를 찾고 있었다.
붉은 사신이 전달한 의지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시멜로 평원을 둘러보았지만, 하얀 아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매들이 합류한 뒤로 붉은 사신 500배가 되어서 잔뜩 사냥당하고, 태워져서 멸종했나 싶기도 했지만.
하얀 아귀는 무한히 재생하는 오브젝트.
평범한 동물처럼 멸종할 리가 없었다.
“그래, 같이 찾아보자.”
금발소녀가 그렇게 말하자, 붉은 사신은 히히 웃으며 소녀의 정수리 위에 앉았다.
‘출발!’
붉은 사신의 활기찬 의지와 함께 금발소녀와 붉은 자매 사신들이 마시멜로 평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마시멜로 평원에서는 하얀 아귀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마시멜로 평원 말고도 설원이나 사막 등등의 장소를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소속 오브젝트에게 평온함을 주는 정원 밖으로 나갔을 것 같지는 않은데….
금발소녀는 고개를 돌려서, 붉은 자매 사신들이 잔뜩 달라붙은 검은 요원에게 물었다.
“아저씨도 하얀 아귀가 안 보이죠?”
“제가 봐도 보이질 않습니다.”
금발소녀는 검은 요원이 대답하는 동안, 자매 사신들을 검은 요원에게서 마구 털어내었다.
하지만 금발소녀가 시선을 돌리기 무섭게 몰래몰래 달라붙곤 했다.
“그럼 아예 다른 시선을 빌려보는 게 어떨까요?”
“다른 시선?”
검은 요원은 금발소녀의 물음에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상냥한 표정으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주황 사신이 있었다.
“주황 사신이라….”
금발소녀는 살짝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주황 사신을 불러서 하얀 아귀를 본 적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상냥한 표정의 주황 사신은 장난꾸러기처럼 히히 웃더니, 소곤소곤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사탕 산맥과 마시멜로 평원 사이에 숨어 있어.’
주황 사신의 인도를 따라 마시멜로 평원을 나아갔지만, 사탕 산맥의 근처에 와서도 하얀 아귀는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황 사신이 속인 건가?
이런 생각이 들 때쯤, 검은 요원의 감탄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찾았습니다. 하얀 아귀들이 착시를 이용했군요.”
검은 요원이 가리키는 곳에는 마치 사탕 산맥처럼 꾸며진 마시멜로의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일일이 뒤지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미니 사신 정원의 넓이와 착시를 이용한 비밀 장소였다.
금발소녀가 벽 근처에 다가가서 벽 너머를 바라보자, 수많은 하얀 아귀들의 모습이 보였다.
성벽 안쪽은 생각보다 굉장히 넓었고, 햇볕을 쬐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얀 아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따사로운 성벽 안쪽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찰나의 평화를 만끽하던 하얀 아귀들은 다시금 억울한 울음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뀨힝힝.
***
한때, 오브젝트 협회가 자리 잡았던 건물은 현재 다른 이름을 가진 단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브젝트 안전 관리 협의회.]
오브젝트 협회에서 연구 개발 부서를 잘라내 버리고, 오브젝트 규제 협의 기능만을 극대화한 조직이었다.
그 안전 관리 협의회 깊숙한 곳에서 한 중년의 남자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좋군. 좋아.”
오브젝트 협회 이사 시절, 직원들에게 ‘황금충’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던 것과 굉장히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그는 오무룡이 은닉했던 수많은 비밀 자금과 비밀 연구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 양은 황금철이 예상하던 양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많았다.
그는 서류를 넘기면서 빠른 속도로 분류하고 있었다.
현금성이 있는 자산은 오른쪽에, 나머지는 왼쪽에.
당연히 협회에서 하던 수많은 연구는 당연히 왼쪽으로 처박히고 있었다.
그런 황금철을 보며, 그의 심복인 비서실장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뭐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의장님. 이 오브젝트도 그냥 파기하는 겁니까?”
비서실장이 꺼내든 서류에는 오무룡의 무너진 저택에서 발견된 두 개의 램프가 찍혀있었다.
“하아.”
황금철은 그렇게 깊게 한숨을 푹 내쉬더니, 비서실장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그게 돈이 될까?”
“네? 그래도 영생을 이룬다는 ‘진화액’이나 획기적인 발명품인 ‘협회 인형’ 관련 오브젝트인데요?”
황금철은 황금으로 장식된 지팡이를 들어 올리더니, 비서실장의 머리를 약하게 툭툭 두들기기 시작했다.
“오무룡, 그 양반도 돈 잘 벌다가 패가망신한 게 뭐지?”
“램프요.”
“제3 연구소장도 승승장구하다가 뭐로 망했지?”
“래… 램프요.”
“그래, 램프야. 정확히는 오브젝트.”
한심한 사람을 보는 표정을 지은 황금철은 지팡이로 명패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의장으로 있는 단체명이 뭐지?”
“오브젝트 안전 관리 협의회입니다.”
“그래, 그거야. 오브젝트로 제대로 돈을 벌려면, 오브젝트를 직접 건드려선 안 돼. 오브젝트로 돈을 버는 녀석에게서 뜯어내야지.”
황금철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오브젝트에 직접 손을 대면 오무룡 꼴 나는 거야.’라고, 작게 덧붙였다.
“그러면 이 램프들은 어떻게 할까요?”
“아, 그거. 그 뭐냐. 유일하게 ‘특급’ 오브젝트를 보관하는 연구소 있지? 거기로 보내버려. 알아서 해결하겠지, 뭐.”
그렇게 말하더니, 황금철은 다시 돈 되는 서류를 분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