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5
던전학 교수와의 대담은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던전에 관한 지식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건 게임의 유저로써의 지식이다. 게임을 만드는 사람으로써의 지식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든 던전에는 디테일 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여럿 존재했다.
예를 들어서 난 던전을 제작할 때에 몬스터 패턴을 대략적으로 집어넣었다.
컨셉을 잡고 거기에 걸맞는 전투 스타일을 쓰는 식으로.
이래도 크게 문제는 없다. 어쨌든 몬스터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자체는 지정되어 있으니까.
다만 완벽하지는 못하다.
정해진 움직임만을 반복하는 몬스터는 인형과 다름없으니. 처음 볼 때는 그렇다 쳐도 적에게 익숙해지고 나면 살아있는 적을 상대한단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던전학 교수가 제시한 해답은 이러했다.
‘전투학 쪽 교수의 협력을 받아 움직임을 녹화한 후 그걸 그대로 적용시키면 돼요.’
모든 전투 논리를 일일이 작성하게 되면 시간은 시간대로 들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정작 결과물 자체는 그리 좋지 못할 수 있다.
허나 전투학 교수의 움직임을 녹화해 그걸 그대로 적용시키면 별 고생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적을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하다.
‘원래는 전투학 교수님들도 이 시기에는 바빠서 협력을 구하는 게 어려워요. 그치만 영애께는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나는 던전학 교수에게 루카와 칼을 보내 주기로 약속했다.
어느 쪽이건 써먹고 싶은 만큼 써먹으라는 말과 함께.
이것 말고도 디테일적인 측면에서 배움을 받은 게 바로 던전 안에 사용되는 여러 마법에 대한 것이었다.
‘인공 던전에는 던전 특유의 불길한 분위기가 존재하지 않아요. 악신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라서 그렇죠.’
무거운 마력. 답답한 공기. 이상할 정도로 크게 들리는 소리. 무엇인가가 쫓아오는 듯한 불길함 등.
던전을 만드는 이들은 이러한 요소의 부재에 관해 오랫동안 고민을 해왔고 결국 마법으로 던전 특유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원래는 이런 요소를 생각해서 리소스를 남겨두는 게 정석이지만 이번은 처음이시니까요. 제가 리소스를 더 추가할 수 있도록 할게요.’
‘…잠시만. 개허접 아카데미의 기술력으로 혹시 이런 것도 추가할 수 있어?’
‘그거 좋네요. 가능할거에요. 안 되도 가능하게 만들도록 하죠.’
이외에도 던전학 교수는 내게 여러 디테일 적인 부분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고 난 그 조언을 기반으로 새로운 기믹을 추가했다.
아 물론 단순히 던전학 교수에게 배움만을 얻은 것은 아니다.
여러 디테일적인 부분은 내가 몰랐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던전의 기틀이 되는 여러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것이 더 많았거든.
그래서 던전학 교수에게 이런저런 걸 알려줬지.
공략하는 입장에서 욕 나오는 함정을 만드는 법이라거나.
좆같단 소리가 절로 나오는 기믹에 대한 거라거나.
개같은 난이도임에도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도록 만드는 법이라거나.
하도 이야기 할 부분이 많아서 던전학 교수의 수업이 휴강이 되고. 내가 들을 여러 수업을 던전학 교수 협력 하에 자체 휴강하게 되었지만 그런 사소한 게 무어가 문제겠는가.
중요한 것 오롯이 하나! 내가 만들어낸 던전이 한층 더 완벽해졌다는 거지!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것들이 추가되다 보니 정해진 용량을 한참 초과하게 됐지만 던전학 교수가 다른 교수들 뒤통수를 후려쳐서라도 던전을 완성하겠다고 그랬으니 괜찮을 거다.
아마도.
그 모든 논의를 끝마치고서 저녁식사를 하러 온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래서 공통의 취미를 가진 사람이 좋은 거구나.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던전학 교수나 할까.
내가 만든 던전으로 학생들을 괴롭히는 건 무척 즐거울 것 같은데.
만약 애들이 더러워서 못 하겠다고 그러면 메스가키 스킬로 도발해서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면 돼.
‘드러눕는 것밖에 못하는 개허접 꼬맹이들♡ 이 정도도 못 하는 거야?♡ 하아♡ 어쩔 수 없지♡ 교수님~ 저희는 아직 엄마 품에서 못 벗어난 개허접 꼬맹이들입니다~ 제발 난이도를 낮춰주세요~ 라고 울면서 빌면 한 번 완화를 생각해볼게♡’
같은 말을 해주면 알아서 발악을 해주겠지.
교수를 하면 귀찮은 일이 여럿 생긴다고?
괜찮아. 그런 건 조교들한테 다 떠넘기면 돼.
원래 교수라면 다들 그러는 거잖아?
…장난삼아 한 말인데 진짜 재밌을 것 같네. 언젠가 모든 게 끝나면 시도나 해볼까.
“루시 알른.”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콧노래를 부르던 중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언제 온 건지 모를 아서가 날 따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3왕자님?’
“왜 그렇게 노려보시는 건가요. 불쌍왕자님. 귀엽고 예쁜 저를 눈에 새기고 싶은 건 이해하겠지만. 좀 변태 같아서 깨네요.”
“…그. 그런 의도로 노려본 것이 아니다!”
살짝 눈웃음을 지어주었을 뿐인데 아서가 얼굴을 붉히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둘에게로 향했고 그 수많은 시선에 당황한 아서의 얼굴이 재차 벌게지더니 재빠르게 자리에 착석했다.
지금도 그렇고 프레이한테 놀아날 때도 그렇고 아서 얘 너무 도발에 쉽게 당한다니까. 게임 속에 있을 땐 좀 더 쿨한 캐릭터였었는데.
뭐. 내 입장에선 이 쪽이 더 재밌어서 좋지만.
“3왕자님. 혹시 몰래 술이라도 드셨나요? 얼굴이 엄청 빨갛네요.”
입술을 우물거리는 아서를 가만 보고 있으려니 다른 곳에서 영애들과 함께 식사하던 조이가 이 쪽에 합류했다.
영애들이 걱정스러운 듯 이 쪽을 살피는 걸 보면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온 걸까.
“…시끄럽다. 조이.”
“방금 전 3왕자님보다는.”
“조이.”
“죄송합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뵙네요. 알른 영애. 오늘 던전학 교수님한테 붙잡혀 계셨다면서요?”
‘어떻게 아세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얼빵 영애. 설마 스토킹? 내가 아무리 좋다지만 그건 좀.”
“그런 거 안 했어요. 그냥 영애께서 결석을 하셨기에 교수님께 여쭤본 거 뿐이랍니다.”
워낙 이런저런 사건사고에 자주 휘말리는 분이라 걱정했단 조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웃음이 지어졌다.
하. 진짜. 이래서 조이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프흐흫. 공작가문의 영애가 분리불안이라니. 그랬구나~ 내가 없어서 마음 고생이 심했구나~ 어떻게 위로해줄까? 안아줄까? 우쭈쭈해줄까?”
“…제가 다신 걱정하나봐요!”
아서와 조이 두 사람의 얼굴이 공평하게 벌게졌을 즈음 프레이가 조용하게 내 왼 쪽 자리에 착석했고.
그 뒤를 잇듯이 페이비가 모습을 드러내선 자연스럽게 내 오른쪽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평소 모이던 멤버가 한 자리에 집결하고 나서야 아서가 침착을 되찾은 듯 긴 한숨을 내뱉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루시 알른. 내가 묻고자 한 것은 대체 무슨 마경을 만들어냈는가에 대한 것이다.”
‘네? 그게 무슨.’
“그건 무슨 헛소리이신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되묻자 여유를 찾은 아서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단순한 추론이다. 교수실에서 길고 긴 이야기를 끝마친 그대가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면 그 이유는 하나 뿐이지 않겠나. 그대 스스로 만족할 만한 던전을 만들어낸 거겠지. 그리고 자네 같은 괴인이 만족할 만한 던전이라는 것은 분명 마경일 터이고.”
…그렇게 티가 날 정도로 내 얼굴이 녹아내려 있었나.
아서의 추론은 일부 옳다. 지금 내 행복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훌륭한 던전을 만들어냈단 만족이니까.
그렇지만 한 가지 틀린 점이 있어!
‘마경은 아니에요! 마경은!’
“마경이라뇨. 그래서야 제가 다른 허접들을 괴롭히고 싶어 안달난 사람인 것 같잖아요. 전혀 그렇지 않답니다. 착하디 착한 전 어떤 개허접이라도 공략할 수 있는 던전을 만들었다고요.”
난 당당하게 결백을 주장했지만 날 의심하는 시선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니 진짜 억울하네!
온갖 트롤 던전에 고생했던 내가 괴악한 곳을 만들어낼 리가 없잖아!
당연히 어떤 학생이라도 공략할 수 있도록 만들어 뒀다고!
애초에 말야! 그런 지옥 같은 장소였다면 던전학 교수가 알아서 반려했겠지! 안 그래?!
이런 내 말에 반박한 것은 조이였다.
“알른 영애. 당신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제슬 교수님께선 이전부터 기준이 높기로 유명하신 분이랍니다. 과거 실제로 공략률 0%의 던전을 만드신 적도 있고요.”
…
그 교수가 낸 문제가 어려웠다고?
진짜?
1학년 수준에 맞춰서 배려한 게 여기저기서 느껴졌는데 그게 어려운 거였단 말야?!
학생들 수준을 높게 보았단 걸 깨달은 내가 입술을 닫자 조이와 아서가 한 사람인 것마냥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망했군.”
“이러다 던전학 기말고사에서 전원 낙제하는 거 아닐까요.”
“전원은 아니지. 눈 앞의 이 녀석이 있으니.”
“…그렇네요. 알른 영애와 함께 들어갈 수만 있다면!”
‘저기. 죄송하지만…’
“하. 진짜 자존심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바보들이네. 그런 게 될 리가 없잖아? 난 시험 안 쳐.”
“지옥을 만들어두고 홀로 도주하는 건가!”
“정말 사악하시네요. 알른 영애.”
이게 내가 욕먹을 일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던전을 제작한 사람이 파티원을 데리고 시험을 치르면 부정행위잖아! 당연히 안 되지!
“…저기. 3왕자님. 조이. 두 분 다 너무 영애님을 몰아붙이시는 것 같은.”
“성녀님. 이 녀석에겐 이 정도로 해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저희 기말고사가 지옥이 될 테니.”
“맞아요. 페이비. 조금이라도 더 난이도를 낮추지 않으면 대체 몇 명의 사람이 절망에 빠질지 모른다고요.”
어떻게든 날 변호하려 했던 페이비였지만 아서와 조이의 주장에 차마 반박할 수 없었는지 얌전히 물러섰다.
…어. 음. 내가 조금 난이도를 높게 설정한 거 같긴 한데.
‘저기요. 그게 있죠…’
“푸하핳. 어떻게든 던전을 쉽게 만들고 싶은가 보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이미 그건 내 손을 떠나버렸는데~”
이미 던전학 교수가 완성본을 들고가 버려서 바꾸고 싶어도 못 바꿀 걸?
솔직히 말해서 나도 딱히 바꾸고 싶진 않아. 그건 건드릴 부분 하나 없는 완벽한 던전이니까.
“벌써 모든 걸 끝냈다고요? 하루만에?”
“이런 부분에서 천재성을 발휘하지 말란 말이다! 루시 알른!”
“위대한 아르마디시여. 어찌 하여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조이랑 아서는 그렇다 치고 페이비마저 좌절해서 두 손을 모으는 걸 본 난 식은땀을 흘리며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 그. 괜찮을거에요!…’
“안심 해. 너희 같은 허접들을 위해 기말고사 내내 도전할 수 있게 해뒀으니까.”
“…무한히 도전할 수 있다고? 미친. 기말고사 내내 도전해도 공략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수준이란 건가!”
“그 뿐만이 아닙니다. 3왕자님. 이건 학생들끼리 공략법을 공유해도 의미 없는 수준의 난이도라는 거에요.”
‘그. 그리고 낙제 같은 것도 걱정 안 해도!…’
“그리고 있잖아. 그 바보 교수가 1학년 개허접들의 수준을 생각해서 공략에 실패해도 점수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고 그랬어. 1학년 수준이 아무리 허접해도 전원이 낙제하진 않을 걸?”
“애초에 끝까지 공략하는 걸 상정조차 하지 않았단 건가.”
“…지옥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느낌이네요.”
“응. 나 정했어. 그냥 1학년 한 번 더할래.”
왜. 왜 이렇게 된 거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말을 꺼낼 때마다 왜 테이블의 분위기가 무거워지기만 하는 거냐고!
평소 무감정한 프레이마저 한 소리를 더하는 모습에 주변 눈치를 살피고 있던 중 페이비가 슬며시 손을 치켜들었다.
“저 영애님.”
‘또 뭐죠?!’
“뭔데. 허접 성녀.”
“그렇게 어려운 곳이라면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무슨 보상 같은 게 주어지나요?”
…아.
아!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던전의 마지막은 당연히 고생에 걸맞는 보상이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공략 동기가 부족해진다고!
나나 던전학 교수나 던전 공략 자체에 보람을 느끼는 인간이라 간과하고 있었어!
지금이라도 눈치 채서 다행이다. 내일 던전학 교수한테 논의하러 가야겠네.
“보상조차 생각하지 않은 거냐.”
“그냥 낙제만 피하고 다른데서 점수를 채울까요.”
“그거 괜찮군. 의미 없는 곳에서 죽어라 고생할 바에야.”
‘아악! 그러지 마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패싱하지 말라고요!’
“우와. 겁나서 도망치는 거야? 자존심도 없는 개허접들이구나?”
“그래. 겁난다. 겁나서 못 하겠다.”
“거기에 모든 걸 바쳤다가 다른 시험을 망치면 1학년을 한 번 더 해야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포기하는 쪽이 낫죠.”
안 돼애애애! 던전의 난이도를 잘못 책정한 게 사실이라면 너네 이외에 그 누구도 던전을 공략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포기 하지 마! 제발!
죽어라고 고민해서 만든 곳인데 아무도 공략하지 못하면 너무 마음 아플 것 같단 말이야!
‘보상! 보상 드릴게요! 던전 끝까지 공략하시면 원하는 거 뭐든 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공략해줘요!’
“보상이 그렇게 중요해? 속물들 같으니. 좋아. 던전 끝까지 공략하면 내가 뭐든 해줄게. 물론 너희같은 개허접들이 끝까지 도달할 리는 없지만.”
내가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소란스럽던 테이블에 정적이 감돌았다.
“…뭐든?”
“뭐든이요?”
“영애님. 방금 뭐든이라고.”
“루시. 뭐든이라 그랬어.”
아서. 조이. 페이비. 프레이.
방금 전까지 절망을 호소하던 이 네 사람이 얼굴을 굳힌 채 따가운 시선으로 날 노려본다.
그제야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은 나였지만 내뱉은 말을 돌이킬 순 없었다.
농담이라는 말을 던지면 그대로 칼에 찔릴 것처럼 날카로운 분위기였으니까.
‘네. 네에. 맞아요.’
“쿡. 발악해봐. 방금 전까지 못하겠다고 질질짜던 개허접들이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시선의 압박에 패한 내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네 사람이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더니 하나라도 된 것마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나는 가만 네 사람의 등을 바라보면서 눈을 끔뻑였다.
…어.
뭔가 큰 일 난 것 같은데.
아니겠지?
괜찮겠지?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 저 네 사람이 나쁜 일을 할 리가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치?
<퍽도 괜찮겠다.>
‘이럴 땐 그냥 괜찮을 거라고 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