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6
소울 아카데미의 개인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솔라딘 왕국의 3왕자이자 현 소울 아카데미의 명실상부한 2인자임이 분명한 남자 아서 솔라딘이었다.
“다들 알겠지만 우리가 이 곳에 모인 이유는 하나다. 바로 루시 알른이 제작한 던전을 공략하는 것.”
파트란 공작 가문의 영애이자 파트란의 피를 이어 뛰어난 대마법사가 될 것이라 기대 받는 조이 파트란.
검술 명가 켄트 가문의 장녀이자 루시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세대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 평받던 프레이 켄트.
그리고 주신 교회의 성녀이자 압도적인 신성마법의 실력을 지녀 뭇 사제와 주교들도 존경을 표한다는 페이비까지.
현 소울 아카데미 1학년 중 루시를 제외한다면 최고라 불릴 법한 이들이고. 어지간한 던전은 가뿐하게 넘어설 수 있을 실력을 지닌 이들이지만. 이 네 사람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방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이 바로 루시 알른이 만들어낸 던전이기에.
“그 녀석이 우리를 도발한 걸로 보아 루시 알른은 분명 그 던전을 제작하는 데에 상당히 공을 들였을 것이다. 그러니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공략에 임해선 던전의 끝을 볼 수 없을 터. 미리 철저한 준비를 하는 것으로 우리는 반드시 던전의 끝을 볼 것이다.”
“예. 물론입니다. 3왕자님.”
“응. 최선을 다할 거야.”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봐야죠.”
네 사람이 서로 간에 진중한 시선을 나누던 그 때에 테이블 한 쪽에 앉아 있던 파트란 가문의 공자. 제프 파트란이 눈을 끔뻑거리다가 슬며시 목소리를 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제가 아직 아무런 이야기도 못 들어서 말입니다. 왜 이리 분위기가 비장한 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학생이 자기 과목만을 듣는다 생각하는 교수들이 내어 준 수많은 과제를 처리하다가 조이에게 끌려 온 제프는 어리벙벙한 상태였다.
소중한 여동생이 잠시 따라와 달라기에 하던 과제를 내팽개치고 왔더니 그 곳에 3왕자. 성녀. 켄트 가문의 영애 같은 거물들이 포진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당혹 속에서도 어찌저찌 평정을 가장하며 자리에 착석했더니 이번엔 그가 조금도 듣지 못한 내용을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했으니.
처세술에 능한 제프라 할지라도 이 상황 앞에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이. 아무런 설명도 안 하고 데려온 건가?”
“…최대한 빨리 데려오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하아. 얼빵 영애.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얼빵이란 호칭을 벗기는커녕 루시 알른 뿐 아니라 세상 모두가 그대를 얼빵이라 부르게 될 거다.”
“오라버니께서 워낙 친절하시기에 실수를 한 것 뿐입니다. 제가 언제나 이런 결례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아주세요. 쑥맥 왕자님.”
“누가 쑥맥이라는 거냐!”
“얼굴을 붉히고 도망치는 풋풋함이 있는데 어찌 쑥맥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는 네 녀석은 자기 머리카락이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도 모르던 얼빵이잖은가!”
“…그거 알고 계셨는데 말씀 안 해주신 거였어요?!”
왕자와 공녀라는 지위도 잊은 채 갸아악거리며 목소리를 높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제프가 쓴웃음을 짓던 그 때에.
옆에 앉아 있던 페이비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목소리를 냈다.
“실례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제프 공자님.”
“아뇨. 보고 있으면 재밌으니까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일단 저 소란이 끝날 때까지 제가 대략적으로나마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던전학 교수가 루시에게 낸 제안과 그를 받아들인 루시가 던전을 제작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제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히려 잘 된 거 아닙니까? 아무리 알른 영애라 할 지라도 처음부터 던전 제작을 잘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괴악한 던전을 만들기로 유명한 제슬 교수가 제작을 전담하는 것보다야 중간에 루시가 끼어드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제프의 말에 페이비가 쓴웃음을 지은 것은 물론이고 아서와 조이마저 말싸움을 멈추고 보란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제프. 그 제슬 교수가 루시 알른이 만들어낸 던전을 보고서 자신의 수업마저 휴강으로 돌린 채 한 나절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던전이 쉬운 던전일 수가 있겠는가?”
“…그렇진 않겠네요.”
여러 시험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절망케 했던 제슬 교수가 신이 나서 한나절 동안 이야기를 나눌 만한 던전이라니.
분명 그 던전의 완성도는 높겠지만 직접 던전을 공략해야 할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지옥과 같은 곳이 되리라.
“그래도 왕자님 일행 입장에서는 어려운 게 낫지 않습니까? 난이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차이를 벌리기 쉬울 텐데요.”
“본래라면 그렇지.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건 던전을 끝까지 공략하는 것이다. 성적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것에 불과하지.”
“어째서입니까?”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하니까.”
던전 공략의 보상. 루시 알른이 바라는 것을 뭐든 들어주기로 약속했다는 것.
루시의 확언을 들은 순간 아서의 머릿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내용은 루시가 과거 했던 말의 진의를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허나 아서는 이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언젠가 루시 알른을 이기고 나서 묻고자 한 내용의 답을 어찌 이런 식으로 듣겠는가.
그 대신에 아서가 택한 소망은 루시 알른이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평소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깔보며 무시하고 비웃던 그녀가 부들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자신이 공들여 만든 던전이 허접했다 말하게 한다면.
으음. 정말로 속이 시원할 것 같지 않은가.
그 선명하고도 매혹적인 눈동자가 울상이 되어 거기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왕자님?”
제프의 되물음에 당황한 아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자세히는 묻지 말게. 대답해줄 수 없으니까.”
“그렇군요.”
제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조이와 페이비가 시선을 피했고 프레이는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을 가장했다.
다른 세 사람도 루시가 제안한 부상을 노린다는 점에선 일치했지만 그 내용은 저마다 달랐다.
조이가 꿈꾸고 있는 것은 루시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며 서로를 꾸며주는 것이었다.
친한 친구와 서로를 꾸며 주면서 웃고 떠드는 하루.
조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소망이면서 어울려 줄 사람이 없어 이루지 못한 소원.
만일 던전을 공략하는 데 성공한다면 조이는 방학 때 루시를 데리고 수도로 향해 이 꿈을 이루고 말 셈이었다.
그 옆에 있는 프레이가 품은 소망은 조이보다 단순했다.
그녀는 그저 루시가 자신을 칭찬해주길 바랐다.
순수하게 잘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웃으며 자신을 바라봐주길 원했다.
상대를 칭찬하는 일이 없다시피한 루시가 비꼼 하나 없이 대단하단 말을 해주길 소원했다.
그리고 뺨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인 페이비가 루시에게 바라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었다.
무릎 꿇은 자신의 머리에 그 자그마하고 보드라우며 따스한 손을 올린 채.
그 아름다우면서도 선명한 목소리로 자신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할 것이라 기도해준다면 정말 웃을 일밖에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
주신께 드리는 기도에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내용이 들어가선 안 됨을 알면서도 페이비는 이를 소망했다.
저마다의 이유로 입을 꾹 다문 이들을 살피다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란 걸 깨달은 제프는 어깨를 으쓱이곤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길 원하십니까?”
“1학년 기믹형 던전에서 출제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기믹. 그리고 그 기믹을 응용하는 모든 방법에 대해 알려다오.”
던전의 총체적인 구상을 루시가 담당했다 하더라도 결국 문제는 시험 범위 내에서 제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믹형 던전에서 출제될 수 있는 모든 기믹과 그 응용을 외우고서 들어간다면 훨씬 더 편하게 던전을 공략해나갈 수 있을 터.
“조이가 말하길 그대가 과거 제슬 교수에게 고생을 한 후 이에 대해 조사를 했다더군. 그 자료가 남아 있겠지?”
“네. 그렇긴 합니다만 여러모로 고생해서 모은 정보인지라.”
부탁을 들은 제프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당시 죽어라고 고생한 정보의 질은 상당히 높다. 그런 정보를 이런 거물들의 앞에 어찌 공짜로 내어 주겠는가.
아무리 못해도 몇 가지 구두약속 정도는…
“오라버니.”
조이의 목소리를 듣고서 고갤 돌린 제프는 그대로 모든 생각을 잊어버렸다.
“오라버니.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이 위를 올려다 보며 애교가 담긴 목소리를 내는데 어찌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겠는가.
“잠시만 기다려 줄래? 있는 거 다 가지고 올게.”
스스로 호구가 되는 걸 자처했음에도 제프는 행복감에 녹아내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 미친 시스콘에게 여동생의 애교는 억만금보다 더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
내가 말실수를 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 동안 아서. 조이. 프레이. 페이비. 이 네 명은 귀신이 들린 것 마냥 죽어라고 던전 공략의 준비를 했다.
각자 개인적으로 거센 훈련을 거듭하는 것은 물론.
매일 저녁마다 모여서 아카데미 던전을 공략하면서 합을 맞추고.
심지어는 기믹형 던전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아선 그에 대한 대비까지 하더라.
대체 나한테 뭘 시키고 싶기에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건지.
그 모습을 여러 불길한 생각이 스쳐 불안에 떨던 나였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느 정도 체념을 한 상태였다.
그 네 사람이 얼빠여우 같은 개변태도 아니고 이상한 부탁을 할 리가 없잖아.
괜찮겠지. 아마.
…설령 안 괜찮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이제 와서 농담이었단 소리를 했다간 진짜 험한 꼴을 당할 것 같단 말야.
어쨌든 네 사람이 뭘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나는 다른 중요한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로 던전 클리어 보상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기에 던전의 완성은 결국 보상이다. 던전을 공략하는 데 들인 고생만큼의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끝 맛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
지난 번 페이비의 물음으로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바로 던전학 교수를 찾아가 보상에 대한 부분을 논의했다.
던전학 교수는 내 의견에 동의를 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카데미에서 제공해줄 수 있는 보상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내가 만든 던전은 시험을 위한 던전이니까. 그 끝에 아카데미 던전과 같은 보상을 지급할 순 없는 것이다.
거기에 만족하지 못한 나는 아카데미의 지원을 거부하고 내가 직접 보상을 가지고 오겠다고 단언을 해두었다.
그 후 교수실에서 빠져나온 나는 어떤 보상이 적절할 지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럴 듯 한 게 안 나오더라.
모든 학생들이 눈을 붉힐 만한 물건이라는 게 영 떠오르지가 않아서 원. 그래서 혼자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카리아에게 조언을 구했지.
“대충 조건은 이해했어. 고용주님.”
내 물음을 들은 카리아는 별 고민 없이 답을 내주었다.
“그런 조건이라면 보석이 최고야. 비싸고. 눈에 띄고. 누구라도 가지고 싶어 하니까.”
‘저도 그 생각은 했는데요…’
“저기. 아줌마. 아카데미의 허접 대부분이 자존심만 높은 멍청이 귀족들이란 걸 잊어버린 건 아니지?”
나도 보석 종류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근데 아카데미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게 귀족인 이상 보석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자기 돈 주고 살 수 있는 걸 왜 어려운 던전을 공략하면서까지 구하려 들겠어.
“내가 말하는 건고용주님이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보석말고 다른 거야.”
‘다른거요?’
“다른 거라니?”
“예술 교단에서 직접 가공하고 보증하는 보석. 권위 높은 귀족도. 돈이 썩어나는 거상도 없어서 못 사는 물건. 이걸 보상으로 제공한다 그러면 난리가 날 게 분명해.”
예술 교단이라면.
설마 그 역겨운 변태가 사도로 있는 곳을 말하는.
“마침 잘 됐네. 안 그래도 내일 보기로 했다면서. 그 때 부탁해 봐.”
카리아는 그리 이야기를 하면서 내 앞에 새로 맞춘 바니걸 의상을 내밀었다.
“애교라도 부려봐. 그 변태 녀석. 껌뻑 넘어가서는 있는 거 없는 거 다 내주려고 그럴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