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7
내가 진짜 어지간하면 카리아한테 아줌마라거나 노처녀 소리는 안 하려고 그랬거든?
메스가키 스킬 번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튀어 나오는 건 그렇다 쳐도 최대한 줄여볼 생각이었어.
근데 바니걸 의상을 내밀면서 웃는 걸 보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
‘주름투성이에 심술맞은데다가 징그러운 변태이기까지 하다니♡ 이젠 아예 평생 혼자 살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 어차피 발악해도 혼자일텐데 체념하는 편이 낫겠네♡ 아주 현명해!♡’
‘내가 언제 포기했다고 그러는 거야! 난 아직 한창이야! 청춘이라고!’
‘얼굴 찡그리지 마♡ 그럼 주름 더 늘어난다?♡ 안 그래도 늙었는데 여기서 더 나이 들면 아줌마가 아니라 노처녀 할머니가 되어버리잖아♡’
‘으아아악! 진짜아아!’
마음에 상처를 입은 듯 책상을 내리치면서 벌떡 일어난 카리아와 한바탕을 한 나였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내민 바니걸 의상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입기 싫지만. 솔직히 그걸 본 순간 그대로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과거에 맺은 약속을 지금에 와 없는 걸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잖아.
결국 한숨과 함께 바니걸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나는 카리아에게 정말 그 보석이 그렇게까지 귀중한 것인지를 물었다.
예술 교단에서 제작한 보석이 그렇게나 귀중하다는 이야길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농담으로 한 말 아냐. 그 사도 녀석이 벌레보다 못한 변태 녀석이긴 하지만 지니고 있는 능력 자체는 진짜거든. 변태 사도가 가공한 보석은 왕의 생일에 헌상될 정도로 귀한 물건이야.’
이 말의 확인을 위해 조이를 찾아가 예술 교단의 사도가 만든 보석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고갤 갸웃거렸다.
‘없어서 못 구하는 물건입니다. 사교계에 예술 교단의 사도께서 제작한 장식품을 차고서 등장하면 그 자체로 화제가 될 정도니. 저도 한 번 착용해보고 싶다 생각할 정도죠.’
‘학생들이 좋아할 거 같냐고요? 싫어할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귀족 영애, 영식들이야 말 할 필요가 없고. 평민 학생 분들도 그걸 받는다면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설령 보석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걸 팔면 거금이 되니 눈에 불을 켜고 얻으려 하지 않을까요?’
대충 어느 정도의 가격이기에 조이가 이러나 싶어 물었더니 진짜 부르는 게 값이더라고.
예술 교단의 사도 그 인간. 역겨운 변태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꽤 유능한 인간이었어.
그래봐야 변태가 유능한 변태로 진화했을 뿐이지만.
뭐 어쨌든 보석을 구할 수 있다면 그걸 던전의 보상으로 배치하는 게 최선일 거라 판단 내린 나는 예술 교단의 사도에게 부탁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얼빠 여우가 사는 숲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인간의 형상을 한 얼빠여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와라. 기다리고 있었다.”
입꼬리만을 살짝 끌어올릴 뿐 정중함을 유지하는 그녀의 모습은 기품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를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 감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위로 올라갔던 입꼬리가 녹아내림과 동시에 기품 넘치던 여인은 사라지고 징그럽고 역겨운 변태가 그 자리를 대체했으니까.
“하아. 매일 같이 보는 얼굴이지만 본체의 눈으로 보니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군. 마음 같아선 그대를 품에 껴안고 놓아주고 싶지 않을 지경이야.”
바라는 모든 것을 해줄 테니 숲에 계속 머무르지 않겠냐는 얼빠여우의 물음에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은 하나 뿐이었다.
“정말?♡ 내가 바라는 거라면 뭐든 해줄 거야?♡”
“물론! 그대와 함께 할 수 있다면 무어라도 해주지!”
“그럼 제발 죽어줘♡ 너라는 역겨운 변태가 사라지면 이 숲이 좋아질 것 같거든♡”
“허억… 허어억… 한 번 더 죽어 달라 그러면 안 되겠는가? 역겨운 쓰레기를 보는 듯한 그 눈으로 본녀를 바라봐다오!”
“뒤져♡ 혀 깨물고 자살해♡ 너 같은 변태를 주인으로 삼은 이 숲에 역겨운 변태새끼라고 사과하면서 처절하게 죽어버려♡”
“…흐읍. 이것이 바로 행복해 죽을 것 같다는 것일까. 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진실로 성불해버렸을 것 같구나.”
흥분을 참지 못하고 코피를 줄줄 흘리는 그 모습에 제발 좀 뒤져줬으면 좋겠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얘가 숲의 주인 급의 강자만 아니었어도 직접 메이스로 뒤통수를 후려쳐서 성불시켜줬을 텐데.
메이스를 만지작거리며 내 허약함을 한탄하고 있으려니 얼빠여우가 소매로 코피를 닦아내고는 자신의 기운을 주변으로 흩뿌렸다.
“그대 같은 귀중한 손님을 바깥에 세워둘 수는 없으니 일단 저택으로 향하자꾸나.”
그녀가 말을 끝마친 순간 주변의 풍경이 뒤바뀐다.
나무가 무성하던 숲의 초입에서 지난번에 방문했던 얼빠 여우의 저택 내부로.
순간이동의 부작용은커녕 자그마한 위화감도 느낄 수 없는 말끔한 이동.
숲의 주인이 숲에서 사용할 수 있는 권능 중 하나인가.
“조금 기다리면 그 변태놈도 이 곳에 도착할 테니 그 동안 차라도 한 잔 하자꾸나.”
‘사도님께서 숲 근처에 계신가요?’
“그 변태 사도가 이 숲 근처에 있어?”
“아니. 숲 가운데를 주파하며 이 곳으로 오는 중이다.”
‘숲 안에 계시다고요? 그럼…’
“숲 안에 있다고? 그럼 그냥 얼빠 여우 네가 가서 데리고 오면 되는 거 아냐?”
나의 물음을 들은 얼빠여우는 진중하다 못해 일종의 혐오마저도 느껴지는 표정을 한 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역겨운 남정네에게 내 권능을 사용해줘야 하지?”
생리적으로 무리라는 거구나?
나도 그 감정 잘 알아. 너 볼 때마다 만날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게 그거거든.
자중을 모르는 변태새끼인 넌 그런 감정을 모를 거라고 봤는데 아니었구나?
와아. 신기하다.
근데 왜 내 감정에는 공감을 못 해주는 거냐. 이 변태 새끼야!
동족 혐오를 하는 모습에 순간 열이 올랐지만 난 화를 내는 대신 한숨만을 내뱉었다.
여태까지의 경험상 아무리 분노를 표출해봐야 얼빠여우를 기뻐하게 만들 뿐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놈팽이 따윈 신경 쓰지 말고 무슨 차를 마시고 싶은 지나 이야기 해 보거라. 내 그대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내어줄 생각이니.”
‘됐습니다. 사양할게요.’
“싫~어. 얼빠 여우 네가 무슨 이상한 걸 넣을 줄 알고? 사양할게. 혼자서 배터질 때까지 마시다 죽어버리기나 해.”
얼빠 여우의 제안을 거절한 나는 아무 짓도 할 생각 없다는 얼빠여우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한 채 적당한 방 안에 들어왔다.
문단속을 하고.
소리를 차단하고.
개짓거리를 못하게 신성으로 결계까지 친 나는 인벤토리에서 바니걸 의상을 꺼냈다.
평생 입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옷을 다시 마주하게 되니 한숨이 절로 샜다.
예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이거 옷 아냐.
피부를 가려준다는 옷의 기능을 하나도 수행하지 못하는 이게 어떻게 옷이냐고!
모니터 너머 캬! 이게 옷이고 의상이지!를 외쳤던 내가 너무 원망스럽다.
…아니 사실 지금도 내가 입는 게 아니라면 그런 말을 할 것 같긴 한데.
<어쩌겠느냐. 네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인 것을.>
‘아. 참. 할아버지가 아직 있었죠.’
<음? 여아야? 여아야?!>
얼빠여우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할배의 존재를 잊을 뻔 했네.
잠시 기다려 달란 할배의 외침을 무시한 채 메이스를 인벤토리에 집어 넣은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고는 걸치고 있던 상의를 벗었다.
나중에 메이스로 내 머리를 후려치면 오늘의 기억을 날려버릴 수 있으려나.
*
교단의 사도로써 일하지 않으면 지원을 끊겠다는 경고에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게 된 축제에서 프레테는 루시 알른이라는 기적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살아 숨쉬는 예술품이었다.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답고 선명한 눈동자.
대리석보다 새하얗고 매끈한 피부.
걸을 때마다 흩날리는 붉은 비단같은 머리카락.
천상의 노랫소리처럼 귀가에 스며드는 목소리.
그녀라는 존재를 눈에 새긴 순간 프레테의 머릿속에 수많은 예술적 영감이 퍼져나감과 동시에 여신의 계시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나의 사도야. 이 세상을 한 층 더 빛나게 만들 아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거라.’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프레테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기꺼이 그 책무를 수행하겠노라고 여신께 답했고 그를 실행에 옮겼다.
파트란 축제가 끝나자마자 영지를 떠난 그는 예술 교단의 총관이 있는 곳부터 시작해 루시 알른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노래를 세상에 전파했다.
여신께서 계시를 내려 타리키의 사도를 막으라 하지 않으셨다면 프레테는 지금까지도 노래를 부르며 다녔으리라.
그리고 버로우 영지에서 다시금 루시 알른이란 이름을 지닌 기적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프레테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겉모습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올곧고 선한 마음이란!
수많은 고통을 안은 채로 당당히 웃음 짓는 그녀를 본 순간 프레테는 자신의 노래가 모든 걸 담지 못했음을 깨달았고 다시금 그녀의 아름다움을 퍼트리리라 마음먹었다.
루시가 주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신을 모시는 체 하며 자신의 잇속을 취하려 드는 주신 교단의 쓰레기들과 신께서 빚은 기적이라 불러 마땅한 루시 알른은 전혀 다른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얼마 뒤.
격이 오름에 따라 한 층 더 매력을 더한 루시를 눈에 담은 순간 프레테는 루시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이 자기 인생의 목적 중 하나가 되었다고 확신했다.
감히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불경스럽다 느껴지는 그 모습은 그로부터 몇날며칠이 지나도 프레테의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으니.
루시와 재회하기 위해 숲을 주파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프레테의 눈 앞에는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여신이시여. 저 따위가 과연 그녀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화폭에 담을 수 있을는지요.”
다만 그의 입가에 새겨진 미소는 딱딱했다. 미라는 단어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알른 영애를 만나러 가는 것이야 당연히 기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 년 내도록 그녀의 옆을 지키며 루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싶다 생각하는 것이 프레테라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프레테가 순수히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알른 영애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을 수 있게 된 것까지는 좋았지만 과연 내가.
나 따위가.
한낱 인간에 불과한 이 멍청이가.
여신과도 비견할 수 있을 알른 영애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완벽히 담아내는 게 가능할까.
오늘 이 순간을 위해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장비를 가지고 온 프레테였지만 여전히 그는 확신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혹은 숲의 주인이 거주하는 저택 앞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왔느냐?”
숲의 주인은 프레테의 존재가 고깝단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아니했다.
프레테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이란 존재는 홀로 미의 재현과 교감하고픈 그 순간에 끼어든 훼방꾼이었으니.
서로의 입장이 반대였다면 프레테도 숲의 주인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으리라.
“숲의 주인이시여. 알른 영애께서는.”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조금 기다리면.”
끼이익.
“아. 다 갈아입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따라 고갤 돌린 순간 프레테는 자신의 마음에 담긴 모든 미혹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부끄러운 듯 꾹 다문 입술.
망설임을 담은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
살짝 붉어진 연분홍색 뺨.
새하얀 어깨 위로 흘러내린 붉은 색 머리카락.
선명한 쇄골.
평상시의 강인함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가녀린 어깨.
살짝 떠오른 가슴 켠의 옷감을 누르고 있는 팔.
매끈한 허벅지와 그 끝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발가락.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은 프레테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이 담긴 미소와 함께 그대로 눈을 감았고 영혼을 잃어버린 그의 몸이 도미노마냥 뒤편으로 쓰러졌다.
‘으으. 아르마디님! 저 아이를 독점하다니 너무하세요! 저도 저 귀엽고 예쁘고 아름다운 아이와 하하호호 웃고 떠들고 싶다고요! 교환은 안 받아주시나요?! 저희 아이도 남성적인 아름다움만큼은 누구에게도…’
의식이 희미해지는 와중에 무슨 목소리가 들린 듯 했지만 프레테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을 방금 전의 풍경이 가득 채우고 있었기에.
아아.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