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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오오, 그 어떤 시련도 나의 충정을 무너뜨리지 못할지니, 그라시스여 영원하라.”

나지막하게 읊조리던 노랫가락이 끝을 맺었다.

흠흠.

“역시 군가는 내 목소리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원래는 훨씬 기개 넘치는 곡인데 여리여리한 내 목소리로 부르니까 영 맛이 안 사네.

아무리 노래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태생적으로 안 어울리는 노래가 있잖아.

그런 것처럼 곡의 분위기와 목소리가 아예 안 맞는 느낌.

편곡으로 분위기를 바꾸면 되겠지만 편곡은 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불러도 좋아해 줬을 거잖아. 그치, 가리드?”

이건 가리드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니까.

술만 마시면 집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부르곤 했었지.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가장 애국심이 뛰어난 사람을 꼽자면 나는 주저 없이 가리드를 꼽을 것이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도 군가를 부르는 사람이라니. 훌륭한 기사의 귀감이잖아.

…어, 이렇게 말하니 뭔가 주정뱅이 같네.

“그래도 예전보다 더 잘 부르지 않아? 나, 가리드가 칭찬해 준 후로도 계속 연습했거든.”

이번엔 군가 대신 길거리를 다닐 때마다 흔히 듣던 민요를 흥얼거렸다.

“붉은 꽃다발을 한 아름 안아 그대에게 바치겠어요. 그대의 집 앞에 붉은 꽃이 피어난다면, 그대는 저를 떠올리겠죠. 저의 집 앞에 붉은 꽃이 피어난다면-”

저도 그대를 떠올리겠죠.

작은 소리로 흥얼거리며 화려하게 핀 붉은색 꽃을 뚝뚝 꺾었다.

“미안해. 이 꽃은 주지 못할 것 같아.”

붉은색이라서 티는 안 나지만 피를 머금었거든.

다른 꽃을 따다 줄 테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줘.

속으로 변명하듯 중얼거리며 한 아름 안고 있던 붉은 꽃을 미련 없이 놓았다.

바람에 실린 꽃들이 분분히 흩날리며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어쩌면 다음 해 이맘때쯤엔 절벽 아래에 붉은 꽃이 한가득 필지도.

“그거 알아 가리드? 곤충들은 페로몬으로 의사소통을 한대. 여기 먹이가 있다, 여기는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

손에 남은 꽃가루와 잎사귀를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사람한테도 페로몬이 있기는 하지만, 페로몬을 느끼는 능력이 퇴화해서 곤충처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래.”

그러니 페로몬을 맡은 것처럼 계속 몰려오는 놈들은 사람이 아니라 곤충이 아닐까?

사람이라면 퇴화해서 그런 능력이 없을 테니까 말이야.

처음 도둑놈, 그다음은 쥐새끼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곤충이었나 봐.

“정말 가지가지 한다.”

여기에 먹이가 있다고 페로몬이라도 뿌리고 갔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몰려드는 곤충 떼를 맞이한 게 벌써 며칠째일까.

잘은 몰라도 일주일은 훨씬 넘은 것 같은데.

게다가 오는 빈도도 점점 늘어서….

피를 마신 꽃을 솎아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러다 애써 가꾼 꽃밭이 다 날아가겠어.

‘반드시 여덟 명 이하로 행동하라. 그 이상은 비겁하니까!’

이런 행동 강령이라도 있는 건지, 여덟 명을 절대 넘지 않는 게 꽤 우스웠지만 그렇다고 짜증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다.

텅 빈 꽃밭 한구석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둑놈 처치, 유해 동물 구제에 이어 살충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검을 꺼내 들었다.

살충 작업에 앞서 검을 만든 대장장이에게 속으로 사과하는 것도 이젠 루틴이 되었다.

“이번에는 최대한 힐러 지키는 방식으로 가보자. 탱커 둘이 힐러 둘 전담 케어하고, 딜러도 최대한 근처에서 떨어지지 마.”

“힐러도 다른 사람 힐보다는 자기한테 보호막 거는 걸 우선으로 하고.”

“오케이. 가보자!”

‘…뭐라는 건지.’

다짜고짜 싸움을 걸 거면 말이라도 알아듣게 하던가,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말을 지껄이는 여덟 명의 무리를 뚱하게 보았다.

아예 생소한 언어는 아니다.

그들이 쓰는 언어는 ‘로 아르카’ 제국에서 만든 제국어, ‘아르키쉬’니까.

말이 제국어지, 인간은 물론이고 종족마다 고유의 언어가 있는 이종족도 익혀두는 언어라서 사실상 아르디나 대륙의 공용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유야 뭐, 당연히 로 아르카 제국이 아르디나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의미로 보면 사실 저 무뢰배… 아니 곤충 떼가 아르키쉬를 구사하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생소한 일도 아니나-

‘그게 뭐 어쨌다고.’

그게 내가 저들을 봐줄 이유는 아니잖아.

또한 내가 아르키쉬를 익힐 이유도 아니고.

로 아르카 제국의 영향력이 영향력인 만큼 나도 아르키쉬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뿐이지 핵심적인 단어는 알고 있다고.

‘죽어, 개새끼, 살려줘, 도망쳐, 어머니, 괴물.’

등등.

이게 바로 실전 압축 아르키쉬라는 거지.

저 정도만 알아도 사는 데 아무 문제 없는걸.

응, 지금처럼.

촤아악!

“으아악!”

“이 미친 새끼 또 시작이네!”

“힐러, 힐러 지키라고!”

“보호막째로 반갈죽 나는데 어떻게 지키냐고!”

“파티 생존기 쓰면 되잖아!”

“파티 생존기는 쿨타임 없냐?!”

자리(포지션)를 꽤 특이하게 잡은 걸 보면 아까 쑥덕대면서 전략이라도 세운 거 같은데.

전략도 어느 정도 상대가 돼야 효과가 있는 거야.

불나방들이 그 어떤 현란한 움직임을 보인다 해도 마스터 메이지의 헬파이어 앞에선 무력한 것처럼.

‘애초에 전략도 잘못됐고.’

후열을 지키고 싶었으면 전열이 앞으로 나와서 검을 맞댔어야지.

한심하다는 생각을 굳이 참지 않으며 발을 들어 갑옷 중앙을 걷어찼다.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 이렇게 되잖아.

“…커헉! 무슨 힘이…!”

갑옷을 입은 검사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뒤로 쭉 밀려났다.

그리고 그 검사의 뒤엔 스태프를 든 마법사가 서 있었다.

“아악! 야, 비켜! 저 새끼 온다고!”

“내가 비키기 싫어서 안 비키냐? 무거워서 일어나기 힘들다고!”

보기 좋고.

검사와 마법사가 한데 뭉쳐 나동그라졌다.

꼭 붙어있던 걸 보면 꽤나 각별한 사이인 모양인데, 사랑을 이뤄준 것 같아 흡족했다.

아마 이따금씩 지르는 고함도 기쁨에 겨운 소리겠지.

아르키쉬를 몰라 알아들을 순 없지만 분명 그럴 거야.

싸우다 말고 남사스러운 애정 행각을 펼치는 커플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주례 정도는 서줄 수 있지.

푹!

“…!”

“크, 카학!”

나의 주례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감탄사를 남긴 커플은 만족하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연인들이 으레 말하는 ‘죽을 때까지 함께 하자.’와 ‘죽어서도 함께야.’를 한번에 이뤘으니 이 얼마나 로맨틱한 일인가.

둘의 사랑 영원하길.

다음 목표는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석궁을 든 사수였다.

순식간에 둘이 사라진 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방아쇠를 당길 생각도 못 하고 정신 수양을 위해 명상을 하고 있더라.

빠르게 쇄도해 검을 휘둘러 계속 명상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맨 처음 해치운 사제와 신혼여행을 떠난 커플, 명상을 좋아하던 사수까지.

순식간에 넷이나 사라지자 남은 벌레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꺾였다.

“하… 이번 트라이도 망했네.”

이 악물고 달려들 때도 상대가 안 됐는데 전력이 반으로 줄고 사기까지 꺾인 상태에서 상대가 될 리 없다.

용기를 중시하는 가리드가 봤다면 실망했을 게 분명한 모습.

난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래도 굳이 한마디 얹자면 이럴 거면 왜 온 건가 싶긴 하다.

‘죽을 각오를 하고 왔다기엔 죽자 사자 달려들지를 않고, 그렇다고 해서 삶에 미련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전의가 꺾였으면서도 도망가지 않는 게 특이한 점이랄까.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와 초짜 암살자 사이 어딘가를 보는 느낌.

어쩌면 살아 돌아오면 죽인다는 협박을 들은 걸지도 모르지.

하여간 이 세계 사람들은 생명을 너무 경시해서 문제라니까.

물론 나도 그들 중 하나고.

“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도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잖아.”

어느새 핏물만 남은 전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시체는 이미 빛무리로 흩어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내 검은 이번에도 부서지지도 부러지지도 않고 살아남았다.

이쯤 되면 이제 오기가 생길 지경이다.

“다행히 이번엔 꽃밭도 안 망가졌네.”

꽃을 솎아내며 생긴 공터에서 싸운 덕에 벌레 떼가 꽃을 갉아먹는 걸 훌륭하게 막아냈다.

그래도 이런 상황을 계속 내버려둘 순 없는데….

이번 전투처럼 피해가 아예 없다면 괜찮겠지만 그럴 리 없으니.

꽃밭이 민둥평원이 되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가리드를 위해서.

“으음… 또 마을에 내려가야겠네.”

마을에서 재료를 한가득 사 오면서 당분간 안 내려가도 되겠다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내려가게 되다니.

역시 사람 일은 모른다니까.

새로 심을 씨앗을 사고 식재도 사고, 겸사겸사 정보도 얻고 내려간 김에 적당한 검도 하나 집어 오자.

언제 벌레 떼가 들이닥칠지 몰라 자리를 오래 비울 순 없긴 한데 최대한 빨리 갔다 오면 괜찮겠지.

“아, 좋은 생각이 났어.”

내려가면서 벌레 떼를 보는 족족 구제하면 당분간 못 오지 않을까?

적어도 마을에 내려갔다 올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내가 생각해도 천재적인 발상이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몸을 돌렸다.

* * *

[실시간 보스 근황]

(후드 케이프를 뒤집어쓴 사람.jpg)

(나무가 무성한 산.jpg)

보스룸에서 가출함ㅋㅋㅋㅋㅋ

[댓글]

-???

-???????

-뭐임; 버근가?

-유저가 코스프레한 거 아님?

┕ㄴㄴ 아님; 지금 트라이하러 가던 최상위 레이드 파티들 다 갈렸음

┕뭐지;

-시즌 1호 버그

-어디로 가는지는 봄?

┕마주치자마자 다 갈려서 모름

┕ㅁㅊㅋㅋ

-그럼 이제 트라이 못 하나?

┕묘 지키던 거 보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오 그러면 돌아오기 전에 빈집 털이하면 개꿀 아님?

┕아마 그럴 텐데 산에 있던 사람들 다 갈려서 할 사람이 없음

┕까비;

┕이걸 노린 건가

┕설마ㅋㅋㅋ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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