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0
던전학 교수 제슬은 루시와의 논의를 나눈 그 날 바로 루시가 만들어낸 던전을 제출했다.
반려당할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른 교수들이 모든 귀찮은 것을 어린 사람에게 떠넘기는 빌어먹을 노친네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또한 던전이라는 것에 매혹되어 던전학의 교수가 된 자들이다.
루시가 만들어낸 경이로운 던전을 보고서 그를 반려한단 생각을 품을 수 있을 리가.
그걸 확인하고도 다른 걸 가져오라 이야기를 한다면 학계 선배고 나발이고 들이박아 버려야지.
이 던전의 대단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던전학이란 학문을 가르치느냐고 말이야.
그리고 던전을 제출하고서 며칠이 지난 저녁.
던전학의 지도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로 제슬을 호출했다.
겉으로 드러난 사유는 개인적인 대화였지만 제슬은 그를 믿지 않았다.
자기 가문의 관리와 학문의 연구에 더해 지도교수의 자리까지 맡게 되어 정신없이 바쁜 그에게 한가하게 차나 마실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분명 어제 제출한 던전 때문이겠지.
이를 확신한 제슬은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여러 자료를 챙겼다. 그 어떤 말이 튀어나오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서.
지도교수의 연구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학문적 자존심을 걸고 싸우겠단 의지를 되새기던 그녀였지만 그 의지는 연구실의 문이 열린 순간 그대로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제슬 교수. 왔는가?”
“오랜만에 보는 군. 지난 번 회식 때가 마지막이었던가?”
“어이쿠. 얼굴이 굳은 것 좀 보게.”
“1학년 일 때문에 고생하는 친구 아닌가. 차나 한 잔 하자 부르면 당연히 싫어하지.”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을 오라가라 해서 미안허이.”
지도 교수의 연구실에 있는 것은 지도 교수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각자의 연구 때문에 모일 일이 없다시피한 던전학 교수 전원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들.”
과거 논문 심사를 맡을 때의 악몽이 떠오른 제슬은 식은땀을 흘리며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 곳에는 다들 어쩐 일로.”
“허허. 같은 학문의 연구자들이 모이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이야기할 거리가 생기면 모이고 그러는 거지. 안 그래?”
“그럼. 그럼.”
저들끼리 말이라도 맞춘 듯 자연스레 말을 잇는 모습에 제슬이 입을 우물거렸다.
별 이유 없이 모이긴 무슨. 자신의 연구실을 일종의 던전으로 만들어서까지 바깥출입을 꺼리는 사람들이.
뭐지? 학장이 제발 좀 모이라 빌어도 셋 이상 나오지 않는 인간들이 왜 다 여기에 있는 거야?
“예끼. 이 사람들아. 자네들이 능구렁이처럼구니 제슬 교수가 곤란해 하지 않는가.”
“지가 이러자고 시켜놓고는.”
“하여간에 괴팍한 인간이라니까.”
“됐고! 바쁜 제슬 교수의 시간을 빼앗을 수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겠네. 자네를 여기에 부른 이유는 그대가 제출한 기말고사용 던전 때문이라네.”
지도 교수의 입에서 기말고사 던전이 나온 순간 제슬은 지금의 상황을 더 이해할 수 없게 됐다.
단순히 던전을 반려할 거라면 지도 교수 한 사람이 손을 휘휘 저으면 그만일 텐데.
“제슬 교수. 그대도 알겠지만 최근 우리 아카데미에 사건 사고가 꽤 많았잖은가.”
“입학 시험 때의 일. 3왕자 납치 사건. 악신의 사도가 거리를 습격한 일.”
“왜 그것도 있잖은가. 알른 영애가 하루 만에 아카데미 던전을 모두 공략한 거. 그 일 때문에 웬 잡것들이 던전이 얼마나 쉬우면 그러냐고 지랄이라니까.”
“마고테 교수. 품위를 지키게.”
“내가 없는 소리 했어? 지도 교수 저 속 검은 양반이 우릴 끌어 모은 것도 여러 잡것들이 우릴 비방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잖아?”
“마고테! 적당히 하게. 지금 내가 제슬 교수와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어이쿠야. 거 미안합니다.”
마고테가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숙인 후 헛기침을 한 지도 교수가 다시금 제슬 쪽을 바라본다.
“이처럼 많은 사고 때문에 최근 소울 아카데미 던전학과의 명예가 실추된 상태다. 여기까진 이해했나?”
“예. 이해는 했습니다만 그것들이 기말고사 던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요?”
“자네가 제출한. 알른 영애께서 총체적인 설계를 담당했다는 그 던전은 무척이나 완성도가 높은 곳이다. 던전에 관한 지식을 지닌 자라면 누구나 탄성을 내지르겠지.”
“그거야 당연하죠.”
루시를 깎아내릴 생각밖에 없었던 제슬마저 탄복시킨 것이 루시가 만들어낸 던전이다. 그 곳이 대단하단 것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던전의 명성을 널리 퍼트리는 것으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킬 생각이라네.”
“…예?”
“던전의 구성을 몇 번이나 살펴 보았다만 정해진 리소스 탓에 타협한 부분이 많더군. 영애께 제한을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재능을 펼쳐 달라고 전해주게.”
용량의 제한 없이 온갖 기믹을 집어넣을 수 있다고?!
루시와 논의를 나누며 현실의 이유로 폐기 되었던 여러 기믹을 떠올린 제슬의 눈이 빛나자 지도 교수가 한 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이 그 던전을 통해 기말고사를 치를거란 것도 함께 전해주면 좋겠군. 학년 마다 성적을 산정하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그 후에도 지도 교수는 루시에게 전해야 할 내용 여럿을 제슬에게 이야기했다.
이 정도로 할 말이 많으면 직접 이야기하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제슬의 머리에 스쳤지만 그녀는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유야 분명하지 않은가. 루시와 직접 대면 했을 때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생각하는 걸 테지.
“당장에 할 말은 이 정도겠군.”
“아. 그리고 던전 제작과정 중 고민 있으면 마고테 교수한테 찾아가란 것도 같이.”
“어허! 어디서 개지랄인가! 자네 연구실엔 이미 연구원들이 꽉 차지 않았나!”
“조금 있으면 한 사람이 학위를 따서 나갈 거야!”
“반 노르가 교수가 차 한 잔 하자 그랬단 이야기도 전해주면 고맙겠군.”
“거. 헛된 희망들 가지긴. 알른 가문의 하나 뿐인 자식이신데 교수가 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시끄러워!”
“이런데 현실을 들이밀지 마라!”
“제멋대로인 알른 영애라면 혹시 모른다!”
학계에서 상당한 권위를 지닌 교수들이 한 사람을 자기 아래에 들이기 위해 다투는 것을 구경하던 제슬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는 지도 교수에게 목례로 인사를 전한 뒤 도망치듯 그 곳에서 빠져 나왔다.
*
“대충 이런 이야기입니다.”
던전학 교수에게 이야기의 전말을 들은 나는 한숨이 새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개변태 주신이 내어준 퀘스트를 보고 이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내가 없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었구나.
썩은물로써의 자존심을 걸고서 훌륭한 던전을 만들어 낸 영향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진짜 상상도 못 했네.
“…기분이 안 좋아보이시네요. 분명 기뻐하시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던전학 교수는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난 그녀의 당황을 이해했다. 며칠 전의 나였다면 리소스를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던전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단 사실에 환호성을 내질렀을 테니까.
정치적인 사유?
여러 학생들의 불만?
그딴 거 내 알 바야?
나한테 중요한 건 완벽한 던전을 만들어내는 것 뿐!
과거의 나는 분명 내가 바라는 이상에 가까워질 수 있단 사실에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 던적을 작성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수 없다.
온갖 요소를 집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기뻐하지 못한다.
눈치 없는 개변태쓰레기 주신이 내어 준 퀘스트 때문에.
[당신의 자존심]
[아카데미의 그 누구도 공략하지 못할 던전을 만들어내세요!]
내가 생각하는 던전이란 것은 누군가에게 공략 될 때에 완성되는 것이다.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곳을 어찌 던전이라 부르겠는가.
공략하는 것이 불가능한 던전은 던전이 아니라 무덤이라 불러야 한다 생각하는 난 기말고사의 던전을 만들 때에도 누군가 공략에 성공할 것을 가정하고 설계를 해두었다.
내가 괜히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제발 던전 공략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겠어?
누군가 공략해주지 않으면 내가 만든 던전이 미완성으로 남을거라 여겼으니까 뭐든 해주겠단 말까지 해가며 걔네들을 설득한 거라고!
근데 이 빌어먹을 개허접변태던전알못새끼가 그 누구도 공략할 수 없는 던전을 만들어내라는 퀘스트를 줬어!
아니 어떻게 주신이라는 작자가 자신의 사도가 원하는 것도 모르고 이런 퀘스트를 줄 수가 있지?!
왜 주고도 욕먹을 행동을 하냐고!
메네스테일이나 버로우 영지에서의 일처럼 다급한 게 아니라면 좀 생각을 하고 퀘스트를 던지란 말이야!
[보상 : 평판의 상승. 튜토리얼의 숨겨진 조건 3개 개방. 용사의 씨앗에 대한 단서.]
[실패시 : 흑역사가 될 굴욕적인 무언가]
더 짜증나는 건 이 퀘스트를 반드시 성공할 필요가 없단 것이다.
성공시에 주어지는 보상은 분명 흥미롭지만 지금의 내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고 실패 했을 때 주어질 처벌도 게임 오버 마냥 극단적이지 않아.
만약 성공 시의 보상이 지금 나에게 필수적인 것이었다면?
실패 시에 목숨을 잃는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면?
난 기꺼이 그 누구도 공략할 수 없는 던전을 만들어냈겠지.
허접 주신이 강제했기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별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내가 과거에 공략했던 여러 괴악한 던전에서 기믹을 몇 개 빼오면 바로 학생들의 무덤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허나 우리 허접쓰레기변태주신은 평소와 달리 그런 극단적인 사안을 집어넣지 않았다.
어중간한 보상과 처벌을 걸어 둔 채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말라는 식의 퀘스트를 내밀어서 나에게 선택권을 줬지.
나의 신념대로 던전을 만들어 썩은물의 자존심을 지킬 것이냐.
처벌을 피하고 보상을 받기 위해 신념을 내다버릴 것인가.
욕지거리가 절로 나오는 극악한 이지선다를 나한테 내민 거라고!
페도변태로리콘새끼가 왜 이런 퀘스트를 내밀었을까를 생각해봤거든?
이 녀석이 노리는 건 하나야.
내가 썩은물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서 벌칙을 받도록 유도하는 거.
‘흑역사가 될 굴욕적인 무언가.’를 내게 선사하는 것.
분명 저 벌칙은 변태쓰레기사디주신의 왜곡된 성욕이 잔뜩 포함되어 있는 무언가겠지.
변태 사도가 본다면 성불해 자기가 모시는 여신에게로 향할.
그리고 정작 그 곳에 있는 까마귀 여신도 코피를 줄줄 흘리며 기절해 있을 그런 내용일 거라고.
그러니 내 존엄을 지키고 싶다면.
허접 주신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면.
녹아내리고 있을 녀석의 입가에 엿을 들이밀려면.
자존심따위 내다 버리고 괴악한 던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하아.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던전을 괴악하게 개조할 순 없지.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교수형에 처해야 할 성범죄자주신이 무얼 준비해뒀을지는 몰라.
뭐 그래도 기껏해봐야 얼마 전 바니걸을 입었던 거랑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한 수준이겠지.
아르마디가 선함보다 성벽에 관심이 많은 말종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주신이다.
설마 자신의 유능한 사도가 전향 마렵단 생각을 하게 만들겠는가.
내가 없으면 자기도 좆 될텐데 그런 짓을 하진 않겠지. 안 그래?
그러니 퀘스트가 성공하건 실패하건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원하는 던전을 만들자.
이렇게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좋게 생각하자고.
누군가 던전의 끝을 보고 감동해 준다면 벌칙을 받더라도 기쁠 테고.
그 누구도 던전을 공략하지 못한다면 슬프겠지만 보상을 받는 걸로 위로받을 수 있는 거잖아.
고민을 끝마친 나는 던전학 교수에게 던전 작성 용지를 받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른 영애.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뭔데? 짧게 해. 너랑 다르게 내 시간은 귀중하다고.”
“혹여 던전학 교수님들 중에 만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제슬의 물음을 들은 순간 등줄기가 섬짓해졌다.
이거 그거지?
노예 권유잖아!
내가 만든 던전이 루시 알른의 악명을 뛰어넘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거야?!
‘…아뇨?’
“그걸 질문이라고 해? 내가 노인 냄새나는 퇴물 늙다리들을 만나고 싶어 할 것 같아?”
좋게 평가해준 건 고맙지만 노예가 되란 권유는 사양할게!
교수가 되고 싶단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노예 생활을 견디면서까지 되고 싶은 건 아냐!
“흐음. 그럼 늙다리가 아니면…”
던전학 교수의 눈가가 빛나는 걸 본 나는 빠르게 교수실을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