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2
점차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아카데미의 수련장.
그 곳의 외곽 한 쪽에 자리를 잡은 아서와 프레이는 서로 목숨을 내걸기라도 한 것처럼 치열하게 검을 나누고 있었다.
“프레이! 날 죽일 셈이냐!?”
“그러는 3왕자님도 얼굴을 노리고 마법 쐈어. 인과응보.”
서로를 향하는 검 위에는 기사의 증표라 불리는 푸른색의 오러가 새겨져 있었다.
아카데미 졸업 전에 오러를 깨치기만 해도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거늘.
아직 1학년을 끝마치지 않은 상태임에도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두 사람의 모습에 수련장에 있는 다른 이들이 쓴웃음을 짓는다.
적당히 뛰어나야 질투를 하건 폄하를 하건 할 터인데 두 사람이 지닌 재능이 너무도 뛰어나 그런 감정조차 품을 수 없는 것이다.
살벌하게 이어지던 두 사람이 대련은 아서가 바람마법으로 흙먼지를 일으켜 프레이의 시야를 뺏은 후 그녀의 검을 떨어트리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이걸로 2승 4패인가.”
“아냐. 왕자님 입장에서 1승 4패 1무.”
“1무는 어디서 튀어나온 것이냐.”
“도중에 중단된 대련. 기억 안 나?”
“그 대련은 이미 내 쪽으로 승기가 기운 상태였을 터인데? 내 승리로 하기로 합의하지 않았나.”
“그렇게 억지 부리고 싶어? 알겠어. 2승 4패로 해줄게. 그래도 내가 우위니까.”
“억지가 아니라!”
“두 분 다 진정하세요. 그러다 진짜 칼부림이 나겠어요.”
옆에서 마법의 수련을 거듭하던 조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자 아서와 프레이가 마지못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두 분 사이가 좋은 건 알겠지만 그러다 두 분 중 한 사람이 다치면 던전 공략에 차질이 생긴다고요.”
“…미안하군. 어른스럽지 못했다.”
“맞아. 3왕자님이 어른스럽지 못했어.”
프레이의 깐죽거림을 들은 아서는 목에 핏대를 세웠지만 자기가 잘못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잠시 쉬지.”
“응.”
“그럼 전 다시 개인수련 하고 있을게요.”
품위나 기품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고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아서는 땀으로 범벅이 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오늘 낮에 게시된 공지를 확인하고서 여태까지 몸을 움직였으니 대충 반나절 정도 훈련을 한 셈인가.
확실히 체력이 좋아졌다는 게 느껴지는구나.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거칠게 몸을 움직였으면 바닥에 널부러져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터인데.
루시 알른에게 가르침을 청한 보람이 있구나.
발전한 부분은 이것뿐이 아니다.
마력도. 근력도. 마법의 실력도. 검을 다루는 능력도. 실전에서의 냉정함도.
무엇보다도 오러를 다루는 능력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한 달 전엔 발현하는 게 한계였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다룰 수 있을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가파른 성장을 보이는 것은 본인뿐만이 아니다.
지금 내 옆에서 다섯 개의 마법을 동시에 발현하고 있는 조이 또한 아카데미 입학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지.
아카데미 졸업 후 마탑으로 향할 생각이 없느냔 물음만 해도 열 번 가까이 들었다던가.
교수들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마법 다섯 개를 동시에 펼치며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녀석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욕심이 나지 않을까.
나 같아도 자신의 학파에 끌어들이려 최선을 다했을 거다.
잠시 쉬자 그랬음에도 검을 휘두르고 있는 프레이 켄트 저 녀석도 하루하루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검술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상태에서도 자신의 재능만으로 유망주 중 최강이라 평 받던 게 프레이 켄트다.
그런 녀석이 진지하게 검술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어찌 그 성장이 가파르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 지금 내가 저 녀석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이것이 대련이기 때문이다.
만일 저 녀석과 내가 진지하게 목숨을 빼앗기 위해 겨룬다면 난 분명 저 녀석에게 패할 것이야.
하. 정말. 본인도 나름 천재라 불리는 인종일 터인데 어찌 내 주변에는 이런 괴물들밖에 없는지 모르겠군.
이러니 낙오 당할 게 두려워 쉴 수가 있나.
비틀거리며 일어난 아서가 한탄과 함께 다시금 검을 쥔 그 때 수련장 입구에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앞머리를 쓸어 올린 아서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가 어릴 적부터 봐왔던 우락부락한 덩치였다.
솔라딘 왕국의 2왕자.
세실 솔라딘.
그가 수련장 한 가운데를 지나치고 있었다.
아카데미 거리에 개인적인 수련장을 준비한 형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지?
그것도 평소 데리고 다니던 자신의 부하들도 모두 내 버린 채 혼자서 오시다니.
여러 의문을 품던 아서는 세실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자신을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루시 알른에게 대판 깨진 후로는 잠잠하셨는데. 2왕비님께서 무언가를 명하셨나? 아님 그냥 무슨 바람이 부신 것 뿐이려나?
아서가 수련 과정에서 엉망이 된 차림을 대충 정리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세실이 그의 앞까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그래. 동생아. 혈색이 좋아 보이는 구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가족을 보러 오는 데 이유가 필요하더냐?”
“필요하지요.”
세실의 미소에도 아서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에게 당했던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 편히 대할 수가 없었다.
“하. 그래. 알겠다. 이번 던전학 시험의 설계자가 루시 알른이라고 들었다.”
“..예.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녀석에게 전해다오. 네가 만든 던전을 누구보다도 먼저 공략해 보이는 것으로 이전과 달라졌음을 증빙하고 다시금 대결을 청하겠다고.”
웃음기 하나 없는 진중한 어투를 들은 아서는 자기도 모르게 날선 목소리를 냈다,
“2왕비님의 뜻입니까?”
아직도 어머니의 품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냐는 의미가 담긴 무례한 질문.
이전의 세실이었다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터이나 오늘의 그는 달랐다.
아서의 사나운 눈빛을 본 세실은 화를 내긴 커녕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니. 어머님께선 그냥 가만히 있길 바라신다. 공개된 장소에서 이런 소리를 지껄였단 걸 아시면 한숨을 흘리시겠지.”
“그럼 왜.”
“자존심 문제다. 동생아. 신하에게 무시당하는 군주는 내 취향이 아니거든.”
이번에야말로 승리할 것이란 세실의 다짐에서 아서는 자신을 보았다.
언젠가 루시 알른을 넘어선 후 그녀가 감추고 있는 걸 듣고자 하는 스스로를.
그를 본 순간 아서는 자신의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용무라면 루시 알른에게 직접 전해도 될 터인데요.”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불길을 따라 아서의 주변에 오러가 발현되지만 그를 앞에 두고서도 세실은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다.
“나도 안다. 동생아.”
허세는 아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음을 알면서도 굳이 나를 전령으로 쓰려했어.
그렇다는 건 목적이 다른 부분에 있다는 것일 텐데.
세차게 돌아가던 아서의 뇌는 채 1초가 지나기 전에 결론을 내놓았다.
“이겨보란 겁니까?”
선전포고. 가만히 있으면 네가 신뢰하는 사람을 빼앗길지도 모르니 최선을 다해 발악해보라는 것.
이번 방문을 그리 해석한 아서가 분노를 담아 목소리를 내자 세실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자신의 오러를 주변으로 퍼트렸다.
“동생아. 루시 알른에게 입은 은혜 중 일부를 갚는 셈치고 특별히 알려주는 정보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중앙정치와 차단된 넌 모르고 있을 테지만 널 진지한 위협이라 여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말에 아서가 눈을 끔뻑이는 동안에도 세실은 작고 선명한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네가 솔라딘의 핏줄을 잇고 있는 한 언제까지고 선택을 미룰 순 없을 테지.”
말을 끝마친 세실은 자신의 오러로 아서의 오러를 짓눌러 없애버린 후 장난스런 웃음과 함께 아서의 어깨를 두드렸다.
“쉬이 말해 루시 알른을 소중히 여긴다면 노력하란 이야기다.”
“…여기서 갑자기 그 녀석의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 겁니까?”
“관심 있는 거 아니었느냐? 루시 알른을 볼 때마다 얼굴이 벌게진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성격 더러운 녀석에게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까!?”
“아. 설마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취향인 게냐? 혹시 프레이 켄트를 옆에 두는 이유도.”
“대체 절 무슨 인간으로 만들려 그러시는 것인지요?!”
당황해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아서를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바라보던 세실은 용건이 끝났으니 가보겠다며 훌쩍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소나기처럼 왔던 세실이 사라진 후. 그 옆에서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던 조이가 조심스레 아서에게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나요?”
“…못 들었나?”
“중간에 2왕자님께서 자신의 오러로 소리를 가로막으셨습니다.”
…내 추측이 틀렸나?
선전 포고는 표면상의 이유고 진짜 전하려던 건 그 뒤의 이야기?
아니 그렇지만 형님께서 저걸 내게 알려 주실 이유가.
“하아. 젠장. 의중을 모르겠군.”
평소 나를 지워버려야 할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던 형님이 왜 갑자기 저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많아서 섣불리 추측을 하는 것도 불가능해.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긴 하군.
“던전학 시험의 던전을 공략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어.”
형님이 의기양양하게 루시 알른에게 말을 거는 꼴을 볼 순 없지.
그랬다가 또 무슨 사건 사고가 일어나려고.
이번에도 루시 알른이 병신왕자란 소리를 지껄이며 문제를 일으키면 나한테까지 피해가 생긴단 말이다.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을 거듭하던 아서는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촉감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프레이가 서 있었다.
“저기 3왕자님. 방금 전 말이 진짜야?”
“무슨 말을 이야기하는 게냐.”
“자그마한 여자애가 취향이라는 말.”
“…내가 그런 변태처럼 보이는가?!”
아서가 기겁을 하며 소리치자 이번엔 조이가 슬며시 목소리를 냈다.
“그치만 3왕자님…”
“뭐냐!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는 게 더 짜증나니 말해라! 빨리!”
조이를 향해 버럭대던 그는 자신의 등을 두드리는 촉감에 잔뜩 미간을 찌푸린 상태에서 고갤 돌렸다.
“이번엔 누!… 어. 성녀님?”
“솔라딘의 3왕자님. 괜찮습니다.”
“예?”
“취향은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이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아닙니다! 제 취향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단 말입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오오!”
*
추가된 리소스에 내가 바라는 내용을 추가하는 건 그리 고된 일이 아니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타협해야했던 여러 기믹을 다시 집어넣으면 될 뿐인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던전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게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하게 될 정도였지.
힘들었던 건 그와는 전혀 다른 쪽이었다.
바로 각 학년에 맞추어 던전의 난이도를 조정하는 것.
소울 아카데미는 일정 이상의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윗 학년으로 올라갈 수 없게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윗 학년으로 올라갈수록 평균적인 실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단 거지.
이런 상황에서 2,3학년을 1학년을 위해 만든 던전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겠어.
기믹을 중심으로 해결해야 하는 던전을 무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게 된다고.
그러니 2,3학년 용 던전은 그들이 기믹을 사용하게끔 강제하기 위해 몬스터의 강함을 늘려야만 했지.
문제는 내가 밸런스를 맞추는 데 서투르단 점이었다.
2,3학년쯤 되면 이 정도는 해야지. 라고 판단해서 난이도를 높였더니 이런 건 아무도 클리어 할 수 없을 거란 이야길 들었거든.
덕분에 수정작업만 몇 번을 했는지.
교수들이 난이도 수정하겠단 제안을 걷어차고 내가 고생을 자처한 게 아니었더라면 몇 번이나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거야.
뭐 어쨌든 그렇게 고생을 한 덕분에 내가 설계한 던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작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 주 가량이 지나 던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아 물론 아직 완성이 된 건 아니다. 던전이 설계에 맞게 제작되었는 지를 확인하고 문제점을 수정하는 절차가 남아있거든.
<일을 앞두고 있음에도 신이 나 보이는구나.>
‘그야 제가 제작한 던전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 거잖아요! 어떻게 신이 안 나겠어요!’
자아. QA시간이다.
내가 설계한 던전이 제대로 완성되었는지 확인해보자고.
만약 던전을 제작하는 측에서 대충 일을 한 게 눈에 보인다면.
그 땐 내가 직접 그 녀석들을 채찍질해서 제대로 된 던전으로 탈바꿈 시킬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