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3
테스트를 위해 던전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주변의 풍경이 뒤바뀐다.
어느 고즈넉한 저택의 모습.
내가 이미지 했던 그대로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여러 그림들도.
살짝 어두워서 자연스레 형성된 무거운 분위기도.
발을 움직일 때마다 주변으로 퍼졌다 돌아오는 울림도.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 절로 입꼬리가 위쪽을 향했다.
던전학 교수가 보면 놀라게 될 거라 그랬었는데 진짜네.
아카데미에서 만든 던전에 발을 디뎠을 때랑 내가 설계한 던전에 발을 디뎠을 때랑 느낌이 전혀 달라.
두근대는 마음으로 복도를 걸으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즐기고 있으려니 할배가 놀랍다는 듯 살짝 높아진 목소리를 냈다.
<대단하구나. 어찌 그딴 그림을 보고 이런 것을 만들 수가 있는 건지.>
‘그딴 그림이라는 게 설마 제가 그린 던전의 배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당연한 걸 왜 묻느냐. 5살짜리 꼬마아이가 흙바닥에다 그린 듯한 그 그림을 이야기한 것이지.>
‘5살짜리 애는 그런 거 못 그리거든요?!’
내 그림 실력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뛰어다니기만 할 아이보다는 나아!
최소한 나는 투시라는 것도 알고! 원근도 알고! 세부적인 묘사라는 것도 안단 말이야!
물론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니고 얼핏 아는 것도 써먹을 줄 모르지만 어쨌건 앞뒤도 모르는 꼬맹이들이랑 비교할 건 아니라고!
<내가 아는 어느 아이는 5살 때에 혼자서 명암의 묘사를 깨우쳤었다.>
‘…그건 그 사람이 정신 나간 천재인 거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지만 네가 5살짜리 꼬마애보다 못한 건 사실이 되지 않으냐.>
‘그런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세상 대부분 사람들이 5살짜리보다 못하게 되거든요?!’
할배의 억까에 반박을 하면서 던전의 풍경을 눈에 새긴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니 세밀한 부분이 눈에 들어오네.
디테일적인 부분에서 약간 아쉬운 것들이 있어.
특히나 이 마지막 초상화 아래의 연도는 나중의 단서 중 하나가 되는 내용이라 정확해야 하는데.
나중에 수정 요청을 할 수 있도록 메모장에 기록해두도록 할까. 그렇게 몇 분 정도 복도를 걸으니 막다른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벽의 앞에 있는 텅 빈 요람으로 향해 그 안에 담긴 종이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 미로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선 출구를 찾아내야 한다.
누군가 ‘그것이 미로니까’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문구를 다 읽은 순간 저택의 풍경이 무너져내리고 그 자리를 다른 것이 대체했다.
카펫이 있던 자리에 벽돌이 생겨나고.
주홍색 벽이 흩어지며 어딘가에 있을 법한 훈련장이 모습을 드러냈고.
초상화가 있던 자리에는 수많은 병사들의 얼굴이 새겨졌다.
배경의 전환도 깔끔하네.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한 듯한 느낌을 주잖아. 이걸 처음 보는 학생이라면 분명 감탄사를 내뱉겠지?
후흫. 기대된다. 나중에 조이한테 어땠었냐고 꼭 물어볼 거야.
“이봐! 거기! 멍 때리고 있을 시간 없어!”
호들갑떠는 조이의 모습을 상상하던 중 저 멀리에서 거친 인상의 기사가 목소리를 드높였다.
“오늘 시험을 치르는 게 너 뿐인 줄 아나?!”
그가 목소리를 이음에 따라 내 앞에 한 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된 훈련을 받은 듯 위압적인 근육.
창대를 잡은 손에 새겨진 굳은 살.
움직임 사이사이에 묻어나는 무재.
누가 보더라도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을 병사는 자세를 취하자 저 먼 곳에 있는 기사가 재차 소리를 내지른다.
“바로 시작하겠다!”
‘저기요…’
“어이. 거기 목청만 큰 멍청이 기사. 무슨 시험을 말 하는 거야?”
“방금 전에 이야기해준 것조차 잊은 거라면 그냥 떨어지는 게 나을 터! 알아서 해라!”
좋아. 튜토리얼도 내가 생각한 그대로 되어 있네.
시험을 치른다 그래놓고 내용은 안 알려주는 불합리함이 마음에 들어.
저 기사는 무슨 수를 써도 시험의 내용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 때문에 던전을 공략하러 온 이들은 스스로 시험의 내용을 알아내야만 하지.
세세한 부분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고갤 주억거리고 있으려니 내 앞에 선 병사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다고 하시네. 준비는 됐어?”
‘네. 물론이에요.’
“너 따윌 상대하는 데 준비가 왜 필요해? 덤벼. 이런 작은 여자애한테 쫀 건 아닐 거 아냐.”
혀를 찬 병사가 내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꺼내든다.
저 멀리에서 내질러지는 창은 한 눈을 판 순간 그대로 심장에 구멍을 낼 것처럼 날카롭다.
허나 그 날카로움의 기반이 되어야 할 위력 자체가 부족할 지어니.
저 창을 막아내는 데에 대단한 기술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그저 방패를 내미는 것으로 족해.
채앵! 방패에 부딪힌 창끝이 방패를 꿰뚫지 못한 채 위쪽으로 튕겨나간다.
그에 따라 병사의 몸에 거대한 빈틈이 드러났다.
으음. 아무리 튜토리얼이라지만 상대가 너무 약한 거 아닌가?
이래서야 누가 시험의 조건을 알아내려 하겠어. 그냥 병사를 박살낸 후에 지나가려고 하지.
기믹을 알아내서 돌파해야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한 튜토리얼이 이래선 곤란해.
난이도 좀 높이라고 그래야겠다.
그리 판단을 내린 나는 당혹이 서린 병사의 눈을 향해 내달려선 그의 갑옷 오른쪽에 설치된 나무판을 박살냈다.
“첫 번째 시험은 끝났다! 훌륭하게 통과했군!”
그러자 처음 마구잡이로 소리를 내질렀던 기사가 시험의 종료를 알렸다.
아직 던전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지만 큰 틀 자체는 제대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아.
디테일적인 부분만 좀 수정하면 내가 생각한 던전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겠네.
“그럼 바로 다음 시험을 진행하겠다!”
이후의 튜토리얼도 첫 번째 튜토리얼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기믹 자체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만 병사들이 너무 약해.
아무리 1학년이 공략하게 될 던전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 쉽게 만든 거 아냐?
던전을 제작한 사람이 1학년을 무시하는 거 아닌가 싶은 수준이라고.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 약하지 않아요?’
<확실히 약하긴 하구나. 이 정도면 누구라도 무력으로 깨부술 수 있을 터.>
‘그쵸? 제 기준이 높은 거 아니죠?’
던전 공략이 끝나면 바로 던전학 교수를 찾아가서 튜토리얼의 난이도를 높이는 게 맞겠단 이야기를 전해야겠어.
이래서야 튜토리얼이 튜토리얼의 역할을 할 수 없을 테니까.
“…축하한다. 그대는 모험가가 되기 위한 시련을 넘어섰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기사를 박살내는 것으로 튜토리얼을 끝마친 순간 또 다시 주변의 풍광이 바뀐다. 이번의 모습은 어두칙칙한 동굴이다.
숨이 막힐 듯 희박한 공기.
광원이라고는 천장에서 내리쬐는 희미한 불빛 뿐.
이 불길한 풍경이 마음에 들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나는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돌렸다.
동굴의 어둠 속에 자리한 붉은 색의 눈동자는 내 손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을만큼 거대하다.
강철마저 가벼히 꿰뚫어버릴 듯 위협적인 송곳니.
철사로 만들어진 듯 억세 보이는 털.
돌로 된 동굴의 바닥을 흙바닥 마냥 긁어대는 발톱.
누가 보더라도 공포를 느낄 광경을 눈에 담고 있으려니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아 정말.
이렇게 잘 만들어두면 곤란하다고.
이래서야 이 너머에 있을 게 기대돼서 침착을 유지할 수가 없잖아.
원래는 던전을 공략하는 것보다 QA쪽에 집중을 할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지금 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여러 디테일을 세심하게 바라볼 수 없어!
그러니 일단은 던전을 공략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찬찬히 둘러보며 디테일을 보충하는 거지!
그렇게 결심을 내린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메이스를 다잡았다.
*
“안 돼요! 교수님! 그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쓸 수는 없!…”
악몽 속에서 간신히 깨어난 던전학과의 대학원생 마르겐은 자신이 꿈을 꿨을 뿐임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끔찍했어. 교수님께서 내가 작성한 논문을 찢어버리고 이딴 건 논문이라 부를 수 없으니 처음부터 다시 써오라 명령하는 꿈이라니.
만약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난 당장 창문을 깨부수며 뛰어내려 버렸을 거야.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낸 마르겐은 기지개를 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사람들이 시체마냥 널부러져 있었다.
모두들 기말고사의 던전을 만들기 위해 며칠 밤을 새고서 뻗어버린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시체 무리의 일각을 차지했던 마르겐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를 기억했다.
이 참상의 시작은 알른 가문에 속한 루시라는 영애가 만들어낸 던전이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던전은 던전학이라는 학문을 전공하는 이라면 누구나 감탄사를 내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처음 그 던전을 본 마르겐은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이 지닌 재능을 질투하게 되었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여러 대학원생들의 감탄사는 지도 교수님께서 연이어 꺼낸 말을 들은 순간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자. 이제 자네들이 이 던전을 직접 만들면 된다네. 어떤가? 이 예술 작품을 직접 만들게 되다니 기쁘지 않은가?’
학문의 길을 걷는 이들이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던전이라는 것은 그만큼이나 해괴하고 까탈스러운 던전이란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것도 기말고사를 치르기 2주전까지?!
그 일정에 맞추려면 퇴근을 못 하는 수준이 아니라 작업 기간 내내 잠을 포기해야 하는 수준인데!?
지도 교수의 이야기를 들은 대학원생들은 모두들 머릿속으로 비명을 내질렀지만 정작 지도교수에게 불만을 표한 이는 없었다.
오랜 기간 대학원생 생활을 해 온 그들은 이미 노예처럼 부려 먹혀지는 것에 익숙했던 것이다.
그렇게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하루에 한 시간 자면 많이 잤다며 구박을 듣는 생활을 하길 며칠이나 했을까.
어제에 이르러 대학원생들은 던전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교수에게 넘긴 후 모두들 기절하듯 뻗어버렸다.
어디 보자. 지금 시간이 오후 4시인가.
거의 반 나절 동안 뻗어 있었네.
근데 왜 아직도 눈이 저절로 감기는 걸까.
흐아암. 던전의 설계를 맡은 알른 영애가 직접 공략을 하며 수정할 부분을 알아본다고 그랬었으니까 QA에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그러니 조금은 더 자도 괜찮겠지.
이대로 내일 아침까지만 자야겠다 생각을 한 마르겐이 다시금 눈을 감은 그 순간.
“일어나. 노예 보다 못한 대학원생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마르겐의 귓가에 선명하고 아름다우며 얄미운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허접한 너희들이 내가 만들어낸 멋진 던전을 얼마나 쓰레기로 탈바꿈시켰는지 확인했어.”
…벌써?
벌써 던전의 확인을 끝마쳤다고?!
그 던전의 난이도를 생각해보면 결코 이 시간에 QA를 완료할 수 없을 텐데?!
“제대로 된 논문도 쓰지 못하는 개허접들치곤 노력한 거 같지만. 그래봐야 개허접이란 사실이 달라지진 않잖아? 이 착하디 착한 내가 수정할 부분을 알려줄 테니까 그 작달만한 뇌에 새겨넣도록 해.”
루시 알른의 의기양양한 눈빛을 본 순간 마르겐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가 제대로 된 잠을 자기 위해선 며칠을 더 고생해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