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4
“2왕자저하께서 절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파트란 공작 가문의 공자. 제프 파트란은 자신의 앞에 자리잡은 2왕자를 보고 짐짓 놀랍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설마 내가 먼저 마법사를 찾게 될 줄이야.”
평생 왕궁에서 여러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해 온 세실은 마법사라는 존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세실은 굳이 제프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제프도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없다시피한 2왕자와 친하게 지내봐야 얻을 것이 없다 생각했기에 굳이 2왕자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래서 2년 동안 자주 얼굴을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남남이나 다름없었다.
“용무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추측하고 있지 않나. 던전과 관계된 일이다.”
“함께 파티를 맺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마법사를 좋아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세실은 제프의 실력을 인정했다.
그와 파티를 맺을 수 있다면 분명 던전 공략을 하는 데에 한층 더 속도를 낼 수 있을 터.
그리 판단을 내렸기에 세실은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고 직접 제프를 만나러 왔다.
“의외네요. 2왕자저하께서 장신구에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비꼬는 듯한 그 어투 안엔 평소 마법사를 무시하던 세실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향한 비난에 민감한 세실은 그 의도를 순식간에 알아차렸지만 화를 내는 대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생각이 맞다. 내가 노리는 건 던전의 최초공략자라는 명성뿐이지.”
“그렇군요.”
제프는 세실의 표정과 태도를 살피면서 머리를 굴렸다.
평소의 2왕자라면 이쯤에서 성질을 냈어야했을 텐데.
그만큼이나 다급하고 간절한 상황이라는 건가.
확실히 2왕자는 무예 쪽에 너무도 치중한 나머지 정치나 교섭 같은 것에 서툴군.
이렇게 약점을 내비치면 물어뜯기가 너무도 편하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2왕자저하.”
일단 2왕자의 파티에 들어가는 것은 확정이다.
왕이 될 가능성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공작과 왕의 피를 이은 남자니까.
은혜를 입혀둬서 나쁠 것 없지.
“제안을 주신 것은 너무도 영광스럽습니다만.”
다만 바로 고개를 끄덕여선 안 된다.
그래서야 2왕자 스스로 빚을 졌단 느낌을 받지 못할 테니까.
여기서 두 번 정도 튕기며 안달이 나게 한 후에 고개를 끄덕이는 게 맞아.
“이미 함께하기로 한 이들이 존재하는지라.”
겸사겸사 장신구에 대한 권리를 어느 정도 챙기는 것도 괜찮겠네.
예술 교단의 사도가 만들어낸 장신구는 아름답기로 유명하니까.
동생에게 준다면 분명 기뻐하겠지? 어쩌면 오라버니 너무 좋아!라면서 달려들지도 몰라.
조이가 과거 어렸을 때처럼 애교부리는 모습을 상상하던 제프는 속으로 웃음을 지으면서 겉으로는 너무도 아쉽다는 듯 팩 한숨을 내뱉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조이가 관계되지 않은 그는 이토록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
아카데미 2학기 던전의 100층.
그 곳을 지키던 보스가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바깥으로 나가는 입구가 생겨난 걸 확인한 아서는 치켜든 검을 내렸다.
“드디어 아카데미 던전을 공략하는데 성공했나.”
정말 길고도 힘겨운 여정이었다.
구체적으로 한 사람 때문에 너무도 고된 나날들이었지.
짜게 식은 아서와 눈을 마주한 프레이는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는 듯 고갤 갸웃거렸다.
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 너무도 열이 받는다.
저 녀석의 돌발행동 때문에 몇 번이나 위기를 맞이했던가.
루시 알른과의 내기 때문에 저 녀석이 지시를 따르게 되어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80층 부근을 헤매고 있었을 거다.
“3왕자님. 역시 작은 걸 좋아하는.”
“질책의 의미로 노려보는 거다! 프레이 켄트!”
프레이의 엉뚱한 말을 들은 아서가 버럭 소리를 내지른다.
“질책? 나 오늘 잘했잖아?”
“그래. 오늘은 잘했지. 그렇지만 이전에는 제멋대로 움직이며 온갖 사건사고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지나간 일에 집착하는 건 안 좋은 버릇.”
“…하아아. 던전의 보스가 그대보다 말이 더 잘 통했던 것 같은 기분이야.”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단 생각에 아서가 한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조이가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이젠 합이 맞는단 느낌이 드니까요. 이대로 간다면 던전의 공략도 수월하겠죠.”
“그래. 최소한 루시 알른이 만들어낸 던전을 공략할 때까진 이 짐승이 협조적일 테니까.”
프레이를 향한 직설적인 무시에 페이비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낸다.
“3왕자님. 아무리 그래도 켄트 영애를 짐승이라 하는 것은.”
“성녀님. 말은 통하지 않지만 송곳니만은 날카로운 존재를 짐승 이외에 무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으.”
페이비는 차마 아서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여태까지 프레이 때문에 생겨난 사건 사고가 한 둘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일단 성녀님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동료를 짐승이라 부르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니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페이비에게 괜찮다 손을 내저은 아서는 자신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서 기지개를 켰다.
던전 공략을 결의하고서 요 몆 주간 우리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거듭했다.
그리고 이제 며칠 후면 이 노력의 결실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 되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내일부터는 컨디션을 관리하는 데 주력하도록 합시다.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
‘할아버지. 큰 일 났어요.’
<왜? 또 주신께서 계시를 내리셨느냐?>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기말고사 대비를 아예 안 했어요.’
요 근래 던전을 제작하는 데에 몰두했던 것이 문제였다.
평상시라면 그래도 공부하는 시늉 정도는 했을 터인데 던전을 제작하는 것에 온 신경을 쏟느라 아예 다른 과목에서 손을 떼어버린 것이다.
‘저 지금 기말고사 시험범위가 어딘지도 몰라요! 어떡하죠? 어떡하면 좋죠?!’
<무얼. 어떡하긴. 평소처럼 찍으면 되지 않으냐. 그대의 운이라면 대충 번호를 골라도 어느 정도 성적은 나올 터. 아님 지금부터라도 공부를 하거라.>
공감 능력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할배의 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럴 땐 자기가 알려줄테니 걱정하지 말라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무심하니까 평생 인기가 없었지. 배려심 없는 꼰대 할배 같으니라고.
<…이상한 생각을 하는 듯 하다만.>
‘쓸데없이 이런 거에만 눈치가 빠르시네.’
<지금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기분 나쁘다니!>
‘엑. 실수했다.’
<안 되겠다! 앉아보거라! 내 그대의 정신적 성숙을 위해 신경 쓰고 있거늘 그대는!…>
*
아카데미 기말고사가 시작되는 날의 아침.
평상시였다면 모두들 도서관이나 방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고 있을 시간이지만 이번 기말고사엔 그렇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어느 정도 무력을 지녔다 자부하는 이들이라면 모두들 던전학 시험이 치러질 장소의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까.
“…히에엑. 사람들이 뭐 이리 많아.”
뒤늦게 던전학 시험 장소에 도착한 비시는 길게 늘어져있는 줄을 보고서 기겁을 했다.
– 이래서야 던전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겠는데요?
“그러게.”
기말시험을 치르기 전에 이번 던전학 시험이 어떤 던전일지 보기나 하자고 친구들과 약속한 비시였지만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듯 싶었다.
이래서야 입장하는 것을 기다리다가 시험을 치르러 가야 할 게 뻔했으니까.
“나중에 던전 들어가 봤던 사람 이야기나 들어봐야겠네.”
비시는 질린다는 듯 줄을 선 사람들의 면면을 눈에 새겼다.
라흐비 공작 가의 쿠르텐 공자님이 계신 걸 보면 저 쪽이 3학년 줄인가.
우와. 졸업시험 준비하시느라 개인실에서 나오질 않는 3학년 선배님들이 잔뜩 있네.
모두들 던전 최초 공략의 보상을 노리고 계신 거겠지?
예술 교단의 사도께서 직접 제작하신 장신구가 매력적이긴 해.
사도께서 인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억만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니까.
2학년 줄 맨 앞에 서 계신 건 역시 2왕자님이시네.
평상시 같았으면 자기 세력하고 같이 움직이실 분이 이번엔 파트란 공자님처럼 2학년의 순위권을 차지한 분들을 대동하고 오시다니.
이번에 엄청 진심이시구나.
2왕자님은 장신구 같은 거에 관심 없을 듯하단 이미지였는데 의외.
그리고 1학년 줄 맨 앞에 있는 건 3왕자님 일행이신가.
파트란 영애. 성녀님. 켄트 영애까지.
알른 영애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렇지 저분들도 괴물인 건 다르지 않아.
…학년 전체 1등은커녕 1학년에서 가장 빠르게 던전을 공략하는 것도 불가능하겠네.
장신구를 팔아서 사령술의 재료를 사겠단 계획은 폐기해야겠다.
원래부터 안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각 학년의 강자 분들이 저렇게 의욕이 넘쳐서야 불가능하지.
막말로 사령술사라는 사실을 들킬 걸 각오하고 아드리의 도움을 받아도 최초 공략자가 되는 건 어렵지 않을까.
– 어떤 던전이냐에 따라서 다르죠.
“…아드리. 내 생각 읽지 말아달라고 몇 번 말했던 것 같은데.”
– 미안해요. 그치만 자연스럽게 들리는 걸요.
어깨를 늘어트리며 사과하는 아드리의 모습에 비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간의 연결이 강해진 게 아드리의 잘못은 아니지.
당장 나도 아드리가 살아있을 때의 추억을 꿈에서 보고 있으니까. 그녀가 행복했던 시절을 말이야.
“됐어. 어쨌건 아드리 네가 전력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최초 공략도 가능할 것 같단 거지?”
– 네. 이래뵈도 저 엄청 강하거든요!
자신만만하게 허리를 피는 아드리를 본 비시는 웃음을 흘렸다.
“그 힘은 2학년이 돼서 외부던전을 공략하게 될 때 보여줘.”
– 기대하고 계세요!
“응. 기대할게.”
“비시!”
아드리에게 대답을 건네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뒤편에서 비시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갤 돌리니 줄 한 가운데에 비시의 오랜 친구들과 최근 루시에 의해 반 강제로 떠맡게 된 여자아이가 함께 서 있었다.
“일찍 나왔나보네. 꽤 앞이잖아.”
“벨마가 새벽부터 줄을 서주고 있었어.”
“…진짜?”
“네. 이러지 않으면 던전에 들어가지도 못할 것 같아서.”
“덕분에 기말고사 시험치러 가기 전에 던전 구경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와아. 고마워! 벨마!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에헤헤. 별 것도 아닌걸요.”
“새벽부터 기다린 게 별 거 아니면 지금 비적비적 나타난 비시는 뭐가 돼!”
“맞아! 너 지금 우리 비시가 게으르다고 욕하는 거니?”
“에?! 아니. 아니에요!”
“벨마. 당황하지 마. 성격 나쁜 이 둘은 그냥 날 욕하고 싶을 뿐이니까.”
비시는 그리 이야기를 하며 벨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어찌할 줄을 몰라하던 벨마가 실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나쁘다니!”
“제일 나쁜 건 늦게 등장해놓고 착한 척하는 너잖아!”
“와아. 저기 봐. 던전학 조교들이 오고 있어. 이제 시작할 건가봐.”
“야! 말 돌리지 마!”
“진짜 속이고 겉이고 시커매서는!”
“…겉이 시커멓다는 건 뭔데!”
“여러분들? 진정! 진정하세요!”
비시와 친구들 사이의 목소리가 높아지건 말건 조교들은 교수들이 명한 대로 이리저리 움직였고 그렇게 기말고사 던전학 시험을 치르기 위한 던전이 학생들에게 개방되었다.
그리고 나서 반 나절 가량이 지났을 무렵.
던전의 최초공략을 위해 필사적으로 내달리던 이들은 이 던전이 왜 기말고사 내내 개방되는 것인지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