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을 부수러 갈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하늘에서 보라색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얼음 왕좌 위로 보라색으로 빛나는 신기한 달이 떠올랐다.
색깔만 특이하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 달빛은 그림자가 생기질 않았다.
돌 밑에도 달빛이 닿았다.
그림자가 당연히 생겨야 하는 곳에도 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아서, 현실감이 없고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색도 보라색이라서 그래픽 카드가 망가진 게임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림자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군데군데 얼룩이 묻은 것처럼 그림자가 생겼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 그림자들은 보라색 달의 무늬였다.
처음부터 빛이 얼룩덜룩하게 쏘아지니,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었다.
그림자가 신기해서 만지려고 달려가니, 그림자가 나를 피해서 주르륵 거리를 벌렸다.
장승도 그러더니 이 그림자도 이러네.
내가 뭘 잘못 했다고 이러는 거야?
바닥에 생긴 그림자를 한 번 밟아보겠다고 나는 계속 달렸고, 그림자는 나를 피해서 계속 도망쳤다.
이 추격전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해가 뜬 뒤에 남은 것은 내 발자국이 가득한 설원뿐이었다.
***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공터 중앙을 보자, 볼품없이 부스러진 장승이 놓여있었다.
장승은 파괴되었다.
장승이 비치지 않는 거울을 모아서 거대한 거울을 만들고, 거울에 비친 장승을 다시 거울에 비추자 문제가 해결되었다.
실체가 없던 장승은 그 본체를 현실에 드러낸 채, 박살난 것이다.
하하. 드디어.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밤이 와버렸다.
도봉구의 밤은 매우 위험했다.
‘설원의 달’이라는 오브젝트 때문이었다.
그 보라색으로 빛나는 달은 지구 어디서든 ‘설원’에 밤이 도래하면 나타나는 오브젝트였다.
그 보라색 빛은 건물 속에서도 피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설원’이 있는 곳은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역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저 ‘설원의 달’이 뜨는 ‘설원’의 조건은 확실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설원이 아닌데도 나타기도 했고, 설원이 확실한 극지방에서 안뜨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 지역에서 직접 관측하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는 오브젝트였다.
확실한건, 눈으로 덮인 도봉구에는 언제나 설원의 달이 뜬다는 점이었다.
눈꺼풀도 뚫고 들어오는 저 보라색 빛은 불면증을 유발할 뿐,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위험한 건 보라색 빛과 같이 나타나는 그림자였다.
“달이 뜬다! 모두 모여!”
공터에 둥글게 모여서 서로를 마주 본다.
그리고 쇠말뚝을 주변에 박아 넣고 몸을 고정했다.
모여 앉은 중심에는 토템처럼 생긴 장치를 하나 설치했다.
미국에서 수입해온 오브젝트의 정신 간섭을 막는 장치였지만, 임시방편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이런 물건이라도 만들 수 있는 것도 대단한 것이긴 했다.
한국에서는 오브젝트가 어떤 것인지 감조차 잡지 못하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설원의 달이 만드는 그림자는 무저갱이다.
밟으면 그대로 푹 꺼져서 어디론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행히 그림자가 움직여서 사람들을 습격하지는 않지만, 그림자는 사람을 끌어당겼다.
비유를 하자면 어긋난 타일을 맞추고 싶은 기분이랑 비슷하다.
무저갱의 그림자를 바라보다보면, 그 그림자는 점점 자신에게 딱 맞는 구멍같이 느껴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그 부분을 딱 맞춰서 채우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것이다.
그 충동은 장치의 도움 없이 버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밤은 길다.
부디 이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기를.
근처의 요원들이 발버둥치는 게 느껴진다.
몸을 말뚝으로 고정하긴 했지만, 마음먹고 뛰쳐나간다면 막을 수 없다.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보라색 빛은 눈 안으로 들어왔고, 그림자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아도 자신에게 딱 맞는 구멍은 보였다.
지금 내… 내 앞에 있는 구멍처럼 말이다.
보라색으로 완벽한 세계에 뚫린 구멍.
저 구멍만 막으면 완벽할 텐데.
‘왜 저런 구멍이 뚫려있는 거야?’
나는 허겁지겁 쇠말뚝에 고정된 핀을 하나둘 해방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앞에 내가 막아야만 하는 구멍이 있어.’
‘그래 나만이 막을 수 있는 구멍이야.’
머리 한 쪽에서는 이 모든 것이 내 착각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구멍 앞에 도착했다.
‘그래 이 구멍이야! 나에게 딱 맞는 구멍.’
구멍의 경계면을 슬쩍 손가락으로 훑는 순간, 세계를 가득 메우던 보랏빛은 사라졌고 아침 해가 저 멀리서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깜짝 놀라서 지면에서 손을 뗐다.
그야말로 구사일생이었다.
밤사이에 요원들이 5명이나 사라졌다.
다행히 임무 실패라고 할 정도의 인원 손실은 아니었다.
왕좌 파괴 작전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
***
그림자와의 술래잡기가 끝나고 높은 잔해 위에 누워있으니, 아침 해가 내 피부를 데우는 게 느껴졌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아래쪽을 바라보니, 왕좌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왕좌 근처는 영하100도 아니었나? 아니면 영하 100도인 곳은 따로 있는 건가?
잠을 거의 못 잔 것 같은 분위기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왕좌 주변에 뭔가를 설치하고 있었다.
설치하는 물건은 오브젝트였다.
척 보기에도 폭탄처럼 생긴 오브젝트였다.
다이너마이트 다발처럼 정직하게 생긴 폭탄.
미사일 같은 걸로는 왕좌를 제거할 수 없으니, 오브젝트를 동원하는건가?
근데 저 왕좌는 오브젝트가 아니니까, 완전 헛수고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사람들의 헛수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누군가 한명쯤은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볼 법도 했다.
하지만 폭탄 설치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지,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쿠웅.
그 순간 대지가 맥동하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육지에서 해일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건물은 파도를 타고 무너져 내리고, 땅은 둥글게 말려들어갔다.
먼지가 되어 휘날리는 파편은 파도치며 앞으로 그 잔해를 밀어붙였다.
육지에서 먼지로 이루어진 거대한 해일이었다.
해일의 맥동에 닿은 물체는 가루로 변해서 흩어졌다.
콘크리트나 아스팔트 같은 문명의 잔재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물론 인간이 만든 오브젝트 폭탄도 마찬가지였다.
안 돼!!!!
어떤 남성의 비명 소리가 도봉구에 울려 퍼졌다.
***
“안 돼!!!!!!!”
나는 허망하게 흩어지는 오브젝트 폭탄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손으로 흩어져버린 폭탄을 더듬어도 먼지가 돼 버린 폭탄은 돌아오지 않았다.
요원들을 여럿 희생하면서 도착한 왕좌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먼지의 폭풍이 밀어닥쳐 주변을 어둡게 만들었다.
왕좌를 짊어지고 있던 얼음 병사들도 먼지가 되어버려, 왕좌가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충격파와 풍압에 나와 대원들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바닥에 처박힌 채 올려다보니 노랗게 빛나는 빛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화산재처럼 태양을 가린 먼지 구름 속에서 노랗게 빛나는 불빛이 내 눈에 들어왔다.
“회… 회색 사신!”
회색 사신은 높은 곳에 서서 우리들을 비웃는 것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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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사신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던가?
오브젝트 폭탄은 물론이고, 장비 중이던 전자기기와 화기들까지 모두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건 서울 숲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여기는 서울숲과 거리가 충분히 멀었다.
이 특이한 사건은 반드시 보고해야만 하는 중대 사항이었다.
회색 사신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강철탑의 소행으로 보이는 현상.
방금 충격파로 통신장비도 모두 바스러져서, 보고를 위해서는 직접 돌아가서 전해야만 했다.
보고와 차후 대처를 위해서, 최대한 요원들을 온존해서 돌아가야만 했다.
“작전은 실패다. 돌아간다.”
나와 요원들은 회색 사신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천천히 후퇴했다.
그렇게 분루를 삼키며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이 대지의 맥동은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래, 강철탑의 느낌이었다.
문명을 갈아버리는 강철탑의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강철탑의 영역은 안정화되어 있을 텐데 무슨 일이지?
저런 식으로 강철탑의 영역이 맥동하는 건 처음 봤다.
맥동을 따라서 지면이 가루되는 모습은 마치 육지에서 밀어닥치는 먼지의 해일처럼 보였다.
건물과 아스팔트가 둥글게 말려 바스러지며 파도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신기한 점은 얼음 병사들도 속수무책으로 해일에 갈려 바스러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철탑은 얼음 병사도 문명으로 취급하는구나?
강철탑의 맥동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더욱 파괴된 도봉구의 모습은 더욱 처참한 형상으로 남았다.
하지만 해일이 할퀴고 지나간 도봉구에는 이상한 구조물이 남았다.
도봉구 지하에 개미굴처럼 엄청난 양의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었다.
왠지 느낌이 왔다.
저 밑에 얼음 왕좌의 주인이 있을 거라고.
***
서울은 거대한 위기에 봉착했다.
도봉구에서 시작된 기온 저하?
도봉구에서 시작된 기온 저하는 서울 전역에 영향을 미치지도 못 했다.
근처 일부 지역의 온도를 급격히 낮추고 다시 회복하는 추세였다.
얼음 왕좌의 병사들의 공격?
그것은 현재 군대의 활약으로 충분히 억제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
서울을 패닉에 빠트린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서울 숲의 확장’
서울 숲의 영역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게 관측된 것이다.
마치 심장처럼 맥동하며 점차 그 영역을 늘려가고 있었다.
강철탑의 영역은 펄스파처럼 영역이 순간적으로 늘었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 영역에 한순간이라도 들었던 곳은 문명이 가루로 바스러져버리니 순식간에 넓어진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도봉구의 얼음 왕좌와 싸울 준비를 착실히 해왔던 한국이지만 강철탑에게는 무력했다.
대항할 방법이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