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
머리를 정리해주는 시녀의 손길에 오늘따라 힘이 실려 있다.
평소에는 내가 움직이기 편하게 머리를 만들어주는데 오늘은 주변에 과시하기 위한 머리를 만든다고 해야 할까.
꼭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예술품을 만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녀님…’
“허접시녀. 왜 내 머리로 네 허접한 손기술을 자랑하는 거야?”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렇지만 여기는 아카데미이지 않습니까.”
‘그게 왜요?’
“그게 뭐 어쨌다고.”
“수많은 귀족들이 모이는 이 곳에서 얕보여선 안 되니까요.”
화려하지 않으면 다른 귀족들의 눈총을 사게 된다는 거야?
그러고 보면 게임 내 묘사 중에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귀족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 있긴 했지.
‘겨우 그런 이유인가요?’
“이 짓거리를 하는 게 겨우 그런 이유야?”
“겨우라뇨. 아가씨. 이건.”
‘평소대로 해주세요.’
“평소대로 해놔. 허접 시녀.”
이런 귀찮은 일을 하건 하지 않건 루시의 평가는 달라지지 않는다.
화려함이라는 것은 본래 사람이 지닌 평가를 지키는 데엔 도움을 주지만 이미 바닥에 떨어진 평가를 되돌리지는 못한다.
검소하게 입으면 촌스럽단 소리를 들을 테고, 화려하게 입으면 사치를 부린단 말이나 듣겠지.
사서 고생을 한 후에 악평을 들을 바에야 내 몸이라도 편한 게 낫다.
솔직히 말해서 매일 아침 이렇게 유난을 떨 바에야 그 시간에 달리기라도 하는 게 이롭잖아.
“허나 아가씨.”
얘 예전에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벌벌 떨었었는데 요즘엔 자기 할 말을 다한단 말이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에 있는 장식을 뗴어 내 화장대 위에 내려놓았다.
‘명령이에요. 전 이런 거 없어도 돼요.’
“명령이야. 원래대로 돌려놔. 내가 이런 허접한 장식이 없다고 남들보다 뒤쳐질 것 같아?”
시녀는 내 말을 듣고서 잠시 손을 멈췄다가 이내 내 뒤편에서 허리를 숙였다.
말이 좀 왜곡된 것 같지만 어쨌든 뜻은 통했으니까 괜찮겠지.
*
지난 이 개월 동안 나는 스펙을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매일 같이 달리고, 대련을 하고, 숙련도를 올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런 노력 덕분에 난 내가 목표했던 바를 이루었다.
10레벨에서 가능한 최대까지 숙련도를 올리는 것.
체력. 둔기 숙련도. 방패 숙련도.
이 세 가지 모두를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나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였다.
소울 아카데미의 튜토리얼 이전인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 내가 지닌 능력은 완전히 오버스펙.
입학시험에 나오는 던전에서 최단기록을 내는 건 고블린을 도발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단 걸 알지만 어째선지 나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칼…’
“허접 기사.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그냥 돌아가는 게.”
“아가씨. 중요한 일을 앞두곤 컨디션 관리를 하는 게 중요하단 걸 아시잖습니까.”
<기사의 말이 옳다. 큰 일을 앞두었을 땐 쉬는 것이 최선의 준비다.>
한 사람과 한 메이스의 말이 옳다는 걸 안다.
이제와 몸을 움직인다 해서 나아질 게 없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불안감이 차올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세계는 게임이지만 게임이 아니다.
내가 게임에서 당연하다 생각했던 일들이 얼마든 바뀔 수 있는 세상이다.
여태 내 지식을 믿었다가 당황했던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아카데미 시험에 나오는 던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수를 모두 고려한 상태긴 했지만 그를 돌이켜 볼 때마다 무언가 놓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
역시 안 되겠어.
숙소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점검을 해봐야.
“아가씨! 저기 비공정이 떠다녀요!”
시녀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비공정이 구름을 가르며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눈을 처음 본 아이 같은 반응을 보아 저걸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처음인 걸까.
저거 타봐야 별거 없는데 말이지.
비공정은 게임에서 최악의 효율을 자랑하는 이동수단이었다.
돈은 공간이동마법하고 비슷하게 드는데 일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공간이동마법과는 달리 저건 몇날며칠 동안 하늘을 날아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그야말로 시간과 돈 양쪽 모두를 낭비할 수 있는 사치의 극치라 할 수 있지.
그래서 게임을 할 때 난 비공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소울 아카데미가 현실이 된 마찬가지다.
난 보기에만 그럴 듯한 쓰레기에 탈 생각이 없다.
하늘을 가만 바라보다 고개를 내린 순간 난 처음으로 걱정에서 빠져나와 도시의 정경을 제대로 살폈다.
소울 아카데미는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단순히 학원만 있는 곳은 아니다.
이 곳은 여러 귀족 자제들이 몰려드는 곳이고, 부유한 그들은 돈을 물처럼 사용한다.
철없는 귀족들의 돈냄새를 맡은 상인들은 자연스럽게 이 근방으로 몰려들었고.
그 아래에서 일거리를 얻고자 하는 평민들도 소울 아카데미에 발을 들였지.
그러다 보니 소울 아카데미는 아카데미를 중심으로한 거대한 도시의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
눈으로 직접 보게된 도시의 풍경은 한 마디로 사람의 삶으로 만들어 낸 합창곡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걸음소리.
물건을 팔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상인의 목소리.
한켠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여인네들의 대화소리.
그 위에 쌓이는 청아한 새의 울음소리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소리. 고함소리.
그 모든 소리들의 한 가운데에 나의 숨소리가 더해졌다.
그 순간 현실이 체감됐다.
지금 내가 모니터 너머로만 보던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방금 전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던 여러 걱정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숙소로 돌아가긴 뭘 돌아가.
기껏 소울 아카데미의 주무대가 되는 곳에 왔는데 아무것도 구경하지 않고 돌아가겠다니.
네가 그러고도 소울 아카데미 고인물이냐?!
“흐흥흥.”
하도 많이 들어서 완전히 귀에 익어버린 이 거리의 BGM을 입으로 중얼거리며 발을 움직였다.
눈으로 보고 싶은 곳은 많았다.
너무도 많아서 오늘 하루 안에는 다 돌 수 없으리라 확신할 만큼.
무뚝뚝하던 히로인이 감탄했던 레스토랑에도 가봐야 하고.
얼빵영애가 좋아하던 빵집에도 가봐야 하고.
작품의 여러 명장면을 탄생시킨 다리에도 가봐야 하고.
주인공이 친구와 애절한 이별을 하던 뒷골목에도 가봐야 하고.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가야 할 장소가 늘어나기만 했다.
생각해보면 지금 당장 챙길 수 있는 히든 피스들도 구하러 가야 하는데.
시간이 모자라.
이렇게 시간이 부족할 줄 알았다면 자는 시간도 아껴서 돌아다녔을 텐데.
어제 저녁에 마차를 타고 와 피곤하다며 침대에 몸을 던진 내가 원망스러웠다.
지금부터라도 계획을 짜자.
어디부터 가지?
일단 우리가 아침을 안 먹고 나왔으니까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부터 할까?
“아가씨?”
‘시녀님. 칼…’
“거기 허접 두 명. 이제부터 식사를 하러 갈 거야. 너희 같은 허접들은 혀에 대자마자 탄성을 내지를 음식을 먹여줄 테니까 기대해.”
그 레스토랑의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그건 내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야 내겐 베네딕이 잔뜩 쥐어준 금화가 있으니까!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금화의 무게에 미소 짓던 난 아카데미에 올 때 나를 배웅하던 베네딕의 모습을 떠올렸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조심히 다녀와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던 트롤의 모습은 솔직히 괴이했다.
갱년기가 오면 여성 호르몬이 분비된다던데 베네딕에게 벌써 그런 때가 찾아온 것일까.
지금 돌이켜봐도 그건 너무 과한 반응이었다.
어차피 시험을 치고 나면 다시 영지로 돌아가서 합격 통지를 기다려야 하는데.
몇 년은 못 볼 것처럼 눈물을 흘리다니.
나중에 내가 정말 소울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진짜 오열할 것 같아서 무섭네.
“어머나. 알른 영애님.”
눈물을 흘리다 기절하는 베네딕의 모습을 상상하던 중에 한 여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앞을 가로막은 그녀는 푸른빛의 날 선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어…
‘누구세요?’
“뭐하는 허접인데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메스가키스러운 어투에 여성의 미소가 굳었다.
메스가키 스킬 얘 또 오늘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당혹을 느끼면서 주변을 살폈다.
여성의 뒤편에 다른 여자가 둘이 더 있었다.
다들 옷의 질이 좋은 걸로 보아서 귀족 영애인 것 같기는 한데 나한테 무슨 볼일일까.
“저희 지난번에 사교계에서 뵜었잖아요?”
“메릴. 알른 영애의 저 자그마한 머리론 사람 얼굴을 기억하기 어려운가봐.”
“아아. 그런 거군요.”
어투에서 묻어나는 노골적인 악감정 덕분에 저들의 의도를 추측할 수 있었다.
시비를 걸러온 거구나.
왜? 라는 질문은 필요치 않았다. 그 이유가 너무도 뻔했으니까.
루시의 악몽 속에서 보았던 사교장의 풍경은 어느 정도 사실이 섞여있었던 거겠지.
그렇지만 루시가 나름 백작 영애인데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 줄은 몰랐네.
너네 베네딕이 무섭지도 않니?
난 그 아저씨가 화를 내는 걸 감당할 자신이 있어?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게 대단한 애들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야 비중 있는 캐릭터였다면 내가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을 테니까.
“알른 영애님. 아카데미 시험을 치러 오신 거죠?”
‘그런데요.’
“그런데 왜.”
“어차피 떨어지실 건데 왜 시험을 치르나 싶어서요.”
맨 앞에선 푸른 눈의 여성이 그리 말을 하자 그 옆에 있던 이들이 웃음을 흘렸다.
흐응. 얘네들은 내가 시험에 떨어질 거라고 보는구나.
하긴 내가 빙의하기 전의 루시만 봐왔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입학시험의 대련이나 던전 탐색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다면 꽤 재밌는 반응이 돌아오겠는데?
나쁜 일만 하던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눈에 띄는 것처럼. 무능하던 사람이 갑자기 유능한 모습을 보이면 엄청나게 눈에 띌 테니까.
잘 됐다.
그 비난 환호성으로 바꿔주도록 할게.
‘할 말은 그거 뿐이죠?’
“하고 싶은 말은 그거 뿐이야? 그럼 갈게. 너희 같은 잔챙이들이랑 어울려 줄 시간이 없어서.”
비중도 없는 엑스트라한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지금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 말을 하며 등을 돌린 순간 여성이 이를 갈 듯 사나운 목소리를 냈다.
“도망치는 건가요?!”
네. 도망치는 겁니다. 저는 겁쟁이라서 싸우기가 싫네요.
“유행도 모르는 영애란 게 부끄러운 모양이죠?!”
그래요. 전 유행도 모른답니다.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요.
“하! 알른 가문의 수치답네요!”
나는 그 말을 듣고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설마 저 말을 면전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자신의 주인이 모욕당했단 사실에 분노해 튀어나가려는 칼을 손으로 막은 나는 다시 발을 돌려서 여성의 앞에 섰다.
“뭐. 뭔가요?!”
“겁 먹은 건 너 아냐?♡ 좆밥 영애♡ 잔챙이면 잔챙이답게 찌그러져 있어♡ 무섭다고 발톱을 세워봐야 귀여울 뿐이거든?♡”
이 쌍년이.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안 그래도 나락인 루시의 평판이 바닥을 뚫을까봐 웃어넘겨 주려고 했는데 이건 못 참겠다.
썅년들아. 덤벼.
조져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