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노란 사신의 아지트.
잿빛 소녀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나한테 요즘 정말 이상한 일이 자꾸 일어나.”
아지트 구석에서 인형을 만들고 있던 노란 사신은 잿빛 소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어제는 오빠가 준 사탕을 먹었는데, 너무 셔서 뱉었더니 꿈틀거리는 바퀴벌레 덩어리였어. 정말 소름 끼쳤는데, 조금 지나고 다시 보니까 그냥 평범한 사탕이더라.”
“그리고 오늘 아침에 학교에 갔더니 건물이 마치 폐허처럼 보이는 거야. 깜짝 놀라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봤더니 ‘평소대로’의 건물이었어.”
소녀는 그 밖에도 몇 가지 이상한 일들을 입에 담았다.
마치 시야에 뭔가가 덧씌워지는 것처럼,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보이는 환각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점점 미쳐가는 걸까? 아니면 오브젝트의 정신 오염일까?”
노란 사신은 그 말을 듣고는 눈을 꼭 감고 도리도리도리하며, 격렬하게 반대를 표현했다.
마치 ‘너는 미치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고마워. 이상하게 아무한테도 이런 이야기를 못 하겠더라.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잿빛 소녀는 미니 사신이 인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지만, 노란 사신은 왠지 말을 이해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무서워. 환각이 점점 자주 보여.”
잿빛 소녀는 창백하게 질린 채, 무릎을 꼭 껴안고 고개를 숙였다.
소녀가 불안해하자, 노란 사신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마치 위로하는 방법도 모르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그러던 중, 노란 사신은 구석에 놓인 인형 옷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뒤집어썼다.
황금 사신 인형 옷을 뒤집어쓴 노란 사신은 황금 사신처럼 해맑은 미소를 베어 물고는 잿빛 소녀를 향해 돌진했다.
콩!
너무 기운차게 달려가서 그런지, 노란 사신은 제대로 멈추지 못하고 잿빛 소녀의 발에 부딪혀서 데굴데굴.
그 모습을 보고 잿빛 소녀는 푸흣 하고 작게 웃었다.
눈이 단추로 돼서 이상하게 생긴 인형 옷.
게다가 그토록 소극적이던 노란 사신이 우스꽝스러운 인형 옷을 입고 위로해 주려고 저렇게 필사적이라니.
소녀는 인형 옷을 입은 노란 사신을 들어 올리고,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말했다.
“이거, 앞이 보이긴 하는 거야? 단추 눈인데?”
잿빛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프흐흣하고 숨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작게 웃었다.
하지만 노란 사신은 소녀의 말을 듣고, 입을 크게 벌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인형 옷이 안 통해!’
노란 사신은 여러 가지 인형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기분이 풀린 잿빛 소녀와 같이 놀았다.
마법을 쓰는 푸른 사신.
불을 뿜는 붉은 사신.
그림자를 움직이는 보라 사신까지.
그렇게 노란 사신은 다양한 사신 인형 옷을 선보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태양이 조금 더 지평선에 가까워진 시각.
“이제, 가볼게. 내일 보자.”
잿빛 소녀는 태양을 등지고, 노란 사신을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순간, 노란 사신은 잿빛 소녀를 향해 만들고 있던 인형 하나를 내밀었다.
단추 눈에 잿빛 머리카락, 그리고 낡고 해진 누더기 교복.
노란 사신이 잿빛 소녀를 본떠서 만든 손바닥만 한 잿빛 소녀 인형이었다.
“와, 인형을 만들어 준 거야? 고마워.”
잿빛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인형을 받았다.
“진짜 잘 만들었네. 우리 학교 교복이 예쁘긴 해도 엄청 복잡하고 화려한데, 정말 똑같아!”
그렇게 말하며 잿빛 소녀가 인형을 소중히 안고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노란 사신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잔디가 무성하고 미니 동물들이 가득한 세희 연구소 안뜰.
그 안뜰에는 아주 조그마한 백악기가 내려앉았다.
마시멜로로 만든 앙증맞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내부, 조그마한 티라노사우루스들이 우글우글 모여있었다.
통통한 티라노.
깃털 달린 티라노.
4족 보행 티라노.
입술 달린 티라노.
빨갛게 달아오른 고온 티라노.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티라노가 살아 숨 쉬는 미니 티라노 동물원이었다.
내가 인정하는 진정한 티라노사우루스를 만들기 위해서, 초록 사신이 만들어 낸 일종의 티라노 미니어처들이었다.
만약 저 많은 티라노 중에 진짜가 없다면, 노란 사신에게 진짜 티라노 인형 옷을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지.
노란 사신의 인형 옷은 나를 속일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30종이 넘는 티라노가 있다 보니, 다행히 내가 원하던 진짜 티라노도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초록 사신은 진짜 티라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밍밍….”
‘특별하지 않아….’
나는 헛소리를 하는 초록 사신의 잎사귀를 잡아당겼다.
“미이잉!”
티라노를 만들기 시작하는 초록 사신을 내버려 두고 시선을 돌리자, 미니 사신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가져온 붉은 색 사탕 하나를 중심으로 미니 사신들이 우글우글.
그때 한 황금 사신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애착 인간의 손바닥에서 뛰어내렸다.
‘도전자!’
‘용감해!’
황금 사신이 사탕을 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자, 주변에 모여있던 미니 사신들이 짝짝 박수 치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호기로운 모습과 반대로 황금 사신의 도전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끄앙!’
그 황금 사신이 붉은 사탕에 혓바닥을 살짝 대더니, 표정을 찡그리면서 애착 인간에게 후다닥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애착 인간의 손바닥으로 돌아간 황금 사신은 마치 중상을 입은 것처럼 손바닥 위에 널브러져 버렸다.
그러면서 혓바닥을 ‘베-‘하고 내밀고 있는 것이 귀여운지, 애착 인간은 황금 사신의 말랑말랑한 혓바닥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하긴 저 사탕, 너무 시긴 하더라.
높은 확률로 판매 중지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 전에 미리 잔뜩 사뒀다가, 장난에 써먹어야 하나?
그렇게 내가 미래를 위한 건설적인 고민을 하던 도중, 이번 챌린지를 유발하게 만든 원흉들이 보였다.
하얀 아귀와 검은 사신이었다.
굉장히 보기 드문 조합이었는데, 그 녀석들은 붉은 사탕을 품에 안고 끊임없이 사탕을 핥아 먹고 있었다.
사탕을 핥기 무섭게, 검은 사신과 하얀 아귀의 얼굴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세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오고는 다시 할짝할짝.
얼굴이 오그라드는 것을 보면 저 녀석들에게도 저 사탕은 엄청 실 텐데, 계속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나라면 절대로 안 먹을 텐데….
***
잿빛 소녀는 끝없는 위화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학교를 걸어 다닐 때도, 길거리를 걸어 다녀도, 침대 위에 누워있어도 계속 이상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노란 사신이 준 인형마저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상하지 않은 것은 노란 사신뿐이야.
*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밥알들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
언제나처럼 눈을 꾹 감았다가 뜨니, 밥은 평범한 밥이었다.
하지만 식욕이 사라져 버려서, 전부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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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걷는데, 발밑의 바닥 타일이 이가 빠진 것처럼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재빨리 뛰어가 교실로 들어가니, 복도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분명 평소와 다름이 없는데도, 구멍 뚫린 타일의 위치는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버렸다.
소녀는 노란 사신이 선물해 준 인형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꼭 부여잡으며 되뇌었다.
‘나는 괜찮아.’
‘괜찮을 거야.’
*
학교가 쉬는 날.
노란 사신을 만나기 위해, 거리를 나가보니 모두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걸레로도 못 쓸 정도로 낡고 해진 옷.
잿빛 소녀는 노란 사신이 선물해 준 인형을 꼭 안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지만 눈을 뜨자, 인형이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소녀는 깜짝 놀라서 인형을 집어던져 버렸다.
던지자마자, 모든 것이 ‘평소대로’였다.
소녀는 인형을 주우면서 사과했다.
‘미안해.’
*
저녁 식사 시간.
오빠를 부르기 위해 방문을 열자, 방 안에 누워있는 오빠가 보였다.
마치 시체처럼 보였다.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뜨니, 오빠는 평소처럼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가 미쳐버린 걸까?’
잿빛 소녀는 노란 사신이 너무 보고 싶었다.
*
잿빛 소녀는 창백한 표정으로 학교를 향해 걷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아.’
주머니에 들어있는 작은 인형을 꼭 쥐고,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누군가가 잿빛 소녀를 부르자, 그녀는 애써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친구가 아니라, 오브젝트였다.
“힉.”
얼기설기한 철사를 엮고, 그 위에 하얀 점토를 발라 인간처럼 만든 괴물.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소녀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여기도 오브젝트.
저기도 오브젝트.
사방이 오브젝트투성이였다.
그때 오브젝트가 말하는 것처럼 ‘끼긱끼긱’ 거리며 입을 열었지만, 소녀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녀는 더욱더 창백하게 질리더니, 책가방을 내팽개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뛰어서 죽을 것처럼 숨이 찼지만, 어느새 숨이 차지 않게 되었다.
자기 손을 내려다보니, 돌처럼 하얀 손이 보였다.
멀쩡하게 움직였던 한쪽 다리는 더 이상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질질 끌렸다.
소녀는 그래서 걸음을 멈춰버렸다.
잿빛 소녀는 물끄러미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예쁘고 마음에 들었던 교복은 낡고 해져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하얀 돌가루가 부스스 날렸다.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 하하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이상한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 순간에도 소녀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걱정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내가 오브젝트였어.’
‘노란 사신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