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소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잿빛으로 바랜 기억.
그 꿈속에서 그녀는 조금 더 어린 소녀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함 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네가 그렇게 술이나 먹고 돌아다니니까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 아니야!”
어머니의 절규에 아버지는 더욱 큰 소리로 응수했다.
“내가 술이나 먹는다고? 당신이 계속 돈을 탕진하니까 내가 이러는 거잖아!”
부모님의 끝없는 싸움에 겁먹은 소녀는 방구석으로 파고들어 몸을 웅크렸다.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소녀는 움직일 수도, 소리 낼 수도 없었다.
마치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엄마, 아빠….’
이 꿈은 잿빛 소녀의 마음속에 절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 기억이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뇌리에 남아있던 기억일 텐데….
이상하게도 잿빛 소녀는 이 기억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이유로, 언제나 싸우던 부모님들.
집에 거의 들어오지도 않는 오빠.
그리고….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때였다.
잿빛 소녀의 언니는 아무 말 없이 소녀에게 다가와 꼭 끌어안아 주었다.
따스한 체온과 포근한 향기에 소녀의 얼어붙은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모두 괜찮아질 거야.”
언니가 속삭이자,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어쩐지 언니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지만, 소녀에게 위로가 되는 정말 따스한 말이었다.
토닥토닥.
그리고 꿈속에서 언니는 소녀의 머리를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
그것으로 잿빛 소녀는 꿈에서 깨어나 버렸다.
토닥토닥.
시선을 올려보니, 노란 사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잿빛 소녀의 머리를 토닥이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친 노란 사신은 여전히 어색한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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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
송파구 외곽에 위치한 신축 고급 아파트 단지.
햇살이 따스한 오후, 황금 사신들은 뚜방뚜방 걸어서 그 아파트 단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황금 사신이 느끼기에 이곳은 인간과 오브젝트들이 잔뜩 뒤섞인 이상한 곳이었다.
“여기 좀 봐봐!”
황금 사신이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자, 단지 입구의 화단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색을 뽐내며, 무지개를 그렸다.
그리고 그 화단을 지나면 곧게 뻗은 가로수들이 초록빛 터널을 이루며 단지 내부로 이어졌다.
나무 그늘 아래로 산책로가 곡선을 그리며 펼쳐져 있었다.
산책로 주변으로는 잘 다듬어진 잔디밭과 어우러진 벤치들이 놓여있어, 인간들에게 여유로운 휴식 공간을 제공했다.
산책로의 끝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맑은 물 위로 분수가 물보라를 일으키고, 연못가에 심어진 수련들은 고요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연못을 둘러싼 산책로에는 가족 단위의 인간들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정말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황금 사신들은 행복해 보이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황금 사신이 미간에 살짝 힘을 주고, 자기 눈에 장작을 잔뜩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치 화가 난 황금 사신처럼 무표정해지자, 이 도시의 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꽃과 풀은 전혀 없이 쓰레기만 가득한 화단.
앙상한 철사로 만든 틀만 남은 가로수 길.
악취를 풍기는 오염된 연못.
그리고 철사 위에 아무렇게나 석고를 붙여놓은 것 같은 인간형 오브젝트들.
이 아파트 폐허를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에 저런 오브젝트들이 잔뜩 섞여 있었다.
그 오브젝트들의 모습은 인간과 애매하게 닮아서 상당히 꺼림칙했다.
하지만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그 오브젝트들에게서는 ‘해로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미세하게 인간의 긍정적인 감정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장작이랑 비슷하면서도, 다른 무언가.
미니 사신과는 전혀 다르지만, 분명 인간의 긍정적인 감정을 원료로 움직이는 오브젝트로 보였다.
‘그럼? 유익한 오브젝트?’
정신 오염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 새어 나오는 감정을 먹는다면, 분명 자신들처럼 해롭지 않겠지.
하지만 이상하게 황금 사신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오브젝트들이었다.
그래서 이 아파트 단지는 얼마 전에 황금 사신 대회의의 의제로 올라오기도 했었다.
[아무리 봐도 해롭지 않으니까, 파괴하지 않는다.]
[그래도 뭔가 기분 나쁘니까, 다가가지 않는다.]
황금 사신 대회의의 결론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삭초제근! 아무튼 기분 나쁘니까 몰살하자!’
게스트로 참가한 주황 사신의 과격한 주장도 꽤 지지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각되었다.
특히 하얀 아귀들과 검은 사신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투표권의 대부분은 황금 사신들에게 있었으니까.
결정적으로 한 황금 사신이 낸 의견이 많은 황금 사신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엄마’는 조용히 있는 오브젝트는 찾아가서 죽이지 않는다면서, 그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의견이었다.
물론 주황 사신은 ‘엄마는 그냥 귀찮아서 그러는 거야!’라고 강변했지만, 엄마를 사랑하는 황금 사신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투표 결과를 보고 인정할 수 없다며 대회의장을 불법 점거하려고 한 하얀 아귀들이 있었지만, 모두 붉은 사신에게 인도되었다.
그렇게 그 아파트 단지는 황금 사신들이 거의 가지 않는 장소가 되었지만, 지금은 황금 사신들이 우글우글 모여들고 있었다.
‘위험해?’
‘꺼림칙해!’
모여든 이유는 아파트 단지 내로 잔뜩 숨어든 제임스 연구소의 직원들 때문이었다.
제임스 연구소의 직원들은 어제부터 다양한 복장으로 단지 내에 숨어들기 시작했는데, 그 직원들의 애착 사신들이 심심한 황금 사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애착 인간이 위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뭔가 불안해!’
그래서 제임스 연구소 직원이 있는 곳에는 항상 황금 사신이 최소 5마리 이상 뚜방뚜방 돌아다니고 있었다.
인근 주민처럼 꾸민 제임스 연구소 직원들은 아파트 단지 내부를 꼼꼼히 촬영하거나, 영체 카메라까지 동원해서 뭔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살금살금 움직이는 게,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황금 사신 같았다.
하지만 황금 사신이 보기에는 이상한 행동이었다.
연구소 직원들은 너무 눈에 띄니까!
눈코입이 없고 벌거벗은 석고 인형들 사이에 인간이 숨으려고 노력하는 격이었다.
***
늦은 오후, 세희 연구소 안뜰.
나는 느긋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따라 황금 사신이 적네.’
보통 내가 안뜰에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으면 황금 사신들이 잔뜩 달라붙었는데, 오늘은 그 황금 사신의 숫자가 현격히 줄어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제임스 연구소 직원들을 지키러 간다고 했던 것 같기도 했다.
협회 인형 사태 때,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오브젝트를 쓸어버렸는데, 위험할 만한 게 남아있었나?
미니 사신들이 부지런히 날라주는 쿠키를 냠냠 먹고 있었더니,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뀨힝힝.”
시선을 돌려보니 그곳에는 꼬챙이에 관통당한 하얀 아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팔다리는 까맣게 타서 없어지고, 온몸에는 혁명의 마크가 잔뜩 찍혀있는 하얀 아귀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하얀 아귀에게도 투표권을 달라고 헛소리하던 하얀 아귀가 있었는데, 그 녀석인 건가?
하얀 아귀의 울음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쿠키를 먹으니 두 배로 맛있었다.
히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도중, 미니 사신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귀여워!’
‘동생!’
하얀 아귀에게서 시선을 떼고 소란스러운 곳을 바라보자, 초록 사신이 둥실둥실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꽃이 잔뜩 달린, 풀로 된 망토를 입은 초록 사신이었다.
“미잉!”
천을 뒤집어쓴 유령 같기도 했고, 정거장에서 봤던 거대 모스 볼이랑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는 절대로 입기 싫은 불편한 판초 우의 같았는데, 미니 사신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나도!’
‘나도!’
황금 사신들이 폴짝폴짝 뛰며, 답답한 풀때기를 입혀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미니 사신들의 열렬한 의지를 받은 초록 사신은 짧고 큰 소리로 ‘밍!’했다.
“밍!”
그러자 바닥에서 마구 풀이 자라나더니, 미니 사신들을 하나둘 둘러싸기 시작했다.
‘으앙!’
그러자 미니 사신들은 굉장히 행복한 감정을 뿜어내며, 마구마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풀로 만든 천을 뒤집어쓰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앞이 잘 안 보이는지 서로 부딪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다들 저러고 있으니 때아닌 핼러윈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늦은 저녁, 잿빛 소녀는 쓰러지는 것처럼 바닥에 누웠다.
‘힘들어….’
가출한 잿빛 소녀는 이제 학교도 가지 않고 그저 노란 사신의 아지트에 숨어서 있을 뿐이었지만, 학교 다닐 때보다 몇 배는 피곤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오브젝트인 것을 깨달아서 그런지, 더 이상 배고프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바닥에 쓰러진 소녀가 노란 사신의 볼을 꾹꾹 찌르며 불만을 토로하자, 노란 사신은 ‘후히히’하고 웃을 뿐이었다.
‘너무 해!’
잿빛 소녀가 이토록 힘든 것은 전부 노란 사신 때문이었다.
노란 사신은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공부를 가르쳐줄 미니 사신을 불렀다.
그래서 나타난 것은 인터넷 사진으로만 봤던 보라 사신!
그 보라 사신은 그림자로 안경을 만들어 쓰더니 진짜로 수업을 시작했다.
미니 사신은 인간의 말을 못 알아듣고, 지능도 인간보다 조금 낮은 거 아니었어?
보라 사신은 학교 선생님보다 몇 배는 잘 가르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평소보다 피곤한 잿빛 소녀는 순식간에 잠들어버렸다.
잿빛 소녀는 잠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노란 사신이 내가 다른 생각하지 못하게, 바쁘게….’
하지만 소녀는 그 의문에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순식간에 잠들어 버렸다.
***
잿빛 소녀는 이상한 꿈을 꾸고 있었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아파트 단지를 거니는 꿈.
저번에 꿨던 것처럼 예전 기억도 아닌, 전혀 생소한 꿈이었다.
꿈속의 그녀는 정갈하게 꾸며진 아파트를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시선도 전혀 돌리지 않고, 앞만 바라보면서 뚜벅뚜벅.
‘아파트 단지 내에 이런 곳이 있었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생소한 곳을 막힘없이 계속 걸어 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소녀의 기억에도 있는 장소였다.
아파트 단지 중앙에 있는 넓은 공터.
모든 것이 아름답게 꾸며진 아파트 단지에서 유일하게 텅 비어 있는 곳.
하지만 그 공터에는 소녀의 기억 속에 없는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었다.
뚜벅뚜벅.
그렇게 그 건물에 들어서자, 새하얀 모래가 가득한 들판이 보였다.
하얀빛을 뿜어내는 고운 모래.
그리고 겉에서 보기보다 몇백 배는 넓어 보이는 공간.
그 벌판에는 흙을 파서 만든 구덩이가 잔뜩 있었다.
마치 관을 집어넣기 위해서 파둔 것 같은 직사각형의 구덩이.
꿈속의 소녀는 그런 이상한 공간 속에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사락사락.
마치 모래를 밟는 것 같은 소리.
그렇게 멈추지 않고 끝없이 걸어갈 것 같던 꿈속의 소녀는 어느 순간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앙상한 손아귀가 보였다.
핏기 없이 창백한 손은 마치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것처럼 보였고, 소녀의 발목을 묘하게 뒤틀린 형상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공포에 질린 소녀가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구덩이 안에서 나온 손의 주인을 알아보고 숨이 멎을 뻔했다.
바로 소녀의 오빠였던 것이다.
오빠의 얼굴은 하얀 모래로 뒤덮여 있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 입술 사이로 간신히 힘겹게 내뱉는 말은 살려달라는 소리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끔찍해서,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소녀는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한동안 숨을 헐떡였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데도.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이젠 없어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만 같았다.
‘진짜, 진짜 우리 오빠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꿈에서 본 오빠가 진짜라는 확신이 들었다.
소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빨리 가서 구해줘야 해.’
그리고 이런 확신이 들었다.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잿빛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아지트를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떠날 준비를 하는 소녀의 어깨 위로 노란 사신이 올라탔다.
‘같이 가줄 거야?’
잿빛 소녀의 의지에 노란 사신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