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3
“흐어억!”
왕자의 품위 따윈 일말도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아서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음을 깨닫고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조이. 그 녀석! 평소에 내게 쌓인 게 얼마나 많았으면 그런 끔찍한 마법을 사용한단 말이더냐!
아무리 아카데미 던전에 안전장치가 존재하고 옆에 성녀님께서 계시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몇 번이고 생각을 해보아도 그 녀석은 본인을 죽일 생각이었어!
이마에 흘러내린 식은땀을 닦아낸 아서는 옆에서 눈을 감은 채 잠꼬대를 하고 있는 조이를 발견하고는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흐악?!”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난 조이는 벌떡 일어나서는 두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은 채 주변을 둘러보다 아서를 발견하고는 허둥지둥 품 안에서 부채를 꺼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조이. 할 말은 없나?”
“왕자님. 던전의 공략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단 걸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래. 알지. 그대가 우리에게 공격을 가하며 찢어지는 마음을 억눌렀을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후후. 역시 왕자님이십니다. 그럼.”
“그러니 나도 찢어지는 마음을 한 번 억눌러보도록 하지.”
“…네?”
자리에서 일어난 아서가 발을 움직이자 그를 따라 일어난 조이가 다급히 뒤 쪽으로 물러선다.
“혹시 아는가. 이 곳도 꿈일지.”
“그런 거 아니시잖습니까! 그저 방금 전 일에 대한 복수를 하시려는 것 뿐이시면서!”
“어허. 본인의 이 안타까운 마음을 그런 식으로 모욕하면 쓰나.”
“엑? 흐악! 흐아아앙!”
양 뺨을 마구잡이로 꼬집어 보복을 끝마친 아서는 울상을 지은 채 투덜거리는 조이를 내버려 두고 잠에서 깬 프레이와 페이비 쪽으로 다가갔다.
“그대들도 저 녀석에게 복수를 하겠나? 내 왕자의 권한으로 허락해주겠다만.”
“아뇨.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맞아. 우리는 3왕자님처럼 속이 좁지 않다고.”
두 사람이 고개를 내저음에 따라 졸지에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아서는 뒤에서 쏘아지는 조이의 눈빛을 애써 무시한 채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여기에서 마무리 하고. 다시 던전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지. 주변의 풍경을 보았을 때 조이 저 녀석의 추측이 옳았던 모양이야.”
지금 아서 일행이 서 있는 장소는 방금 전까지 그들이 머물던 방과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몇몇 차이점.
오랜 세월이 흘러 벽이 이곳저곳에 구멍이 나있다거나.
카펫이 낡아 과거의 형체를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라거나.
여러 장식물들이 세월에 의해 스러져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거나.
하는 점을 제외한다면 아서 일행이 꿈속에서 머무르던 방과 완벽히 일치한다 해도 무방했다.
“여기도 끝이 없이 이어진다거나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아서는 루시가 그 정도로 지독하지 않기를 바라며 앞으로 발을 움직였다.
네 번째 방에 머무르며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된 탓에 일행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평소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전투를 수행하던 이들이 반나절 동안 복도를 돌아다니기만 했으니 어찌 몸이 가볍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꾸만 튀어나가려는 프레이를 말리긴 커녕 그녀의 걸음에 맞추어 달리듯 움직인 일행은 순식간에 복도의 끝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란 것인가.”
최초의 복도에 요람이 자리했던 장소엔 그를 대신하듯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프레이는 그를 보자마자 검을 꺼내들고서 문을 베어 넘기며 진입하려 했지만 아서가 목덜미를 붙잡음에 따라 돌격에 실패했다.
“기다려라. 일단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감지한 후에…”
“오호. 드디어 손님이 왔군.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어.”
그들에게 문 너머를 살필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서가 조이와 페이비에게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 자는 넝마를 입고 있는 추레한 인상의 남자였다.
시체에서 풍길 듯한 끔찍한 악취.
관리를 하지 않아 기름진 미역마냥 늘어져 있는 머리카락.
그 머리에 의해 가려진 사이로 보이는 폐인 특유의 광기 어린 눈.
남자는 가만 네 사람을 살피다 씨익 웃으며 목소리를 내려했다.
“안녕…”
그가 입을 벌리자마자 나타난 신성 구체가 그의 눈앞에서 폭발하며 말을 끊어버린다.
상대가 보통이었다면 섬광이 시야를 빼앗겨 비틀거리게 되었을 터이나 남자는 신성 구체를 보자마자 눈을 감는 것으로 섬광을 회피해 보였다.
“어이쿠. 환영 인사를 해주려 했는데 오히려 인사를 받게 될 줄이야.”
남자가 너스레를 떠는 동안 아서의 손에서 풀려난 프레이가 검에 오러를 담은 채 앞으로 돌격했다.
일격에 상대를 반으로 베어내기 위한 일검.
남자는 날카로운 바람과 같은 공격을 슬쩍 몸을 뒤트는 것으로 피하며 말을 이었다.
“진정들 하게. 나도 귀족 나부랭이 중 하나일 지언데 오랜만에 찾아 온 손님을 해할 리가 없잖은가.”
말을 하면서도 가뿐히 프레이의 공격을 회피하던 남자는 이내 프레이의 목덜미를 붙잡아 내던지고는 툭툭 손을 털었다.
경이에 가까운 균형 감각으로 아서의 옆에 착지하는 데 성공한 프레이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검이 안 닿아.”
“늑대랑 비슷한 느낌인가?”
“아니. 굳이 따지자면 칼 교수를 상대할 때에 가까워.”
압도적인 기량에 의해 찍혀 눌려졌다는 것인가.
아서는 뒷짐을 진 채 가만 서 있는 남자를 보다가 입술을 살짝 씹었다.
이 쪽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녀석은 아닌 듯 하군.
…잠시. 복도의 풍경이나 이 녀석의 썩어가는 듯한 겉모습 같은 것을 보았을 때 이 남자가 사령일 가능성이 있지 않나?
만일이 녀석이 죽음을 거부하는 자라면 성녀님의 정화로.
“불가능합니다. 3왕자님.”
아서의 시선에서 그 뜻을 읽은 것일까. 페이비가 고개를 젓는다.
“이 분은 산 자입니다. 그것도 신성의 기운을 품을 수 있는 분이죠.”
편법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쯧. 빌어먹을 정도로 철저하군. 루시 알른.
“자. 손님들을 계속 세워둘 순 없으니까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직접 문을 열어주며 안으로 들어오길 권유하는 남자의 모습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수상해서 오히려 아무 속셈이 없는 거 아닐까하고 아서가 의심할 정도로.
솔직히 말해 저 권유를 따르고 싶진 않다.
정체 모를 자에게 주도권을 내어준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다만 문제가 되는 건 우리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무얼 하겠는가.
얼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답도 없는 복도를 무작정 뒤지고 있어야 할 테지.
그럴 바에는 함정인 줄 알며서도 들어가 무언가 단서를 찾아내는 편이 낫다.
최악의 경우는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정체 모를 것에 당해 바깥으로 내쫓기는 것이다만.
당장 문 너머로 보이는 방의 모습은 엉망이긴 해도 평범한 집무실처럼 보이니 괜찮겠지.
마법적인 장치가 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성녀님께서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는 걸 보면 불온한 무언가가 도사리는 것도 아닐 터이니.
최악의 사태에도 무슨 단서를 발견한 틈 정도는 있을 것이야.
아서가 생각을 끝마친 그 순간.
조이. 페이비. 프레이. 세 사람의 시선이 아서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판단이 옳을 것이란 믿음이 담긴 시선에 아서는 부담스럽다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흔들림 없는 진중한 얼굴을 했다.
“가지. 루시 알른이 무엇을 준비해 뒀을지 보자고.”
아서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음에 따라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방의 안으로 들어선다.
이윽고 방 안에 들어선 네 사람이 낡고 더러운 주택 특유의 퀘퀘한 냄새를 맡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 때.
문 바깥에 서 있던 남자가 음울한 미소와 함께 목소리를 낸다.
“저택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여러분들. 부디 재밌게 즐기다 가주시길 바랍니다.”
저 녀석.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관광지를 안내하는 듯한 말에 아서가 기이함을 느낀 그 순간 남자가 갑작스럽게 문을 닫았고.
그 충격을 따라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아서 일행이 무언가 대처를 하기도 전에 바닥이 무너져 내려선.
붙잡을 곳 하나 없는 갑작스런 낙하가 시작된다.
“젠장! 조이! 성녀님을 부탁하마!”
“걱정 마세요!”
순식간에 바람 계열의 마법진 몇 개를 만들어낸 조이가 페이비를 끌어안은 채 낙하의 속도를 줄이는 걸 확인한 아서는 마법을 펼치며 프레이를 찾았다.
젠장. 이 녀석 어디에 있는 거야.
이대로 낙하했다간 프레이 그 녀석이라 해도 멀쩡할 수 없을 텐데?!
당혹 속에서 주위를 살피던 아서가 프레이를 발견한 곳은 아래가 아닌 위였다.
“괜히 걱정했군.”
프레이는 떨어지는 조각을 밟아가며 허공에서 체공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대체 저게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다만.
최소한 떨어져서 다칠 리는 없을 듯 하군.
서커스에서도 보지 못할 기행에 질려버린 아서는 프레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만을 위한 마법을 완성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착지한 아서는 머리에 묻은 돌조각을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저택의 입구인가.
분명 그 빌어먹을 놈이 저택을 즐겨 달라 그랬으니 이 저택을 돌아다니며 무언가 단서를 찾아야 하는 거겠지.
하아. 또 다시 귀찮은 일이 되겠군. 오늘은 가볍게 둘러보고 내일부터 제대로 된 공략을.
“…허?”
주위를 살피던 아서는 저택 한 가운데에 설치된 물건을 보고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것은 아서에게.
아서 일행에게.
아카데미의 던전을 공략해 본 이들 모두에게 익숙한 설치물이었다.
“기록장치가 왜 여기에.”
기록장치.
일반적인 던전의 안전지대를 대체하는 아카데미 던전 특유의 설치물.
100층에 달하는 아카데미 던전을 매 번 1층부터 오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
저게 왜 여기에 있는가.
앞선 방에는 존재하지 않던 장치가 왜 이곳에만 있단 말인가.
기록장치를 보며 아서가 의문을 느끼던 그 순간.
저택의 입구가 열리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끝이 어딘지도 모를 어두운 계단을 본 순간 아서는 설마하는 생각에 다급히 기록 장치를 살폈다.
‘0층.’
그 곳에 적힌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여태까지 그들이 돌파했던 모든 방은 그저 꿈.
수험자들이 기믹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 둔 튜토리얼.
그러니 이제부터가.
이 저택의 입구부터가.
진짜 제대로 된 던전.
“…진짜 미쳐버리겠군.”
모든 것을 파악한 아서는 0층이라는 숫자를 노려보다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
“대체 그건 무슨 기믹이냐! 한 번 실수하면 그대로 죽어야 하다니!”
1층의 보스를 공략하다가 던전 바깥으로 내쫓긴 아서는 머리를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공격해도 되는 순간과 공격해선 안 될 순간을 착각하면 발악이고 나발이고 죽어야 하는 곳이라니!
이런 던전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더냐!
“푸하핳. 불쌍 왕자님. 이젠 외모로 동정을 사려고 그러는 거에요? 거지 꼴이 되고 싶으면 좀 더 좋은 수단이 많이 있을 텐데.”
약간 높고. 선명하며. 간질거리고. 얄미운 꼬맹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아서는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눈치챘다.
“루시 알른.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루시 알른.
방금 전 아서가 내뱉던 욕지거리의 대상인 여자아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패배자의 얼굴을 보려고 기다렸어요.”
“…뭐?”
“풉. 크흡. 불쌍 왕자님께서 부들거리는 걸 보니까 기다리길 잘 했네요. 어때요? 불쌍 왕자님 같은 개허접은 백날 천날이 지나도 공략 못할 멋진 장소였죠? 그쵸?”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저 괴악한 던전에서 죽어라 구르게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놀리기까지 한다 이거냐.
“왜 답이 없으신가요? 제가 만든 던전이 너~무 대단해서 불쌍왕자님의 허접한 어휘로는 표현이 불가능한가요?”
“대답을 바라나?”
“대답해주실 순 있고요?”
“물론 가능하지. 대신 조건이 있다.”
“뭔데요?”
“꿀밤 한 대만 때리게 해다오.”
지금 네 녀석이 깐족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짜증을 참을 수가 없군.
그러니 정수리를 대라. 내 주먹이 그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만 네 녀석을 때리는 것으로 이 울분을 푼 후 답변을 해줄 터이니.
“풋. 뭐에요? 화나셨나요? 이 자그마하고 귀여운 여자아이를 때리고 싶어지셨나요? 정말 쓰레기가 따로 없으시네요.”
“싫다면 됐다.”
어차피 나도 진심으로 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짜증이 났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뿐. 그러니 기회를 줄 것이 아니라면.
“싫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아서가 굳어 있는 동안 루시 알른이 종종걸음으로 그의 앞까지 다가와 정수리를 들이민다.
…어. 그러니까.
진짜로 때리란 것이냐?
이 자그마한 머리에 주먹을 날리라고?
물론 그대가 무척이나 튼튼하단 것은 알지만.
그래도.
“파핳. 진짜 허접하시네요. 기회를 줘도 망설이기만 하다니. 그래서야 언제까지고 허접한 불쌍왕자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겠는걸요?”
웃음과 함께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루시는 달빛을 뒤로 한 채 키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서를 놀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조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 옆으로 향해버렸으니까.
방금 전의 모든 것이 자그마한 장난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아무 미련도 없이.
그렇게 홀로 남겨진 아서는 잔뜩 벌게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던전 공략에 성공하면 다른 건 몰라도 반드시 꿀밤만큼은 때려주고 말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