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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2

“그러는 너는 왜 여기 있어?”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로 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네 실력이라면 더 좋은 곳도 갈 수 있었을 텐데.”

“에헤이, 단장님! 오르도가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여기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데.”

투덜거린 에릭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제 고향이 오르도 아닙니까. 기사 노릇은 더 하고 싶지도 않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 이 정도 자리가 저에게 딱입니다.”

“으음….”

많은 것을 내려놓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과거 에릭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많이 바뀌었네.

“역시 철없는 애송이도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으면 성숙해지는 모양이네.”

“애송이…. 네, 뭐, 그렇죠.”

“…할 말 있어?”

에릭이 해괴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으로 나를 쓱 훑더니, 금세 표정을 싹 바꿨다.

“어휴,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하늘 같은 단장님한테 뭐라 하겠습니까?”

보나 마나 ‘나보다 어리고 쪼그만 애한테 애송이란 말을 듣다니…’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뻔하다 뻔해.

그래도 말로 한 건 아니니까 봐준다.

“아까 그 경비병은….”

“개럿 말입니까?”

“이름은 모르겠고, 오르도 사람 아니야? 그라닉을 못 알아듣는 것 같던데.”

“오르도 사람 맞습니다. 그라닉을 못 하는 것도 맞고요.”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될 이유는 또 뭡니까?”

에릭이 매우 능숙한 손길로 차를 내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그라시스에 망조가 든 건 한참 되지 않았습니까. 돈 좀 있는 놈들은 제국으로 도망가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에겐 아르키쉬를 먼저 가르치고…. 젊은 층이 그라닉을 못 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않을까요?”

“근데 넌 하잖아.”

“저는 단장님이랑 같은 이유죠. 아버지가 워낙 그라시스를 좋아하셔서….”

하긴… 가리드의 애국심은 둘째 가면 서러울 정도였지.

하지만 에릭의 말은 틀렸다.

가리드는 아르키쉬도 구사할 줄 알았거든.

‘지금은 사이가 좋지 않지만,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니 배워둬서 나쁠 거 없지. 그런 의미에서, 카나 너도 배우지 않을래?’

‘그다지….’

‘쩝, 매정하네.’

그런 대화를 나눈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에릭의 말마따나 평민이고 귀족이고 할 것 없이 아르키쉬를 배우는 게 그라시스가 멸망하기 전의 트렌드였지만, 그것도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다.

평민보다 못한, 나 같은 밑바닥 인생들은 그라닉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귀동냥으로 듣고 익혀야 했으니까.

물론 가리드에게 입양된 후에 아르키쉬를 익히지 않은 건 그냥 귀찮아서였고.

“…죽이진 마십쇼. 융통성이 없어서 그렇지 성실한 놈입니다.”

“…날 뭐로 보는 거야.”

조금 불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할 일을 한 사람의 목을 날려버리는 미친년은 아니거든?

“네가 그랬다면 몰라도.”

“아니, 거기서 저는 또 왜….”

투덜대던 에릭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내가 아까 개럿이라는 경비병에게 보인 패였다.

“이건 일단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신분을 증명할 것을 드릴 테니 앞으론 좀….”

“알았어. 꺼내지 말라는 얘기잖아.”

“아셨으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계셨길래 단장님을 보고 싶어 한 단원이 꽤 많았는데도 아무도 단장님의 행방을 모른 겁니까?”

“…나를 보고 싶어 했다고? 누가?”

“한두 명입니까? 굳이 꼽자면 부단장님이 제일 열심히 찾았죠.”

“아, 부단장.”

에릭과 나는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그래서 어디 계셨습니까?”

“가리드의 묘지.”

“…이런, 왜 거기를 생각 못 했을까요.”

“생각했어도 어차피 못 찾았을 거야.”

가리드가 묻힌 곳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내 뜻은 아니고, 가리드의 뜻이었다.

그 외에도 사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뜨거운 태양 대신 여관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거리를 밝힐 때가 돼서야 우리는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미지근해진 차를 한 모금 마신 에릭이 말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단장님을 뵈니 반갑네요.”

“…‘그래도’라는 말이 거슬리지만. 응, 나도.”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세데스 성국으로 갈 거야.”

“세데스 성국? 설마 사도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고.”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저녁이나 하시겠습니까? 제가 한턱내겠습니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다음에.”

“아아, 그랬었죠. 그럼 다음에 오르도에 오시면 거하게 쏠 테니 다치지 말고 돌아오십쇼. 뭐, 애초에 단장님이 다칠 거 같진 않지만요.”

하하하!

나는 제법 호탕하게 웃는 에릭을 보며 미약하게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가 누굴 걱정해.”

그럴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해.

* * *

똑똑.

“…가셨습니까?”

“어.”

개럿이 검문소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왔다.

고개를 휘휘 돌리며 소녀의 모습을 찾던 그는 소녀가 떠난 것을 확인하자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안도한 건 안도한 거고, 대체 그 소녀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의 상사가 저런 반응을 보인 걸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개럿이 에릭에게 물었다.

“저, 대장….”

“신경 꺼. 잊어.”

그러나 에릭은 그의 궁금증을 칼같이 차단했다.

에릭은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전대 단장, 가리드가 살아 있을 시절 카나의 모습과 가리드가 세상을 떠난 이후 카나의 모습.

두 모습을 연달아 떠올린 그는 이번엔 방금까지 그와 이야기를 나눈 카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유해지셨지.’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과 목소리.

처음 봤을 때만큼 풀린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가 마지막에 봤을 때처럼 딱딱한 얼굴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세월이 바꾼 건 저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단장.’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단장님!’

‘시끄러워.’

‘아, 아직 더 싸울 수 있습니다! 단장님이 예전에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겁먹고 도망치는 개는 필요 없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빠져. 방해야.’

에릭은 패배한 그를 내려다보던 분홍색 눈동자를 잊지 못했지만, 피를 흘리며 그의 앞을 막아서던 작은 등 또한 잊지 않았다.

‘미천한 평민이 홍염 기사단에 있다니…. 기사단의 품위가 땅에 떨어졌군.’

‘…뭐?’

‘아, 이런. 혹시 들었나? 미안하군, 동료들이랑 말한다는 게 그만.’

‘이 개자식이-’

‘거기, 너네. 뭐 해?’

‘…예?’

‘다, 단장님!’

‘한가한 거 같은데, 나랑 대련하자.’

‘아, 아니, 그, 저….’

‘거절은 거절이야.’

그리고 에릭을 비웃던 단원을 곤죽이 되도록 패버리던 모습도.

…물론 그 일은 단장 본인의 사감이 많이 섞인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렇기에 에릭은 소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만약 오늘 일이 밖에 새어 나갔다간, 그때는….”

“….”

꿀꺽.

개럿이 침을 삼켰다.

“바, 반드시 함구하겠습니다…!”

“그래그래.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퇴근해.”

“넵! 충성!”

개럿이 후다닥 검문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쓸데없이 성실한 녀석이니 비밀이 새어 나갈 걱정은 할 필요 없겠지.

개럿의 뒷모습을 보며 그리 생각한 에릭이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

“정말 많이 바뀌셨네요, 꼬마 단장님.”

버팀목을 잃고, 그저 허망하게 흘러가는 대로 살던 소녀가 제 의지로 세상에 나오는 걸 보게 되다니.

에릭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키는 그대로입니다 그려.”

앞에서는 감히 할 수 없었던 말을 뱉은 그가 낄낄 웃었다.

끼익.

흠칫!

“…!”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핀 에릭.

그것도 모자라 문을 열어 바깥까지 확인한 후 그는 아까 개럿이 그랬던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이 씨, 바람이었네.”

괜히 쫄았구만.

* * *

과거를 마주하는 건 기분 나쁜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마냥 그렇진 않네.

가라앉았던 기분이 풀렸다.

아니, 아까보다 더 좋아진 것도 같다.

“항상 이렇진 않겠지.”

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파벌 싸움을 하고 싶진 않지만, 굳이 따진다면 에릭은 내 파벌에 속했으니까.

만약 오늘 만난 게 다른 파벌에 있던 놈이라면 이렇게 훈훈하게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유혈 사태를 봤어야 했을 수도.

그런 의미에서, 에릭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네.

그나저나… 저니는 어디로 갔을까.

오르도 안에 들어간 건 분명한데, 사전 약속 같은 걸 정할 새도 없이 헤어졌더니 어디 있는지 알 방도가 없네.

왠지 저니라면 내가 어디에 있든 금방 찾아올 것 같단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녀를 찾아 길거리를 헤맸다.

캄캄한 밤인데도 오르도의 길거리는 환하게 빛났다.

“어서 오세요! 묵고 가시는 건가요?”


“마침 끝내주는 고기가 들어왔는데, 잡숴볼 텐가?”


“언니 오빠들! 식사하고 가세요! 맛있는 술도 있어요!”

내용을 알 순 없어도 목소리에 섞인 활기는 또렷하게 전해졌다.

후드를 눌러쓴 채 오르도의 활기를 느끼던 나는 머지않아 내가 찾던 이를 발견했다.

저니는 한 여관 앞에서 아르키쉬로 쓰인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당신의 말이 이 썩은 오르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부디 힘을 보태주세요.]

사람들은 그녀가 든 팻말을 보고 그냥 지나치거나 관심을 갖고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제가 친동생처럼 생각하는 아이가 있는데 저와 같이 오르도에 들어오다가 누명을 써서 경비대에 잡혀갔어요. 정말 착…한 아이인데….”


“저런….”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느낌이 안 좋은데….’

휩쓸리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보통 이런 느낌은 들어맞기 마련이어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저니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뭐? 저거 카나 아니냐고? 어디?!”

똑똑히 들리는 내 이름.

재빨리 등을 돌렸지만 용케 알아챈 저니가 팻말을 집어던지고 달려왔다.

“카…. …내 동생!”

“누가 동생이야….”

격하게 달려온 그녀는 이름을 부르는 대신 나를 꼭 끌어안았다.

감동한 눈으로 우리를 보는 주변 사람들.

심지어 감수성이 뛰어난 몇 명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으니.

나는 나를 꼭 끌어안은 그녀의 품속에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개판이네.’

정말로.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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