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
내가 도발을 하자마자 영애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은 현직의 기사들도 버티지 못하는 스킬이다.
아카데미 입학조차 하지 못한 영애들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겠지.
오히려 바로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은 저들의 인내심을 칭찬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뭐 그래봐야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만.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하핫. 웃겨라♡ 기세등등하다가 꼬리를 마는 게 꼭 개새끼 같네?♡”
“뭐라구요?”
“개새끼 이하♡ 쓰레기♡ 말싸움도 제대로 못하는 좆밥♡”
연이은 도발에 저들의 얼굴에 새겨져있던 자그마한 웃음조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분노가 대신하여 채운다.
나는 저들의 적의를 받으며 차오르는 고양감에 웃음을 지었다.
열 받냐? 열 받는 거야?
그럼 때려보시던가.
백작 영애의 뺨을 후려쳐 보시던가.
할 테면 해보라는 듯 뺨을 내밀어 주었더니 맨 앞에 있던 여성이 손을 치켜들어 그걸로 내 뺨을 후려쳤다.
여성은 소울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는 사람답게 나름 단련을 한 것인지 꽤나 매운 손을 지니고 있었다.
뺨을 타고서 알싸한 통증이 퍼진다.
그렇지만 내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가지 않았다.
야. 이걸로 네가 먼저 공격한 거다?
주변에 목격자들도 한 둘이 아니라서 날조도 못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무얼 하던 간에 정당방위야.
얻어맞았다고 울지마라?
주먹을 쥐고서 그대로 여성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예 날려버릴 생각으로 내지른 주먹이지만 여성은 그걸 맞고도 멀쩡히 버티고 서 있었다.
아프긴 한 듯 얼굴에 눈물이 살짝 맺혔지만 그 뿐이었다.
“당신!”
“그러게 맞을 짓을 하질 말았어야지. 응?♡”
내 도발에 완벽하게 넘어 온 듯 여성은 이를 악물고서 내게 달려들었다.
몸을 움직이는 데 익숙한 걸로 봐서 가문에서 전투의 훈련을 받은 것 같다.
그렇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내가 포셀한테 구르면서 메이스를 쓰는 법만 배운 줄 알아?
그 녀석은 무기를 잃어버렸을 때도 대비해야 한다면서 맨 몸으로 적을 상대하는 법도 가르쳤다고.
포셀이 내지르던 주먹에 비하면 네가 내지르는 주먹은 너무 느려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야.
여성의 주먹을 피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우선은 복부를 가격해서 충격을 가한다.
노리는 것은 복부 외각에 내장이 들어있는 쪽.
퍼억.
내장에 데미지가 들어간 듯 여성의 움직임이 잠시 굳어버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여성의 턱을 올려쳤다.
뇌가 흔들린 걸까 내 앞에 서 있던 영애가 실이 끊어진 인형마냥 바닥에 쓰러진다.
약해빠졌네.
이 정도 실력밖에 없으니까 소울 아카데미에서도 비중이 없었던 거 아냐.
바닥에 쓰러진 영애를 내버려 둔 채 그 뒤에 있는 이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두 사람은 일전의 다툼을 보고서 겁을 먹은 듯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지금 자신들의 친구가 당했는데도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 거야? 한심한 잔챙이들이네.
상대할 가치도 없어.
‘칼. 시녀. 가자.’
“허접들. 가자.”
영애들을 내버려두고서 자리를 뜨니 내 뒤로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완전히 이목을 끌어버렸네.
뭐어 상관은 없어.
어차피 난 아무런 잘못도 한 게 없으니까.
터무니없는 모욕으로 먼저 시비를 건데다가 먼저 내 뺨을 후려친 쪽은 저 영애들이잖아.
나는 어디까지나 거기에 대응을 해줬을 뿐이라고.
일련의 과정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상한 소문이 나기라도 하겠어?
*
왕국 귀족 파벌의 우두머리라 불리는 공작가문 파트란의 영애인 조이 파트란은 자신의 시종들을 이끌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소울 아카데미에 방문한 그녀지만 정작 그녀의 마음속에 시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공작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을 교육받은 그녀에게 소울 아카데미의 시험은 당연히 통과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공작 가문의 여러 교사에게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할 수 있을거라 확언 받은 그녀는 시험에 대해선 일말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롯이 하나.
소울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레스토랑인 ‘티어라 마스’ 뿐이었다.
한 때 왕국의 여러 행사 때 나오는 식사를 총괄하던 셰프가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서 차린 식당인 티어라 마스는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식당으로 유명했다.
비슷한 다른 식당에 비해 가격이 몇 배는 높음에도 불구하고 티어라 마스는 방문하길 바라는 손님들이 많아 언제나 자리가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권세 높은 귀족이라 하여도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하지 않으면 식당에 방문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형제자매들에게 티어라 마스의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 지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던 조이는 소울 아카데미에 입학할 일정이 정해지자마자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티어라 마스의 자리를 예약했다.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이 많아 무척이나 경쟁이 치열했지만 조이는 파트란 가문의 가훈처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사투 끝에 승리를 쟁취했다.
식사 자리를 구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예약에 성공한 그 날부터 조이는 티어라 마스에 가는 날만을 고대 했고 오늘은 그 꿈을 이루게 되는 날이었다.
얼마나 맛있을까. 오라버니가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한 번 먹으면 잊을 수 없는 맛이라 했었는데.
가문의 요리사가 해준 음식을 먹으며 혀가 높아진 오라버니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맛이 엄청나단 거겠지?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오라버니의 얼굴을 떠올린 조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늘 같이 티어라 마스에 방문해 음식을 소개해주기로 한 그녀의 오라버니에게 갑자기 사정이 생긴 것이다.
아카데미에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다나 뭐라나.
어쩌겠는가.
때로는 자신의 동생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흥이다. 나중에 티어라 마스에서 먹었던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놀려줘야지.
티어라 마스의 표를 손에 쥔 채 투덜거리며 걷던 조이는 저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웅성이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자세히 살피니 군중의 한 가운데에 바닥에 쓰러진 영애 하나와 그를 간호하고 있는 다른 영애와 시종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쓰러지신 분. 베인즈 백작 가문의 메릴님이지?
왜 뺨에 멍이 들어 계시는 걸까.
괴한의 습격이라도 받으신 건가?
“엘?”
“예. 아가씨.”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봐 주시겠어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군중 사이로 떠나갔다가 얼마 있지 않아 돌아온 그녀의 시종이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메릴님과 루시님이 말다툼을 하다가 메릴님이 루시님의 뺨을 후려쳤다니!
그리고 먼저 공격을 당한 루시님은 그 모욕을 참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으며 메릴님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그게 무슨.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두 같은 답을 했습니다.”
조이가 의문을 표하자 그녀의 시종이 말을 덧붙였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거구나.
메릴이 루시에게 시비를 건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둘은 여러 사교장에서도 서로 으르렁거리던 사이니까.
지난 연말에 있었던 만남에서 루시님이 메릴님의 얼굴에다 음료를 쏟아 버리곤 ‘잘 어울리네. 나한테 고마워해. 잡견은 꼬질꼬질해야 멋지잖아?’ 라고 했던 것을 조이는 기억했다.
메릴님은 그 울분을 기억하고 있다가 루시님을 만나자마자 시비를 건 거겠지.
조이가 놀란 부분은 둘이 싸웠단 것보다는 루시가 메릴을 이겼다는 점이었다.
메릴 베인즈가 나고 자란 베인즈 가문은 무가로 명성을 떨치는 곳이다.
철혈백 베네딕이 이끄는 알른 백작 가문에 비할 곳은 아니지만 명문이라는 부분에서는 부족함이 없다.
그런 가문에서 태어나 기사로서 키워진 메릴은 여성이면서도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뛰어난 무위를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루시는 어떤가.
이전 사교장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계단을 오르다 헥헥대던 연약한 여성이지 않았나.
그런 루시가 메릴을 이기다니.
조이가 쓰러져 있는 메릴을 보지 못했다면 쉬이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역시 철혈백의 자식분이라는 건가요.”
기왕이면 베네딕님의 그 호탕한 성격까지 닮았다면 좋았을 텐데.
조이는 루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왕국의 귀족 중에서 루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마냥 다가가기만 하면 상처를 입히는 그녀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당장 조이만 해도 루시의 말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적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루시님을 고슴도치라 해도 괜찮은 걸까.
생긴 게 귀여운 거나 가시가 있다는 것 똑같다.
그치만 손을 안 대면 괜찮은 고슴도치와는 달리 루시님은 손대지 않아도 상처를 입히지 않나.
굳이 따지자면 가시를 발사하는 고슴도치 아닐까.
특유의 성격 때문에 여러 사건 사고를 벌이던 루시님이 무력마저도 손에 쥐었다니.
무서운 일이다.
그래도 예전엔 연약한 몸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는데 지금부터는 규모가 달라질 거란 이야기니까.
앞으로 루시님과 연관되는 건 최대한 피해야겠다.
어차피 루시님은 공부를 못하는 분이니까 아카데미 시험을 치더라도 입학하진 못할 거다.
그러니 시험을 칠 때까지만 루시님과 만나지 않는다면 얽힐 일도 없겠지.
“아가씨.”
“무슨 일인가요?”
“저 레스토랑 앞에서 팔짱끼고 계신 영애 분. 알른 영애님 아니신가요?”
…어라?
왜. 왜 저 사람이 저기에 있는 거야.
어어어떡하지?
인사를 해야 하나?
모르는 체를 하고 지나갈까?
아냐. 무시를 하면 안 돼. 눈치채지 못한 척하면서 지가나면 분명 자길 무시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럼 나중에 아카데미 시험에서 얼굴을 마주친 순간 나한테 가시를 쏘아대겠지.
그래. 인사만 하자.
가볍게 인사를 하고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야.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그리 결심을 한 조이는 조심스럽게 루시에게 다가갔다.
*
<자신만만하게 식당에 와놓고는 예약제로 운영하는 곳인지를 몰랐다니. 여아야. 정말 기억력에 문제가 있느냐?>
‘할아버지. 닥쳐요.’
내가 한 가지 잊고 있었던 것은 레스토랑 ‘티어라 마스’가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이란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게임 안에서 히로인과 식사를 할 때도 히로인이 우연히 티어라 마스의 표를 구해서 이 곳에 오게 된 거였지.
이벤트 때 말고는 방문할 수 없는 식당이라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티어라 마스의 문턱을 넘는 데에 실패했다.
으으. 기운이 쫙 빠지는 느낌이야.
여기까지 오면서 이 곳의 맛있는 음식을 먹을 걸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니.
“알른 영애님.”
뭐야. 이번에는 또 누가 나한테 시비를 걸려는 건데.
어떤 년인지는 모르겠지만 너 잘못 걸렸어.
나 지금 엄청나게 짜증이 나 있다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바로 터지는 폭탄이란 말이야.
어디 한 번 날 모욕해 보시지.
지금 내 마음 속의 울분을 담아 화풀이를 해 줄 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내가 보게 된 것은 내게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조이 파트란.
내가 소울 아카데미에서 애정하던 캐릭터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