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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20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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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머리 소녀가 손끝에서 뿜어내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서 천천히 걸어 나가고 있었다.

전후좌우, 어디에도 의지할 만한 표식이 없는 공간.

소녀는 희미한 빛이 비치는 발밑의 둥글둥글한 파이프만이 길을 인도하는 지표가 되어주었다.

통. 통. 통.

파이프가 금속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발소리는 텅 빈 드럼통을 두들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두워. 배고파. 발 아파.”

[어두워. 배고파. 발 아파.]

“어두워. 배고파. 발 아파.”

[어두워. 배고파. 발 아파.]

메아리처럼 어두운 공간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

터덜터덜 힘없이 걷는 소녀의 입에서는 투덜거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분홍 소녀는 당장이라도 누워서 쉬고 싶었지만, 두 뺨 정도밖에 안 되는 파이프 위에서 자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바닥도 안 보이는데, 자다가 떨어지면 대참사였으니까.

‘별빛 개미를 피하겠다고, 무턱대고 어두운 곳에 들어온 게 실수인가….’

‘뭐, 당연히 실수겠지.’

소녀는 속으로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를 떠올리며, 끝없이 이어지는 파이프 위를 걸었다.

흐아암.

분홍 소녀는 입을 크게 열며 하품했다.

‘졸려.’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

쭈우욱 일직선으로 걷기만 해야 하는 파이프.

게다가 벌써 하루는 통으로 새어버린 상황.

외줄 타기를 하듯이 파이프를 타고 가는 것이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수마가 소녀를 덮쳐들고 있었다.

찹찹.

그래서 소녀는 잠에서 깨기 위해서, 새하얀 꽃잎을 하나 꺼내더니 입에 넣고 냠냠 씹었다.

으엑.

그 맛이 굉장히 쓴지, 분홍 소녀는 인상을 구기고 혀를 베- 하고 내밀었다.

그렇게 소녀는 연금술 시료 중에서 먹을 수 있으면서도 맛없는 것들을 골라 먹던 도중, 저 멀리서 희미한 빛을 발견했다.

분홍 소녀는 입을 열고 ‘오오!’ 하고 소리친 뒤, 마치 곡예를 하듯이 빠른 속도로 파이프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빛이다!”

순식간에 빛 앞에 도착한 소녀는 빛을 향해 점프했다.

그렇게 빛을 향해 뛰어든 순간, 소녀는 어둠으로 가득한 거대한 건물을 빠져나와 익숙한 밤하늘과 새로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금속으로 만든 파이프와 달리 단단하고 견고한 돌바닥.

그리고 그 돌바닥 위를 폭신하게 덮은 하얀 가루.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을 뒤덮어 버린 하얀 가루는, 소녀가 처음 보는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 하얀 가루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별빛을 반사해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위로 소녀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익숙한 장막이 소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시선이 닿는 하늘 전체를 뒤덮어 버린 끝없는 하늘 장막.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늘을 가리고 있었던 장막이었다.

하늘 장막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져서, 그 너머로 밤하늘의 일부가 보였다.

장막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깊고 어두운 검은색이었지만, 그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들은 마치 보석을 뿌려놓은 듯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달님이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네.”

언젠가부터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 달들은 초록색 달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녹색 달님도 없어져 버렸어.”

소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태양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녀는, 이제 달빛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정체불명의 존재가 분홍 소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물처럼 투명한 푸른색.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

그리고 커다란 모자를 뒤집어쓴 무언가였다.

***

미니 사신 정원 깊숙한 곳.

나는 마시멜로 평원에 누워서, 편안하게 쉬고 있었다.

결국 강철탑 공간 뒤죽박죽 사태 해결을 포기하고, 뒹굴뒹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서울숲은 ‘눈’으로 아무리 살펴봐도 오브젝트는 보이지 않고, 그저 공간만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 공간 얽힘이 자연스러운 ‘자연 현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색채 우주와는 관련은 없어 보이니까, 괜찮겠지.

만약 원인인 오브젝트가 있어도 강해 봐야 ‘달’ 정도라는 건데, 만약 튀어나오면 그때 때려잡으면 그만이겠지.

‘피곤하네.’

강철탑에 대해 고민하느라 어제 8시간밖에 못 자서 그런지, 피로가 내 몸에 달라붙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금 사신들도 내가 낮잠을 자려는 것을 눈치챘는지, 우글우글 몰려든 상태였다.

‘냠냠.’

‘엄마….’

나를 따라 누운 황금 사신들은 순식간에 잠들어서, 내 머리카락을 냠냠 먹거나 엄마를 찾으며 단단하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잠이 들려고만 하면, 유령 사신이 시야 구석에서 볼록 튀어나왔으니까.

유령 사신은 고무로 만든 것처럼 말랑말랑한 나이프를 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또 내 이마를 찌를 생각이겠지.

눈을 감으면 슬금슬금 다가오고, 눈을 뜨면 ‘휙’하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물론 잠들 때는 습관적으로 눈을 감기는 했지만, 유령 사신도 다른 미니 사신들처럼 내가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눈을 꼭 감고 잠든 척을 하기 시작했다.

슬금. 슬금.

처음에는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하더니, 내가 잠든 것을 확신하자마자 유령 사신은 거의 순간 이동에 필적할 정도의 속도로 날아와 내 이마 위에 멈추어 서버렸다.

‘효도!’

그리고 유령 사신이 의지를 뿜어내며, 말랑말랑한 나이프로 내 이마를 폭 찔렀다.

‘폭!’

그 순간 찔린 자리에서 청량감이 퍼져나가더니,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저번에 찔렸을 때는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이번에는 뭔가 기분이 좋아졌다.

진짜 효도였던 건가?

나는 예상과 다른 효과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유령 사신을 붙잡아버렸다.

‘으앙!’

내가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지, 내 몸 위에서 곤히 자고 있던 황금 사신들은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갑자기 굴러서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황금 사신들은 유령 사신을 보고는 해맑은 표정으로 폴짝폴짝 뛰었다.

‘엄마가 유령을 찾았어!’

아, 그러고 보니 이 패륜 사신은 황금 사신들이 찾던 유령이었지.

그리고 황금 사신들이 반가운 얼굴로 내 팔 위를 타고 오르더니, 유령 사신에게 마구 달라붙기 시작했다.

‘동생!’

‘새로운 동생!’

황금 사신들은 자신의 말랑한 볼을 유령 사신에게 마구 비볐다.

‘이상하게 다른 동생보다 좋아하는 것 같네.’

그렇게 유령 사신 위로 황금 사신들이 잔뜩 들러붙기 시작해서 거대한 공을 이루기 시작하자, 나는 그 거대한 구체를 바닥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모스 볼처럼 거대한 황금 사신 덩어리가 되어버린 유령 사신.

그러다가 몇몇 황금 사신들이 유령 사신의 내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

그렇게 유령 사신의 내부를 확인한 황금 사신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후다닥 모스 볼에서 분리되었다.

‘비슷해?’

‘비슷해!’

그리고 떨어진 황금 사신들끼리 모여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도대체 뭐길래 저러지?

황금 사신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져서, 나는 모스 볼을 파헤쳐서 유령 사신의 유령 껍데기를 들췄다.

‘앗!’

그러자 드러난 것은 나랑 굉장히 닮은 미니 사신이었다.

미니 사신치고도 조그마한 몸.

노랗게 빛나는 눈.

회색 피부.

노랗게 빛나는 깨진 헤일로.

엄청 부스스하고 한쪽 눈이 가려진 머리카락.

그리고 그렇게 모습이 드러난 유령 사신은 멋쩍은 표정으로 살짝 웃으며 혀를 내밀고 칼을 핥고 있었다.

다른 미니 사신들도 나랑 닮긴 했지만, 피부색마저 똑같으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물론 생긴 건 황금 사신이 나랑 제일 비슷하긴 하지만, 표정이 너무 달라서 전혀 안 닮아 보였다.

‘미니 엄마 동생!’

‘동생!’

그 순간, 유령 사신의 모습을 확인한 황금 사신들이 유령 사신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황금 사신들은 유령 사신의 통통한 뺨을 깨물고, 유령 사신의 통통한 뱃살도 깨물었다.

‘으앙!’

황금 사신의 열렬한 관심을 받으며 온몸을 깨물린 유령 사신은 구해달라는 것처럼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히히 웃으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앙대!’

유령 사신은 그렇게 황금 사신 덩어리 속에 깊숙이 파묻혀 버렸다.

***

쿵. 쿵. 쿵.

새하얀 눈 위로 골렘의 발자국이 찍히기 시작했다.

“그래, 그쪽 길이야.”

<앞으로 걸어 나가는 엄마 골렘!>

푸른 사신은 혼자서 만든 작은 엄마 골렘을 분홍 소녀의 인도에 따라 조종하면서, 힐끗힐끗 옆자리에 있는 소녀를 훔쳐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애착 인간!’

다른 푸른 사신과 달리 좀처럼 애착 인간을 만들지 못했던 푸른 사신은 이 생소한 공간에서 애착 인간을 만날 수 있었다.

히히.

그래서 그런지 푸른 사신은 행복한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사실 당장이라도 몸을 숨기고 애착 인간을 관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분홍 소녀는 너무 외로워 보였고, 진화액 냄새가 가득한 이곳은 너무 위험해 보였으니까.

<계단을 오르는 엄마 골렘!>

전혀 다른 세상이라 그런 걸까, 신기하게도 애착 인간은 푸른 사신이 쓰는 문자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 골렘!”

분홍 소녀는 푸른 사신의 볼을 콕콕 찌르며 문자열을 따라 읽거나,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렸을 때 뭔가를 배웠던 것 같은데….”

“연금술사랑 마도서의 관계…?”

“말하는 마도서는… 마도서는… ‘귀엽다’ 였던가?”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던 분홍 소녀는 ‘아, 모르겠네!’라고 소리치더니,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

‘애착 인간.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여.’

애착 인간은 계속 밝은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지만, 굉장히 병든 상태였다.

아마도 영양실조.

푸른 사신의 능력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다.

“저게 뭐지?”

푸른 사신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분홍 소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애착 인간의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명한 유리로 된 벽.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현대식 구조물.

그리고 그 구조물의 간판에는 ’24시간 편의점’이라고 적혀있었다.

“이건 글자인 건가?”

애착 인간은 어느새 골렘의 어깨에서 내려가서, 이리저리 살펴보는 중이었다.

예리한 칼날로 도려내서 옮겨둔 것 같다는 점만 빼면, 그 건물은 푸른 사신에게 굉장히 익숙한 건물이었다.

서울숲 근처에 있었던 편의점이었으니까.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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