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0
던전이 공략 됨에 따라 퀘스트가 실패했고 그에 따라 패널티가 주어진다는 내용.
그 문구를 본 나는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주신이 내어 준 퀘스트를 클리어 하는 것보다 내 자존심을 지키겠노라 마음 먹은 순간부터 이런 결말이 찾아올 것은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설마 던전이 공략되는 방식이 내가 설계한 방향이 아니라 무력에 의한 찍어 누르기가 될 줄은 몰랐지만.
기분이 굉장히 미묘해.
내 친구들이 그토록 노력한 끝에 저렇게 강해졌다는 사실은 솔직히 기쁘다.
칼의 검술을 기반으로한 보스를 상대로 한 치 물러섬이 없이 대치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 프레이.
전위와 후위를 오가며 만능형 마검사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여실히 보여주던 아서.
자신의 신성마법에 일반적인 마법의 지식을 더해 한 층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서고 있는 페이비.
죽을 수밖에 없게 설계해 두었던 마법을 파훼하는 것으로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를 증명한 조이.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해진 이들의 모습은 내 마음 속에 대견함이라는 감정을 새겨 주었다.
그 강해진 능력으로 내가 만들어낸 던전을 박살낸 게 아니었더라면 진짜 마음 편하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 텐데.
…하아아.
패널티로는 어떤 게 주어지려나.
예전에 억까하려다 실패한 치욕스러운 무언가?
아니면 토ㅋㅋ 끼ㅋㅋ 의 재현?
그것도 아니라면 루시의 예전 드레스를 입고 다녀야 한다던가?
과거의 일을 돌이켜보고 있으려니 페도 변태 주신이 나한테 선사하고자 했던 것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자신의 사도가 참교육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이딴 쓰레기가 정말 주신이라는 말인가.
이 세상의 미래는 어둡구나.
아! 진짜!
뭐든 간에 벌을 주려던 빨리 내놔!
이렇게 마음 졸이고 있는 순간이 제일 짜증난다고!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온갖 생각이 다 들잖아!
설마 이것까지도 노리고 그러는 거냐?!
안절부절 못 해 하는 나를 보면서 즐기고 있는 거야?!
진짜 그럴 것 같아서 무섭다! 이 성범죄자 주신아!
“알른 영애.”
마음속으로 변태 주신을 향한 혐오를 표출하고 있으려니 던전학 교수가 화면에서 시선을 떼며 목소리를 냈다.
“이런 식으로 공략될 것도 상정해 두신 건가요? 본래 공략과는 대사가 다르네요.”
‘당연하죠.’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네. 쯧. 이래서 멍청한 교수는.”
물론 내가 바라는 건 기믹을 쓰는 것으로 던전의 완벽한 끝을 보는 것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기믹을 쓰지 않고 던전을 공략하는 경우 또한 설계에 넣어두긴 했다.
과거 온갖 방식으로 던전 제작자를 엿 먹이던 사람이 바로 나야.
던전을 공략하는 이들이 얼마나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잘 아는 내가 모든 일이 내 계획대로 흘러가리라 확신했을 리 없잖아.
당연히 변수가 생길 거라고 봤고,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설계에 포함시켜 뒀다.
죽어라 노력해서 무언가를 공략했는데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면서 진행이 막히면 마음이 짜게 식는다고.
내가 만든 완벽한 던전에서 그런 경험을 하게 둘 순 없지.
“세심하시네요.”
‘별 거 아니에요.’
“이런 걸 보고 세심하다 그러다니. 자칭 교수 나부랭이는 도대체 얼마나 우둔한 거야? 완~전 한심해.”
“아하하. 저는 평가를 하는 입장이니까요. 이런 숨겨진 길이 있으면 점수를 매기기 어려워지거든요.”
던전학 교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서 일행이 받게 될 점수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5층을 제외한 다른 층은 멀쩡하게 공략했으니 정상적으로 점수를 인정해주지만 5층은 아니다.
기믹을 공략하는 능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곳에서 기믹을 무시한 채 던전을 진행했으니 평가 상으로는 5층을 공략했단 사실 자체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진행이 정상적이지 않으면 막히게 만들어두죠. 그래야 잘못되었단 사실을 알아차리고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되니까요.”
…어. 잠시만. 그러니까 지금 던전학 교수의 말대로라면 쟤네는 내가 별개의 엔딩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잘못했단 걸 알아차릴 수 없게 됐단 거지?
“혹시나 싶어 말씀드립니다만 이를 알려주시면 안 됩니다. 그건 부정이니까요.”
‘그…렇죠?’
“흥. 심술궂기는. 그러니까 주름이 자글거리는 아줌마가 되는 거야.”
“…아직 아줌마라는 말을 들을 나이는 아닙니다만.”
늙었다는 이야기에 던전학 교수가 입술을 부들거리는 동안 난 흔들리는 눈동자로 던전의 마지막에서 목소리를 드높이며 기쁨을 나누는 이들을 살폈다.
괜…찮겠지?
감점을 받더라도 쟤네가 던전학 시험 1등이라는 건 바뀌지 않을 테니까.
1학년 중에서 그 누가 쟤들보다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겠어.
그래. 결국 결과는 바뀌지 않아.
그럼 내 잘못도 없는 거야.
– 띠링!
뭡니까. 허접 주신님.
이제야 벌칙의 내용이 정해진 건가요?
대체 뭘 보고 싶으십니까?
당신의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해 저에게 뭘 시킬 생각이신지 궁금하네요.
잘 생각하세요. 진짜 괴상한 게 튀어나오면 저 그냥 전향해버릴 거니까!
[퀘스트 실패의 패널티로 당신은 던전의 최초 공략자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줘야 합니다.(무엇이든)]
던전의 최초 공략자라면 쟤네들이죠?
아서랑 조이. 페이비. 프레이. 이 네 사람.
푸하핳. 뭘 생각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벌칙을 잘못 고르셨네요.
저 어차피 쟤네랑 내기한 게 있어서 쟤들이 바라는 걸 들어줘야 하거든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벌칙이라 이겁니다.
절 괴롭히는 데 진심인 허접 주신님이라면 분명 괴악한 걸 요구하리라 생각했는데 겨우 이런 거라니.
제가 계속 허접 주신이라고 부르니 진짜로 허접이 되어버리신 건가요?
허접 주신이 내어준 패널티를 보고 코웃음을 치던 나는 문득 맨 마지막에 덧붙여진 (무엇이든)이라는 문구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잠시.
다시 생각을 해보자.
허접 주신이 나랑 쟤네들이 한 내기를 모르고 있었을까?
그럴 리가!
허접 주신은 완전 기분 나쁜 스토커 녀석이라고!
내가 샤워하는 것을 보면서 허억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저 소름끼치는 변태가 내기의 내용을 몰랐을 리 없어!
그런데도 저 내용을 패널티로 주었다는 것은 분명 무슨 의도가 있다는 거겠지.
무엇이든.
무얼 원하건 들어줘야 한다.
패널티에 의해 강제로.
…이거 엄청나게 위험한 패널티네.
생각해 봐!
만약의 경우 저 권리가 얼빠여우의 손에 들어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냐고!
얼빠여우가 혀를 낼름거리는 모습을 상상해버린 나는 저도 모르게 양 팔을 끌어안고 말았다.
나도 알아. 쟤네들이 얼빠여우마냥 지독한 부탁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렇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언제나 생각한 대로 흘러가진 않잖아.
당장 내가 만들어 둔 던전만 봐도 알 수 있어!
기믹을 쓰지 않으면 절대로 공략할 수 없게 만들어 둔 던전이 개인의 무력에 박살이 났다고!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는 상식이 부서지는 순간엔 그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 해!
누가 농담을 하듯 괴상한 부탁을 하는 순간 그대로 나는 끝장이 나는 거야!
내가 친구라 생각하는 이들로 내 존엄을 박살내려 하다니.
이딴 게 주신?
진짜 이런 게 선신들의 중심?!
야! 신들아! 이래도 되는 거야!?
이런 악독한 변태가 너희들을 대표해도 괜찮은 거냐고!
허접 주신의 악독함에 몸서리를 치던 나의 귓가에 화면 속에서 아서 일행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슬슬 쉴 만큼 쉬었으니 바깥으로 나가도록 할까. 루시 알른 그 녀석에게 우리의 승리를 알려야지.’
‘후후. 드디어 제 꿈 중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됐네요!’
‘꿈이라니? 조이. 네 녀석 루시 알른에게 무얼 부탁하려 그러는 것이냐.’
나도 궁금해. 조이!
나한테 뭘 부탁하려고 그러기에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러는 거야?!
왜 양 뺨을 살짝 물들이고 말을 망설이는 거야?!
설마 너도 얼빠여우나 변태사도 같은 이상한 사람이 된 건 아니지?
그치?!
제발 그렇다고 해주라!
‘그…그런 걸 물어 보시려면 우선 왕자님부터 말씀을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나 말이냐? 별 것은 아니고 그냥 루시 알른의 무릎을 꿇힌 채 사죄를 시킬 생각이다만?’
이런 식으로라도 사과를 시키지 않으면 평생 미안하단 말을 하지 않을 녀석이니 평소 깐족거리던 것이나 예의 없던 행동이나 괴롭힘에 가까운 여러 행동들에 대한 사죄를 시킬 것이라는 아서의 말이 끝난 순간.
그를 보는 세 사람. 아니 나까지 포함해서 네 사람의 시선이 짜게 식었다.
저 녀석. 평소에 대범한 척 하더니 그거 하나하나를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구나.
완전 쪼잔해.
마음의 크기가 작아서 불쌍한 소인배 왕자야.
‘뭐냐! 평소 내가 루시 알른에게 당한 것이 얼마인데 이 정도는 바랄 수 있지 않은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네. 맞습니다. 3왕자님. 사과를 원할 수도 있는 거죠.’
‘…존중할게. 왕자님.’
‘그런 식으로 날 보지 마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지 말란 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일까.
아서는 말을 하다 말고 손가락으로 조이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조이! 네 녀석은 무얼 부탁할 생각이지?! 날 한심하게 바라볼 정도이니 분명 정상적인 거겠지?!’
‘네? 네?! 저요?!’
‘네 녀석이 바라던 대로 먼저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네 놈도 말을 해라! 어서!’
‘그. 그게. 그러니까 영애와 수도에서 놀아 달라 부탁할 생각이었어요.’
집요한 추궁 속에서 조이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을 했지만 아서의 눈빛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뿐일 리 없다! 사실을 고하라!’
‘정말이에요! 저는…’
‘조이 파트란!’
부채로 벌겋게 물든 얼굴을 가린단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몰린 조이는 눈동자를 마구잡이로 움직이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사실을 고했다.
‘여…영애를 제 마음대로 꾸며주고 영애께도 절 꾸며 달라 부탁할 생각이었습니다. 예전부터 꿈꿔왔던 일이랍니다.’
겨우 그런 거야?
말을 끝마치고 차마 고개를 못 드는 걸 보면 진짜인 것 같기는 한데.
푸흐흫. 아. 정말. 귀엽다니까.
저런 부탁이라면 따로 말하지 않아도 들어줄 수 있는…
아니. 잠시만.
조이가 내 옷을 골라 줄 예정이라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직접?
악역영애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소녀소녀한 감성을 지닌 네가?
순간 끔찍한 광경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그것은 구체화되지 못했다.
그 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서가 말을 이었으니까.
‘그게 그대의 꿈이라고?’
‘네에. 보통의 영애분들은 절 불편해하니까요. 이런 것을 부탁하면 얼마나 힘들어할지 아는데 어찌 부탁을 하겠습니까.’
‘그. 그렇긴 하겠군.’
자신과 같은 추악함을 찾아내기 위해 추궁을 하다 소녀다운 순수함을 발견해버린 아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우물거리다.
‘그. 뭐냐. 프레이! 그대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결국 수습을 하는 대신 추하게 이야기를 돌리는 것을 택해버렸다.
이상하다. 아서 쟤 게임 속에선 나름 멋있는 계열의 캐릭터였던 거 같은데 어쩌다 저런 개그 캐릭이 되어 버린 걸까.
이것도 내 영향인가? 내가 뭔가를 잘못한걸까?
‘나?’
‘그래! 그대 말이다!’
‘나 말이지. 난 칭찬해 달라고 할 거야. 잘 했다고. 대단하다고. 천재라고 해주면 정말 기쁠 것 같은 걸.’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런 말을 해주면 마음이 따뜻한 걸로 가득찰 것 같다는 프레이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난 차마 견디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싸맬 수밖에 없었다.
너무 순수하잖아! 프레이!
네가 언제부터 그런 착한 아이였다고 그렇게 흐뭇한 표정을 짓는 거야!
프레이의 순수함이 지닌 파괴력은 던전 안에 있던 이들에게도 동일했던 모양이다.
아서가 추궁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굳어버린 걸 보면 말이다.
‘여러분들?’
그렇게 찾아온 침묵 속에서 여태까지 방관자의 입장에 서 있던 페이비가 슬며시 목소리를 냈다.
‘이제 슬슬 나가죠. 바깥에 저희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으실 테니까요.’
‘아. 아아. 그렇겠군요. 이번 던전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었으니까요. 최초 공략자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겠죠.’
페이비의 부드럽고도 평온한 목소리 속에서 상황이 무마되려던 그 순간. 조이가 갑자기 고개를 퍼뜩 들었다.
부끄러움이 차오르다 못해 오버플로우 되기라도 한 듯 악역영애다운 표독함을 담은 그녀의 눈은 프레이마저 뒷걸음질 치게 할 정도로 사나웠다.
‘어디서 혼자만 빠져나가려 하시는 건가요. 페이비.’
‘네? 아뇨. 저는 그저.’
‘당장 말하세요. 당신이 영애께 부탁하고자 하는 것을.’
조이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을 본 페이비는 얼굴을 창백히 물들이며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이미 아서와 프레이는 저만치 뒤로 물러나있는 상태였다.
‘저건 건드리면 안 된다. 프레이.’
‘…응. 그래 보여.’
홀로 남겨진 페이비는 조이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 도주는 페이비의 등이 벽에 닿음에 따라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상하네요. 제가 아는 페이비는 혼자서 살아남으려는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었는데요.’
‘조이? 정말 그런게 아니에요. 지금도 바깥에서 많은 분들이.’
‘그래요? 그럼 페이비 당신이 빨리 말해주면 되겠네요.’
‘그런?!’
페이비는 정말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그녀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방금 전 자신의 속마음을 까발려지게 된 조이는 이미 이성이 날아 가버린 상태였으니까.
‘그게. 그러니까.’
‘자. 어서.’
‘무엇을 부탁드리려 했냐면요…’
‘사람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다면서요?’
‘저… 절 위해 기도해 달라 부탁드릴 생각이었답니다아아아…’
끝에 몰린 페이비가 울상을 지은 채 사실을 고하고 나서야 조이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진즉에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얼마나 좋아요.’
…조이 놀리는 거 적당히 하자.
쟤가 진심으로 열 받으니까 완전 무섭네.
공포극복이고 나발이고 흐에엥. 잘못했어요. 라고 하게 될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