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마저 사라져 버린 어두운 세계.
분홍 소녀는 굉장히 들뜬 기분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건물도 원인 중 하나였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푸른 사신도 그 원인 중 하나였다.
그저 혼자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하염없이 위로, 하늘 장막을 향해 나아가기만 했던 분홍 소녀.
소녀는 언제나 굉장히 외로웠다.
소녀가 일평생 만났던 사람이라곤, 그녀가 ‘할아버지’라고 불렀던 나이 든 남자뿐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할아버지’조차 그녀가 제대로 세계를 인식할 즈음에는 이미 죽어버렸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푸른 사신은 마치 친구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겨우 손바닥만 한 데다가 ‘마도서’와 인간으로 종족마저 달랐지만, 그랬다.
“가보자!”
분홍 소녀는 푸른 사신을 손아귀에 쥐고는 편의점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어… 어지러워요!>
푸른 사신은 어지러운 것처럼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분홍 소녀는 그저 해맑은 표정으로 달려갈 뿐이었다.
공간 절단에 당한 것처럼 예리하게 잘린 편의점 건물의 일부.
분홍 소녀는 떨어져 나간 간판을 내려다보았다.
<24시간 편의점. 서울….>
간판은 뒷부분이 잘려버려서, 뒷부분의 글씨가 끊어진 상태였다.
“이건… 문자인 건가? 할아버지가 알려준 문자 중에는 이런 건 없었는데?”
인상을 구기고 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분홍 소녀는 ‘뭐, 내가 또 까먹었나 보네.’라고, 간단히 넘기며 편의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편의점을 마구 돌아다니며, 즐거운 것처럼 눈을 빛냈다.
“이거 배웠던 거야. 할아버지가 먹을 거라고 했었어.”
<멈춰주세요!>
마구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통조림을 들어 올리더니 이빨로 물어뜯으려고 하자, 푸른 사신이 질겁하기도 했다.
“이거 왠지 사람 모양 같지 않아?”
벽에 사람 모양을 투영한 것처럼 뻥 뚫린 구멍을 보고 히히 웃기도 했다.
그리고 인스턴트커피 가루를 손가락으로 집어서 조금 먹기도 했다.
“오!”
<?>
“이거 맛있네. 너도 조금 먹어봐.”
분홍 소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푸른 사신의 입속에 커피 가루를 쏙 집어넣었다.
<!!!!!!!!!>
그러자 푸른 사신은 그 쓴맛에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정신을 잃고 옆으로 털썩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푸른 사신은 눈가에 눈물방울을 매달고, 분홍 소녀를 물망치로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퐁! 퐁! 퐁!
“아야, 아파! 미안하다니까!”
분홍 소녀는 망치를 휘두르며 날아다니는 푸른 사신을 피해 도망 다니며, ‘미안해!’를 연발했다.
***
서울의 끝, 서울숲 인근.
통행이 적어 언제나 사람이 적었던 그곳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적이고 있었다.
“비살상형 공간 유실이군.”
한국 오브젝트 협의회의 요청으로 조사 중인 제임스는 사건 현장을 올려다보았다.
쇠와 콘크리트, 지면 등을 예리하게 도려낸 것처럼 둥글게 파인 건물.
조사원들에게 둘러싸여 사정 청취를 듣고 있는 편의점 직원.
그리고 그 근처에 남은 ‘편의점 직원 모양’으로 덩그러니 남은 벽의 흔적.
그 모든 것은 최근 학계에 밝혀지기 시작한 공간 유실 현상인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뭔가가 번쩍하더니, 건물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어요. 제 등 뒤에 있었던 벽이랑 매대만 남아있더라고요.”
굉장히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편의점 직원은 횡설수설하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 설명을 들어보면 확실히 공간 유실 현상이 분명했다.
공간 유실 현상의 특징은 두 가지.
첫 번째는 공간 절단처럼 예리한 절단 흔적.
두 번째는 휘말린 사람에게 직접적인 상해가 없음.
제임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건 현장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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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유실의 빈도와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군.’
‘다만 공간째로 잘려 나가는 현상은 현재 기술로 대처 불가능해.’
‘아무래도 공간 유실 경보기의 설계를 더욱 서둘러야겠어.’
부스럭.
발아래서 나는 소리에 제임스가 고개를 돌려 바닥을 살펴보았다.
<…숲 지점. SEOUL FOREST LIFE 24/7>
그곳에는 사건 현장에서 날아온 것으로 보이는 반으로 잘린 편의점 간판이 있었다.
그때, 황금 사신이 여럿 달라붙어 있는 제임스 연구소 직원이 다가왔다.
“사장님.”
그 직원은 제임스에게 침착한 얼굴로 이상 현상을 보고 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서울숲 입구에 미니 사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과 서울숲에 이변이 발생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제임스가 그 말을 듣고 서울숲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잔뜩 모여든 황금 사신들이 보였다.
‘들어오면 안 돼!’
‘위험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황금 사신들은 서울숲으로 향하는 길을 막는 것처럼 일렬로 늘어서서 양손을 벌리고 있었다.
제임스 소속 연구원이 황금 사신을 넘어서 지나가려고 하면, 박치기하거나 바지를 마구 잡아당기는 등 들어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는 중이었다.
황금 사신이 박치기를 해 봤자 귀엽기만 할 뿐이고, 바지 밑단을 잡아당겨 봐야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황금 사신의 필사적인 모습은 진입하려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막아 세우고 있었다.
“그래, 그래. 안 들어갈게.”
“푸딩을 같이 먹자고?”
황금 사신의 귀여운 길 막기와 정신 오염의 연계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황금 사신들과 사람들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고 있었더니, 제임스의 비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새로운 자료를 건네주었다.
제임스 연구소 직원이 찍은 동영상으로 보였다.
서울숲 인근이 아니라, 아예 경계 초소까지 접근한 것으로 보이는 직원은 온몸에 황금 사신을 잔뜩 붙인 채, 영상을 찍고 있었다.
‘가면 안 돼!’
그 영상에서는 눈꺼풀을 잡아당기고 정수리에 뚜시뚜시를 하고 볼을 깨무는 등, 처절할 정도로 황금 사신이 직원의 걸음을 방해하고 있었다.
직원은 입속에까지 황금 사신이 들어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동전 하나를 서울숲 방향으로 튕겼다.
‘!!!!’
영상 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던 동전은 일정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공중에 먹힌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제임스에게 꽤 익숙한 현상이었다.
‘햇빛과 먼지가 깔끔하게 이어지지 않는군.’
‘공간이 이상해. 마치 제임스 시티의 남색 나무의 시공간 왜곡처럼 보여.’
제임스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비서에게 명령을 내렸다.
“심상치 않군. 오브젝트 협의회에 연락해서 서울숲 봉쇄를 평소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요청해.”
“아무래도 인간을 해치지 못하는 ‘황금 사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테니까.”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울숲 추가 조사를 위한 준비를 지시했다.
***
세희 연구소 깊숙한 곳, 안락한 격리실.
옴뇸뇸.
나는 침대에 누워서, 과자를 천천히 먹고 있었다.
TV에서는 요즘 자주 일어나는 공간 유실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오늘 오전 4시 30분경, 서울숲 인근에서 또다시 공간 유실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번 사고로 한 편의점 건물이 통째로 사라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순식간에 건물이 증발하듯 사라졌다고 합니다.]
[서울 오브젝트 협의회에서는 즉각 현장에 출동하여 주변 지역을 통제하고 추가 피해 여부를 조사 중입니다.]
[다행히 이번 사고에 아르바이트생 한 명이 휩쓸렸지만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전문가들은 공간 유실 현상이 인체에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는 않더라도, 건물 붕괴나 추락 사고 등으로 인한 2차 피해 우려가 크다고 지적….]
TV 화면에는 사고 현장 근처를 자료 화면으로 비춰주고 있었는데, 다양한 미니 사신들이 잔뜩 뚜방뚜방 돌아다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왠지 미니 사신들이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다 저기로 간 건가?
TV에서 시선을 떼서 침대 위를 바라보자, 미니 사신들이 확연히 줄어든 상태였다.
침대 위에는 유령 사신과 유령 사신과 놀고 있는 미니 사신 몇 마리뿐이었다.
하얀 천을 뒤집어쓴 유령 사신이 돌아다니면서 황금 사신을 폭폭 찔렀다.
‘으앙!’
황금 사신은 그 칼에 찔리면 과장된 자세로 쓰러지거나, 간지럽다는 것처럼 히히 웃었다.
유령 사신이 황금 사신을 찌르는 칼은 나를 찌를 때와는 조금 다르게 생긴 칼이었다.
그게 뭐냐고 물어보니, ‘애도’라고 하던데….
애정하는 칼이라는 뜻인 건가?
‘황금 사신들이랑 생각보다 잘 노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미니 사신들에게서 시선을 떼서, TV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TV 화면에는 푸른 사신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
분홍 소녀는 어제 놀다가 잔뜩 어질러진 편의점에서 눈을 떴다.
폭신하게 자신을 감싸 안고 있는 물 덩어리.
자신의 옆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잠든 푸른 사신.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밝아진 하늘.
‘어제 일이 꿈이 아니었구나.’
어제는 너무 즐거운 일들이 많아서, 긴 꿈을 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소녀는 마치 꿈이 아닌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누워있는 푸른 사신의 볼을 콕콕 찔렀다.
하움.
입 근처를 계속 찌르고 있었더니 푸른 사신은 잠결에 분홍 소녀의 손가락을 물어버렸다.
푸른 사신의 혀가 조금씩 움직여서 조금 간지러웠다.
그렇게 분홍 소녀가 히히, 웃으며 푸른 사신을 구경하던 순간, 하늘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하늘 장막 위로 천천히 지나가는 거대한 거미의 그림자였다.
‘해를 먹어버린 거미.’
분홍 소녀는 그 그림자를 올려다보며, 할아버지가 알려줬던 이름을 다시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