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1
제프는 던전의 최초 공략자로써 수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조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별 일 아니었다고, 파트란 가문의 피를 이은자로서 이 정도 쯤은 해야 하지 않겠냐 이야기하는 조이는 분명 공작 가문의 영애다운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조이를 보아왔던 그는 저 부채 뒤편에 감춰진 조이의 표정이 어떨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대단하다 치켜 세워줘서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야.
이러니저러니해도 칭찬받는 걸 좋아하는 아이니까.
주변의 동경 어린 시선이 불편하다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흐뭇한 미소를 참느라 고생하고 있겠지.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제프는 일부러 기믹을 모른 체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눈치 없이 2왕자에게 던전의 기믹에 대해 알려드렸다면. 그래서 조이가 최초공략자라는 지위를 내게 빼앗겼다면.
분명 조이는 날 원망했을 거야.
‘오라버니! 정말 싫어요!’ 라고 외치는 조이의 모습을 상상한 제프는 찢어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 잡으며 재차 자신의 선택에 칭찬을 보냈다.
“녀석.”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갤 돌린 제프는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바라보는 세실을 발견했다.
그 표정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감정은 역시 시기와 질투였다.
다만 과거 제 성질을 못 이겨 주변에 독을 뿌리고 다니던 2왕자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 속에 상대에 대한 인정이 묻어나온단 것일까.
예전의 2왕자였다면 말도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을 터인데 이제는 속으로 감정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는가.
평생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 자가 무엇을 계기로 이렇게 바뀐 것일까.
2왕자에 대한 평가를 바꾸어야겠군. 가까워질 이유가 없는 인간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젠 이용할 가치 정도는 있을 것 같으니.
여전히 왕위를 거머쥐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최소한의 연 정도는 남겨둬서 나쁠 것 없겠지.
“2왕자저하.”
“뭐냐.”
“슬슬 다시 던전에 들어가도록 하죠.”
이제부터 서서히 기믹을 알아차린 체 하자.
“학년 전체 최초공략자라는 지위는 빼앗겼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영광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하나 단서를 알려주는 것으로 내가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림과 동시에 빚을 졌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거다.
“그리 말하지 않아도 계속 도전할 생각이다. 이제와 포기하기엔 여기에 들인 것이 너무도 많으니.”
“하하. 괜한 말을 해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조이가 우쭐대는 모습을 더 보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뭣보다 나중에 쫄래쫄래 달려와서는 자기가 나를 이겼다며 으쓱댈 게 뻔한데 조이의 귀여운 모습은 그 때 보는 걸로도 충분… 하진 않아.
우리 조이의 귀여운 모습은 봐도봐도 모자람이 없으니까!
아. 젠장. 그냥 조금 더 쉬다 가자고 그럴까? 혹시 단서를 내어줄지 모른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까?
“사과는 됐고. 움직이지. 처음이 될 수 없다면 두 번째라도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안타깝게도 제프에겐 혀를 놀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세실이 자리에서 일어나버렸기 때문에 제프는 2왕자가 쓰잘데기 없이 성실해졌다 한탄하며 그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역시 파트란 영애세요. 저희는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을 당연하다는 듯 이루어 내시다니.”
“어머. 그러는 럼리 영애께서도 파트란 영애를 바짝 추적하셨잖아요.”
“맞아요! 중간까지만 해도 한 치 앞을 모를 정도였죠!”
“오호호.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랍니다.”
어느 정원 한 가운데에 모인 영애들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서로 친교를 다지던 그 때.
몇 걸음 뒤에서 그를 지켜보던 토비는 몇 번이나 발을 움직이려다 말고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재차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럼리 영애를 마주하고 저 분을 설득해야 한다만.
도저히 저기에 끼어들 자신이 없다.
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비난어린 시선을 마주하며 럼리 영애께 말씀을 청해야 한다니!
그냥 다음에 기회를 노릴까?
나중에 럼리 영애께서 홀로 계실 때를 기다리다가.
아냐. 그럼 안 된다.
시험이 끝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일 분 일 초가 중요한 이 상황에서 그런 여유를 부릴 순 없다.
던전 안에 들어가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럼리 영애를 설득해야 돼!
자기 보신과 던전 공략을 향한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던 토비는 결국 마음을 굳히고 발을 움직였다.
“누구…시죠?”
“기억났어요. 럼리영애와 함께 던전에 들어갔던 평민이잖아요.”
“영애의 능력에 업혔을 뿐인 녀석이 왜 이 곳에 있는 거죠?”
여러 영애들의 수근 대는 목소리 속에서도 꿋꿋이 발을 움직인 토비는 결국 애버리의 앞에 도달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토비?”
“럼리 영애.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던전과 관련된 일인가요? 그거라면 이미 뜻을 전달해드렸을 텐데요?”
그랬다. 애버리는 이미 이 이상 던전을 공략할 생각이 없다고 토비에게 선언을 해두었다.
힘들어서 못 해먹겠다는 도저히 영애답지 않은 말과 함께.
“며칠이 지난 것도 아닌데 벌써 잊으셨나요?”
“아뇨. 잊지 않았습니다.”
“그럼 아시겠네요. 제가 드릴 답변도 같다는 것을.”
역시 이렇게 되는가. 애버리가 몸서리치던 광경을 기억하고 있던 토비는 그녀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거절을 승낙으로 바꿀 방법도 당연히 준비를 해두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전 다시 그 분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 분이요?”
“예. 아시잖습니까.”
용병단에서 구르다 특기자로써 입학한 토비는 귀족과의 연이 없다시피하다.
그의 아버지까지 넘어간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어쨌건 토비 개인이 알고 지내는 귀족이 없단 건 분명한 사실.
그런 그가 도움을 청하겠다는 말을 당당히 내뱉는다면 그것은 당연히 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루시 알른.
변경백 가문의 장녀이자 소울 아카데미 1학년 수석.
소울 아카데미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존재이자 왠지 모르게 애버리가 기를 쓰지 못하는 상대.
“하아. 알겠어요. 잠시 이야기를 나누죠.”
토비의 말뜻을 눈치 챈 애버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정작 테이블 아래에 감춰진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영애들이 토비에게 날 선 시선을 보내며 떠나간 후.
애버리와 단 둘이 남겨진 토비가 방학 때 자신의 아버지에게 죽도록 얻어 맞으리라 확신하게 되었을 무렵.
백작영애다운 침착함을 내다 버린 애버리가 턱을 괸 채 짜게 식은 눈으로 토비를 바라봤다.
“던전에 함께 들어가달라 부탁하러 온 거죠?”
“예. 그렇습니다. 꼭 확인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참 호기심도 많으시네요.”
빈정거리는 말을 한 애버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서 뒤에 말을 덧붙였다.
“당신께는 감사하고 있어요. 비록 알른 영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된 사이이지만 당신 덕분에 던전의 높은 곳에 도달하게 된 건 사실이니까.”
토비가 아니었더라면 애버리의 파티는 선두 경쟁은커녕 0층에 도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규중의 영애로 살아온 탓에 실전 경험이 부족한 그녀들이 어찌 높은 곳에 도달하겠는가.
애버리는 분명 그 부분에 대해서는 순수한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그치만 말이죠. 그게 저희의 한계에요. 3왕자님의 파티 같은 무력이 없는 저희로써는 그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요.”
규중의 영애라 한들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칭찬. 선망 어린 시선들. 여러 대단한 분들과 경쟁한다는 영광.
그 속에서 애버리는 후일 사교계에서 들을 여러 이야기들을 생각하란 말로 다른 영애들을 설득하며 던전 공략에 몰두했다.
죽어라 고생하느라고 다른 시험 몇 개를 망쳐버렸을 정도로.
허나 그 노력에도 한계는 있었다.
던전에 대해 잘 아는 토비라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들이 지닌 능력이 다른 선두에 비해 부족하단 사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다른 이들이 앞서 나가는 동안 벽에 부딪힌 채 제자리를 맴돌아야 했던 애버리 일행은 결국 던전을 공략하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저희가 다시 던전에 들어간다 한들 바뀌는 건 없어요.”
토비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있기에. 그리고 토비의 뒤에 루시가 있기에.
좋은 말로 설득해 그를 보내려 했던 애버리였지만 토비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도 단호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뇨. 바뀝니다. 제가 생각한 게 맞다면 그 던전을 공략하는 데에 무력은 필요치 않으니까.”
“네?”
“이제부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던전에 들어갈지 말지 판단을 해주시죠.”
처음에는 무슨 헛소리를 하나 보자 생각하던 애버리였지만 토비의 말이 길어질수록 애버리의 눈에 점차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그 끝에 토비가 모든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애버리는 지금 당장 던전에 들어가자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카데미 기말고사 마지막 날의 아침.
애버리의 파티는 1학년 중에서는 두 번째로.
전체 학년 중에서는 세실의 파티를 이어 세 번째로 던전을 공략하는 데에 성공했다.
*
아서 일행이 던전 바깥으로 나온 것을 본 나는 바로 그들을 만나러 갔다.
원래 벌이라는 건 받기 전이 제일 무서운 거고 정작 받고 나면 별 것 아닌 거잖아?
한시 빨리 그걸 처리하고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싶었던 나였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일은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에 대해선 기말학 시험이 끝나고 말을 해주마.’
‘여유로울 때 하는 게 좋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영애님.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난 지금 해도 괜찮은데. 눈치 챙기라고? 으응. 알겠어. 조용히 할게.’
그렇게 나는 기말학 시험이 끝나고 찾아올 처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부디 기말학 시험이 끝날 때까지 쟤네들이 바라는 게 바뀌지 않아야 할 텐데.
혹여 네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 괴악한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하는 불안함과 함께 하루가 흘러간 후.
아카데미 기말 시험이 끝나는 정오 12시가 되었을 무렵. 나는 던전학 교수와 함께 시험이 치러지는 장소를 찾았다.
방금 전 시험이 끝난 탓일까. 시험이 치러지던 곳은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공략법을 알 것 같다고. 조금만 더 기회를 달라며 조교에게 매달리는 이들.
자신은 낙제가 확정 되었다며 울상을 짓는 이들.
이대로는 나한테 어떤 소리를 들어도 반박할 수 없게 된다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이들.
아쉬운 듯 가만 던전 입구를 바라보는 이들.
이외에도 수많은 아카데미 학생들이 저마다의 감정을 표하며 생겨난 소란이 얼마나 컸는지.
시험장에 머무르던 이들은 내가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것 참. 난장판이네요.”
쓴웃음을 지은 던전학 교수는 저들을 진정시키겠다며 자신의 앞에 음량 확성 마법을 펼치려 했지만 내가 그걸 가로 막았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눈치 없는 자칭 교수.”
지금 이 순간부터 여긴 내 무대야.
던전의 기믹조차 알아내지 못한 허접들을 놀리며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내 역할을 빼앗으면 곤란하다고.
“알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죠.”
던전학 교수가 한 걸음 물러난 것을 확인한 나는 신성을 내 목에 집약시켰다.
신체 강화의 응용 중 하나. 언젠가 도발을 하는 데 써먹으려던 기술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여길 봐!♡ 허접들!♡”
지금부터 이 썩은 물이 던전을 공략하는 법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줄 테니까.
모두 감사히 경청할 준비를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