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2
아카데미 기말 시험의 마지막 날.
죽어라 고생을 한 끝에 기말시험 던전 2층까지 도달한 비시였지만 이것이 그녀의 한계였다.
2층을 넘어서기에는 비시 파티가 지닌 무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던 것이다.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를 구분하기도 전에 박살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던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한계가 여기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드리가 중간에 입을 다물지만 않았어도 뭔가 달라졌을 텐데.”
비시 파티가 초반에 선두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아드리 덕분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의 지혜는 기믹 공략 능력을 시험하는 던전에서 일종의 해답지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4층을 기점으로 아드리가 입을 다물어버리지 않았다면 비시 파티도 던전을 공략할 수 있지 않았을까?
– 언제까지고 제게 기대기만 하시면 안 되니까요.
“사령술사가 사령의 도움을 받는 게 뭐가 나빠.”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비시가 투덜거리자 아드리가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 그치만 전 마냥 비시의 사령이라 할 수 없는 존재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지금의 아드리는 견습 수준에 불과한 사령술사인 비시가 계약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비시가 아드리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아드리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기 때문.
통상적인 사령과 인간의 관계였다면 비시는 진즉에 아드리의 제물이 되었으리라.
제대로 된 사령술사가 되고자 노력하는 비시는 아드리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했지만 그를 알아듣는다 해서 아드리의 말이 야속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자신의 서운함을 감추기 위해 목소리를 드높인 비시는 짐짓 삐졌다는 티를 내면서 말을 이었다.
“아드리. 너 진짜 던전공략법 다 알아낸 거 맞아? 그냥 중간부터 몰라서 조용히 있었던 거 아냐?”
– 설마요. 전 다 알고 있었답니다. 알른 영애께서 문제를 친절하게 내주셨거든요.
“…친절? 그게?”
– 어차피 기말 시험도 끝났겠다 설명을 해드릴까요?
“그래. 해 봐. 허세인지 아닌지 보게.”
– 우선…
“여길 봐!♡ 허접들!♡”
아드리가 말을 이어나가려던 그 때.
시험장의 입구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명하고 아름다우며 간지럽고 얄미운. 현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에 알아들을 법한 그 목소리가.
루시 알른.
아카데미 던전학 시험 문제의 출제자이자 까다로운 기믹과 악질적인 힌트 탓에 던전학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 자.
“푸흐흫♡ 패배자들이 바닥을 기는 게 참 웃기네♡ 착하디 착한 내가 그렇게 쉬운 던전을 만들어 줬는데 그것도 공략 못 하다니♡ 완~전 허접해♡ 못 봐주게 생겼으면서 뇌까지 자그마하다니♡ 목 위에 그건 왜 달고 다니는 거야?♡”
웃음기 섞인 루시의 목소리가 시험장 전체로 퍼짐에 따라 점차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부정적인 감정들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자기가 공략 안 한다고 괴악한 걸 만들어 놓고는.”
“일부러 비꼬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진짜 성격 더럽네.”
“겉만 괜찮은 독극물이.”
“아. 진짜 열 받아.”
시험장에 있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를 낸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군중의 분위기.
아무리 담이 큰 사람이라 해도 약간은 겁먹은 기색을 보일 법한 공기 속에서도 루시 알른은 태연했다.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이 얼마나 허접했는지를 알려주도록 할 게♡ 나이를 먹어도 달라지는 게 없는 멍청이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착한 것 같아♡”
자그마한 떨림도 없이 말을 끝마친 루시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키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험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적이 되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
그걸 보고 있던 비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갤 갸웃거렸다.
예전의 루시 알른이라는 인간이 지독했던 것과는 별개로 지금의 루시는 일부러 시비를 걸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가끔 벌이는 미친 짓을 제외한다면 어지간한 귀족보다 합리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최근의 그녀니까.
반강제로 루시와의 인연을 유지하고 있는 비시는 지금 그녀가 왜 굳이 사람들의 분노를 끌어 오르게 하려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저럴 이유가 있나?
– 있기는 하죠.
‘…아드리. 또 내 생각 읽은 거야?!’
– 어떡해요. 귀를 막아도 들리는 걸.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면서 어깨를 으쓱이는 아드리의 모습에 비시가 한숨을 내쉰다.
‘…하아. 그래서 지금 루시 알른이 일부러 저러는 거라고?’
– 정확하게는 의도 반 진심 반 일 것 같네요. 학생들을 한심하다 여기는 감정은 진짜인 것 같으니까.
그렇게 티나게 단서를 줬는데도 못 알아채면 짜증날 것 같긴 하단 아드리의 말에 비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야! 그 말은 내가 던전 공략 하는 거 보면서 짜증났단 소리잖아!’
– 말실수를 했네요.
‘실수는 무슨! 일부러잖아!’
나중에 양 뺨을 꼬집어 주겠다면서 비시가 화를 내던 중 시험장에 있던 한 학생이 루시의 앞에 나섰다.
얼마 전 루시 알른에게 던전에 관해 따졌던 남자.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자기보다 머리 몇 개는 작을 여자아이한테 얻어터진 이.
“다시 뵙습니다. 알른 영애. 전 커먼 가문의 이남 발…”
“허접의 이름이 뭔지 전~혀 안 궁금하거든? 내 귀중한 시간 빼앗지 말고 빨리 이야기를 해줄래?”
“…단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영애는 던전을 직접 제작한 사람이니만큼 그 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고 있겠죠. 동시에 보통의 1학년과 비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영애가 교수와 함께 동행하기까지 하니 산책하듯 던전을 돌아다닐 수 있을 테고요. 그런 손쉬운 일을 하면서 타인을 비아냥거리는 것은 귀족으로써 어떤가 싶습니다.”
커먼 백작 가문의 이남이 분노를 억누르며 꺼낸 말은 며칠 전 쓰레기 같은 짓을 했던 것과는 별개로 분명 정론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준비할 수도 없는 무력을 가지고 던전을 공략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의 말을 들은 시험장의 몇몇 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푸흫♡ 푸핳♡ 푸하하하핳♡”
웃음을 참는데 실패한 루시가 박수를 치며 키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자신의 앞에서 광대가 농담이라도 했다는 냥 끝없이 이어지는 웃음소리에 남자의 목에 힘줄이 새겨진다.
며칠 전 참교육 당한 것이 아니었다면 커먼가 이남의 주먹이 날아들었을 상황이고.
루시의 존재를 고깝게 보던 이들이 튀어나가려는 것을 그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가로 막고 있는 도중이었지만.
루시는 그러거나 말거나 폐에 들어차 있던 숨이 사라질 때까지 웃음을 흘리고서야 입을 열었다.
“사람 말을 끝까지 듣는 게 예의라는 건 안 배웠나봐?♡ 허접 조루?♡”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말했잖아?♡ 너희들이 얼마나 허접허접개허접인지 알려줄 거라니까?♡”
“그러니까 그게.”
“난 이제부터 3학년 바보멍청이들을 위해 만든 던전을 혼자서 공략할 거야♡ 그래야 너희 허~접들의 뇌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지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3학년 던전을 혼자서 공략하겠다는 루시의 선언에 시험장 안이 잠시나마 침묵으로 물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카데미 졸업을 앞두고 있는 3학년들조차 버거워 했던 것을.
무력이라는 분야에 있어 경이로운 재능을 지닌 쿠르텐 공자조차도 답이 안 나온다 이야기했던 그 던전을.
아카데미 1학년에 불과한 루시 알른이 혼자서 공략을 하겠다니.
아무리 그녀가 뛰어난 무력을 지녔다고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상식과 어긋나는 이야기라 판단을 내린 대부분의 학생들은 루시 알른이 허세를 피운다고 여겼다.
말싸움에서 지기 싫어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이라고 말이다.
허나 학생들의 이러한 생각은 루시의 옆을 지키던 던전학 교수 제슬이 고개를 끄덕임에 따라 논파되고 말았다.
“영애의 말씀은 모두 사실입니다. 영애께선 3학년 던전에 홀로 들어가서 이번 기말 던전을 공략하는 데 무력이 필요 없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이번 던전의 공략법을 알려주실 예정입니다.”
“들었지?♡ 이제부터 너희들이 멍청하고 허접해서 던전을 공략하지 못했을 뿐 내가 만든 던전은 완벽하다는 걸 알려줄 거야♡”
제슬의 말을 등에 업은 루시 알른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살피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비켜♡ 허접 조루♡”
“…부디 그 말씀이 지켜지기를 바라겠습니다.”
커먼가의 이남이 옆으로 비켜섬에 따라 자연스레 길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한 차례의 막힘도 없이 3학년 던전 앞에 도착한 루시 알른은 별 다른 준비도 하지 않고 바로 던전 안으로 발을 디뎠다.
갑옷도. 방패도. 무기도. 그 어떤 것도 없이 오롯이 교복 차림만을 하고서 말이다.
퍼…포먼스겠지? 나중에 아공간 주머니에서 방패랑 무기 정도는 꺼내겠지?
그를 본 비시가 속으로 이런 말을 중얼거린 순간. 그럴 것을 예측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에선가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던전 들어가서 무기 꺼낼 거라고 생각한 허접 있어?♡ 있다면 칭찬해줄게♡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밖에 못하는 것도 재능일 걸?♡’
– 푸훗. 칭찬해준다는데요?
아드리에게 시끄럽다며 성질을 낸 비시는 입술을 곱씹으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시험장에 있는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내가 한 말을 벌써 잊어버린 금붕어는 없지?♡ 말했잖아♡ 이 던전을 공략하는 데 무력은 필요 없다고♡’
복도를 걸으며 목소리를 내던 영상 속 루시는 키득거리는 소리를 내다 말고 탄성을 질렀다.
‘아!♡ 맞다!♡ 이게 미리 녹화된 거라 생각하는 멍청이가 있을 수도 있겠네♡ 으음~♡ 어떡하면 좋으려나♡ 방금 전에 나한테 시비를 걸었던 허접 조루가 얼마나 사람같지 않게 생겼는지 이야기하면 되려나?♡’
눈이 징그럽다느니. 얼굴이 크다느니. 목소리가 역겹다느니.
숨 쉬듯 새어나오는 비난의 연속에 커먼가 이남의 얼굴이 벌게지다 못해 점차 악귀 같은 형상으로 변한다.
그걸 눈에 새긴 이들은 이게 녹화된 영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남의 표정변화는 결코 연기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벌써 복도가 끝나버렸네♡ 아직 까내릴 구석이 많이 남았는데♡ 너무 아쉽다~♡’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허접 조루가 얼마나 예술적으로 못 생겼는지 이야기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루시가 요람 속의 쪽지를 든 순간 주변의 풍경이 뒤바뀐다.
첫 번째 방. 단순 무력으로 쓰러트리는 게 거의 불가능하고. 정해진 부위를 공격해야만 하는 병사와 기사들이 있는 장소.
‘첫 번째 방을 공략 못한 허접 쓰레기가 있을 리 없으니 여기는 대충 넘어갈게♡ 혹시 그런 머저리가 있다면 내가 써 둔 힌트를 잘 읽어보도록 해♡ 알겠지?♡ 그래도 공략을 못 하겠다 싶은 밑바닥머저리가 있다면. 으음~♡’
“힌트고 나발이고 그냥 기사가 너무 강하단 말야! 이 빌어먹을!…”
루시의 말을 듣다 분에 못 이긴 듯 누군가 고함을 내질렀지만 그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첫 번째 방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낙제생의 표시였으니까.
여기저기서 흘러 나오는 피식거리는 소리에 고함을 지르던 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그마한 소란이 끝을 맞이했을 무렵 교복 차림의 루시는 이미 첫 번째 병사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어이. 최소한 무기 정도는.’
‘왜?♡ 맨몸의 여자아이한테 처발릴까봐 무서워?♡ 푸하핳♡ 무섭긴 하겠다♡ 그럼 아무런 핑계도 댈 수 없을♡…’
루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이 돌아간 병사가 손에 힘을 더한 순간.
비시는 병사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의 동체시력으로 따라잡기엔 병사의 몸놀림이 너무도 빨랐으니.
비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창이 내질러진 결과를 보는 것 뿐이었다.
‘풉♡ 성질은 급한데 창은 느릿느릿하네~♡’
허공을 꿰뚫은 창과 어느새 병사의 품 안으로 파고든 루시 알른이라는 결과 말이다.
텅 비어 있는 병사의 복부를 툭하고 건드린 루시는 통통 튀는 듯한 걸음으로 다음 병사에게 향하면서 목소리를 냈다.
‘이렇게 하면 돼♡ 어때?♡ 설마 이런 자그마한 여자애도 하는 걸 못 하겠다 그러는 머저리는 없겠지?♡’
“…저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 이야기를 들은 군중의 누군가가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냈지만 거기에 반박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