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처럼 부스럭거리는 밭 위.
분홍 소녀는 굉장히 긴장한 것 같은 표정을 한 채,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도망갈 곳이 없어….”
시간이 흐르고 점점 하늘이 어두워짐에 따라, 하늘 장막에 가려서 드리우는 그림자의 영역이 점점 분홍 소녀와 푸른 사신이 있는 곳으로 뻗쳐오기 시작했다.
전후좌우 어디를 살펴봐도, 그림자에 닿지 않고 도망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 속에서 녹은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괴물은 천천히, 천천히.
그림자의 영역을 따라서 다가왔다.
그림자 속의 괴물들은 너무 많이 뜯겨 얼마 남지도 않은 애착 인간의 그림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처럼.
몇몇 괴물들은 분홍 소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고, 몇몇 괴물들은 바닥을 발톱으로 마구 내려치기도 했다.
쾅. 쾅.
푸른 사신은 해로운 진화액으로 가득 찬 바다 한가운데에서 조그마한 배 한 척을 타고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몇몇 괴물들은 어둠이 넓어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림자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희미한 빛의 영역에 닿은 괴물의 신체는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푸른 사신은 그것을 보고, 허공 위에 문자열을 수놓기 시작했다.
<빛으로 그림자를 물리쳐 주세요!>
그 문자열이 물안개처럼 흩어지는 것과 동시에, 푸른 사신의 머리통만 한 빛의 구체 수십 개가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푸른 사신과 엄마 골렘을 지키려는 것처럼, 둥글게 모여 둥실둥실.
그렇게 늘어선 구체는 그 자리에서 강렬한 빛을 뿜어내서, 마치 섬광탄처럼 주변의 모든 그림자를 말끔히 지워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괴물들도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대단해!”
흥분해서 크게 소리친 분홍 소녀는 푸른 사신을 들어 올리더니, 푸른 사신을 자기 뺨에 대고 마구 문질렀다.
“저 괴물들은 빛을 쬐면 물리칠 수 있었네. 이제까지 계속 만났었는데, 전혀 몰랐어.”
“연금술로 만든 미약한 불빛으로는 그림자를 몰아낼 수가 없더라고.”
분홍 소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뭔가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자기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저번에 가방을 확인했을 때는 횃불이 잔뜩 있었는데, 역시 하나도 없네.”
“무겁다고 다 버리지 말고, 하나 정도는 남겨둘 걸 그랬어.”
그렇게 가방을 뒤지던 소녀는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횃불을 많이 들고 있었던 걸까?”
“횃불은 먹을 수도 없는데, 이상하네.”
분홍 소녀는 가방의 입구를 닫으며 멋쩍게 웃었다.
푸른 사신은 그 멋쩍은 웃음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거의 남지 않았던 애착 인간의 그림자가, 푸른 사신의 뇌리에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
쿵. 쿵. 쿵.
엄마 골렘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느새 메마른 밭으로 가득했던 영역은 끝났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영역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 엄마 골렘 위에서 분홍 소녀와 푸른 사신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진짜 맛있다니까. 한 입만 먹어봐. 손톱만큼만 먹어봐도 돼!”
<거짓말!>
사탕을 먹이려는 분홍 소녀.
그리고 도망 다니는 푸른 사신.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술래잡기는 결국 분홍 소녀의 승리로 끝났다.
푸른 사신은 애착 인간을 너무 좋아해서, 부탁을 계속 거절하기는 힘들었으니까.
분홍 소녀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사탕을 작게 쪼갰다.
“자, 아~ 해봐.”
푸른 사신이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작게 벌리자, 분홍 소녀는 그 안으로 사탕 조각을 밀어 넣었다.
하웁.
푸른 사신이 작은 입으로 사탕을 입에 담자마자, 표정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어때 맛있지?”
‘속였어!’
다른 미니 사신들이 다들 먹을 때도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던, 엄청 신맛 사탕이었다.
푸른 사신은 눈 끝에 방울방울 눈물까지 매달고,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분홍 소녀를 올려다보다가, 털썩 쓰러져 버렸다.
“어?”
분홍 소녀가 깜짝 놀라서 푸른 사신을 들어 올렸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푸른 사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퐁. 퐁. 퐁.
푸른 사신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꽤 시간이 흘렀지만, 푸른 사신은 여전히 물망치를 들고 분홍 소녀의 머리를 내려치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하다니까.”
그렇게 분홍 소녀는 사과하고 푸른 사신은 망치를 내려치는 동안에도, 엄마 골렘은 계속 걸어 나가서 대지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했어!”
분홍 소녀가 들뜬 것 같은 목소리를 흘리자, 푸른 사신도 망치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분홍 소녀는 푸른 사신을 어깨 위에 얹고 원판의 끝을 향해 걸었다.
원판의 끝으로 다가갈수록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해졌고 진화액의 냄새도 점점 진하게 풍겼다.
판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서 밑을 내려다보자, 마치 선풍기에 얼굴을 들이민 것처럼 소녀의 머리카락이 마구 나부꼈다.
푸른 사신이 애착 인간과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곳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물질을 끊임없이 집어삼키고 있는 진화액이 보였다.
진화액의 수위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그 높이가 높아지고 있었다.
“내가 살았던 층은 이미 잠겨버렸네.”
분홍 소녀는 살짝 쓸쓸한 표정이었다.
소녀가 할아버지랑 같이 지냈던, 추억의 장소는 이미 없어져 버렸다.
푸른 사신은 그 표정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애착 인간의 뺨을 토닥여 주었다.
“뭐, 괜찮아. 계속 위로 올라가는 일도. 지나왔던 층이 진화액에 잠겨버리는 것도 익숙한 일이니까.”
분홍 소녀는 표정을 지우고는 고개를 돌려, 원판 끝에 솟아있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원판 형태의 계층 끝, 다음 원판으로 올라갈 수 있는 거대한 탑.
탑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금속과 파이프들로 마구 얽혀있는 판의 밑부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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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다음 층으로 올라가자. 태양을 향해서!”
그렇게 분홍 소녀는 힘찬 표정으로 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세희 연구소 깊숙한 곳, 회색 사신 격리실.
나는 커다란 격리실 침대 위에 푹 잠겨서, 낮잠을 즐기는 중이었다.
요즘 자주 돌아다녀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만끽하며 기분 좋게 잠들어 있었다.
때찌때찌.
그렇게 푹 잠든 나를 누군가가 깨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볼을 살짝 때리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자, 눈꺼풀 위를 ‘때찌’ 하고 있었다.
때찌의 강도와 빈도를 보니, 황금 사신 하나가 나를 깨우고 있는 것 같네.
비상 경고 태세로 치면, 황금 사신 하나.
별로 위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갑자기 같이 푸딩이 먹고 싶어졌거나, 엄마랑 놀고 싶은 미니 사신이 생긴 정도의 위급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억지로 의식을 가라앉혀서, 꿀맛 같은 잠기운을 다시 불러들였다.
히히.
‘오브젝트라도 잠들 수 있어서 행복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깜박 잠들고 깨자, 때찌때찌의 강도가 높아져 있었다.
때찌때찌때찌때찌때찌때찌때찌.
도대체 잠깐 사이에 황금 사신들이 얼마나 불어났는지, 그 숫자를 세기 힘들 정도였다.
비상 경고 태세로 치면, 황금 사신 다섯 이상!
미니 사신이 납치된 상황 혹은 세희나 예린, 서아 같은 연구소 인원이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엄마, 큰일이야!’
내가 눈을 뜨자, 황금 사신들이 내 얼굴 근처로 몰려와서 의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약한 동생이 사라졌어!’
‘푸른 동생 실종!’
‘빨리 구해야 해!’
‘금방 죽어버려!’
그런 나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톡 치면 팔다리가 부러지는 푸른 사신의 실종 소식이었다.
정말 큰 일이네.
황금 사신들은 그렇게 난리를 피우면서 나에게 푸른색 조각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 물 조각에는 <푸른 사신 실종!>이라고 적혀있었다.
그것은 마치 미아를 찾는 것 같은 전단지였다.
그 물 조각 안에는 푸른 사신의 전신 모습과 사라진 예상 시각이 적혀있었다.
다만 나는 푸른 사신의 모습을 봐도 전부 똑같아 보여서,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실종 예상 시각은 일곱 달의 모습이 배를 내민 아귀 모양일 때라고 적혀있었다.
도대체 언제라는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서울숲 인근으로 빨리 가봐야겠어.
나는 서둘러서 침대에서 일어나, 서울숲 근처로 순간 이동했다.
***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이 솟아오른 탑.
그 끝에는 거대한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내서 끝없이 거미집을 짓고 있었다.
끼이익. 끼이익.
다만 그 거미가 뿜어내는 거미줄은 강철로 만들어진 파이프였다.
철컹. 철컹.
그리고 그 거미가 만드는 거미집은 하늘에 닿을 것처럼 쌓아 올린 탑이었다.
그렇게 탑을 만들던 거미는 갑자기 내리쬐는 태양 빛에 집짓기를 멈추고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의 시선은 이 땅에 닿지 않는다.>
<태양은 어둠 속에 잠긴다.>
태양을 삼킨 거미가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하늘을 향해 말을 자아내자, 태양은 다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끼이익. 끼이익. 끼이익.
다시 강철로 만든 거미집을 짓는 거대한 거미의 머리 위에는 하얀 헤일로 하나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