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판 계층 사이를 잇는 탑.
분홍 소녀와 푸른 사신은 그 탑 안으로 들어와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뚜벅뚜벅.
[뚜벅뚜벅.]
분홍 소녀의 걸음 소리가 탑 내부에 메아리쳤다.
탑의 내부는 엄마 골렘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좁아서, 푸른 사신은 얌전히 애착 인간의 어깨 위에 자리 잡았다.
탑 내부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파이프가 불규칙하게 마구잡이 뒤섞여 있어서, 제대로 된 길처럼 보이는 통로는 없었다.
하지만 분홍 소녀는 이런 미로처럼 얽혀있는 파이프 위를 자유자재로 타고 넘나들며, 능숙하게 위를 향했다.
외줄을 타는 것처럼 얇은 파이프를 건너거나.
철봉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훌쩍 뛰어서 반대편 철봉에 달라붙거나.
봉 하나만을 의지해서 나무를 타듯이 천천히 타고 오르거나.
<!!!>
푸른 사신은 그런 애착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짝짝 박수를 쳤다.
후우.
분홍 소녀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있었어. 이 탑의 내부도 원래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었대.”
<?>
“나선 형태로 빙글빙글 계단? 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 같아.”
<!>
푸른 사신은 그 말을 듣고 이제까지 올라온 탑 내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인간이 올라오라고 만들어 둔 구조물이 아니었다.
아주아주 좋게 봐줘도 죽음을 각오한 용감한 자만이 타고 오를 수 있는 정글짐처럼 보였다.
인간이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탑도 어느새 그 끝을 보였다.
조금 지친 것처럼 보이던 분홍 소녀는 탑의 출구에서 나오는 하얀 빛을 보고, 기운을 되찾고 더욱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착!”
그리고 어두운 탑 내부에서 하얀빛이 내려오는 밖으로 나오자, 저번 계층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탑의 하늘을 언제나 얼기설기 막고 있는 하늘 장막은 저번 계층에서 봤던 것보다 상당히 헐거워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안개가 낀 것처럼 그저 뿌옇고 하얀 하늘이 훨씬 잘 보였다.
게다가 하늘 장막의 구멍으로 내려오는 빛의 양도 많아서 굉장히 밝았다.
“밝아!”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와서 그런지 분홍 소녀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손으로 눈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푸른 사신은 뭔가가 가리고 있어서, 푸르지 않고 뿌연 하늘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계층은 푸른 사신도 좋아할 만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인간의 무릎을 조금 넘는 정도로 차올라서, 찰랑거리는 맑은 물이 계층 전체에 넘실거렸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하얀 빛이 맑은 물 표면에서 일렁거렸다.
그리고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반사하는 새하얀 건물들이 차오른 맑은 물과 어우러져서 기묘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얀 하늘을 비추는 맑은 물과 백색 건물들!
맑은 하늘의 구름을 비추는 소금 사막이 이런 느낌일까?
<…, 물이 가득해요.>
푸른 사신은 물 표면을 내려다보며 거기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분홍 소녀는 벌써 옷을 전부 집어 던지고, 물속에 들어가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빨리 와. 같이 놀자.”
히히, 개구쟁이처럼 웃는 애착 인간을 바라보며, 푸른 사신은 천천히 그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높이 떠올라서 하얀 도시를 내려다보자, 조금 이상한 것들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도시에 이물질처럼 섞인 검은색.
‘?’
그 검은색은 지면에 뿌리내린 다리와 길쭉한 두 팔을 가진 어떤 존재를 묘사한 석상이었다.
‘검은 사신? 강한 엄마?’
푸른 사신은 도시 곳곳에 세워진 기묘한 석상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서울 북쪽에 넓게 펼쳐진 서울숲.
내가 순간 이동으로 그곳에 도착하자, 서울숲 근처를 뚜방뚜방 돌아다니고 있던 황금 사신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엄마!’
‘큰일이야!’
몰려드는 황금 사신의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서울숲은 거의 미니 사신 정원 수준으로 황금 사신 밀도가 높아져 있었다.
노란 사신 실종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푸른 사신이 실종된 곳으로 보이는 서울숲 외곽에 도착해서, 다시 감각을 사방으로 뻗기 시작했다.
미니 사신 네트워크를 타고, 지구 전역에 흩어져 있는 미니 사신들의 위치가 느껴졌다.
하지만 느껴지는 푸른 사신의 숫자는 아홉밖에 없었다.
하나가 줄었어.
아홉밖에 안 남은 푸른 사신들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편대 비행하며, 서울숲 근처를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푸른 사신의 위치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미니 사신 정원’ 같은 별도의 공간에 빨려 들어간 거겠지.
가장 가능성이 높은 범인은 서울숲의 공간을 엉망으로 만든 오브젝트.
하지만 서울숲의 공간은 이미 뒤죽박죽 뒤엉켜 버려서, 오브젝트가 만들어 낸 공간을 탐지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게다가 아귀를 잡고 얻은 ‘본체를 찾는 능력’으로도, 서울숲의 공간 왜곡을 일으킨 오브젝트의 위치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이 공간 엉킴이 오브젝트 현상이 아니라, 자연 현상인 것처럼.
서울숲 근처를 뚜방뚜방 돌아다니며 살펴보고 있었는데, 주황 왕관 사신이 황금 사신과 함께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푸른 사신 실종’은 애착 인간이랑 지내던 아이들이 돌아올 정도로 심각한 일이긴 하지.
그때 주황 왕관 사신이 황금 사신에게 뭔가를 발견했다며,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푸른 사신의 잘린 머리를 발견했어.’
‘앙대!!!!!!’
내가 다가가서 확인해 보자, 그것은 물을 정교하게 뭉쳐서 만들어진 푸른 사신의 머리통이었다.
아마 물이 흩어지는 것을 ‘확률 지배’로 붙잡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앗!’
그리고 그 주황 사신이 나랑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도망치려고 했다.
푸른 사신 수색을 돕기는커녕, 방해하는 주황 왕관 사신을 손아귀에 꽉 붙잡아서 딱밤을 날렸다.
그리고 물 덩어리에 걸려있던 확률 지배를 풀어헤치자, 황금 사신이 들고 있던 머리통이 평범한 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자 황금 사신도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몹시 화난 표정으로 주황 왕관 사신의 통통한 볼을 꽉 깨물었다.
‘으앙!’
주황 사신은 꽤 아픈지 애처로운 의지를 흘렸다.
그리고 나는 주황 왕관 사신을 손아귀에 쥔 채, 푸른 사신 예상 실종 지점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변을 돌아다니고 나자, 주황 사신의 볼에는 물린 자국이 잔뜩 생겨버렸다.
‘아파….’
황금 사신에게 나눠준 푸른 사신 머리통이 도대체 몇 개야?
나도 해보고 싶은 장난이긴 한데, 이번 푸른 사신 실종에 하기는 좀 그렇고….
황금 사신의 애착 인간 실종 때 해봐야지.
히히.
***
맑은 물과 하얀 하늘의 계층.
그곳에서 분홍 소녀가 물 위를 걷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찰박찰박.
물을 밟으면서 가는 것이 기분 좋은지, 분홍 소녀의 얼굴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분홍 소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찰박찰박 걸어 나가면, 푸른 사신은 그 흥얼거림을 음표 모양 물 덩어리로 만들어서 하늘로 쏘아 보냈다.
분홍 소녀와 푸른 사신은 그렇게 찰박찰박 걸어 나가다가, 목적지로 정한 커다란 건물 속으로 들어섰다.
계층과 계층을 잇는 탑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분홍 소녀는 밖과 달리 물기 하나 없는 바닥에 앉아서 발을 말리고,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이 계층은 정말 깨끗하고 밝고 좋은데, 되도록 빨리 다음 계층으로 가야 한다니. 조금 아쉽네.”
분홍 소녀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계층에는 식량이 전혀 없었으니까.
저번 계층에는 잔뜩 널브러져 있던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물건도 없었다.
그보다는 이 계층 전체에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기 엄청 넓네.”
분홍 소녀와 푸른 사신이 들어간 건물은 엄청난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기둥 하나 없이 부드러운 하얀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물.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니, 천장을 가득 채운 모자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와.”
분홍 소녀는 이런 것을 처음 보는지, 천장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거듭했다.
천장의 모자이크는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었다.
검은색 액체가 가득 차오른 세계.
하늘에 떠오른 7색의 달과 끝없이 하늘을 오르는 거대한 거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건물의 끝자락에는 검은색 석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강한 엄마….>
푸른 사신은 그 석상을 보고 문자열을 흘렸다.
그때 분홍 소녀가 푸른 사신을 향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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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글자가 쓰여있어!”
빛을 모두 잡아먹는 것처럼 엄청 짙은 검은색 석상 밑에 조그마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제서야 신상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젠 신이 없는 세계.>
<신상을 만들어도 의미가 없겠지.>
***
서울숲 중심부, 강철탑이 있던 공터.
한때 강철탑이 있었고 지금은 검은색 빛기둥이 자리 잡은 그 중심에서, 나는 태양이 자취를 감춘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은색 빛에 휩싸여 하늘을 올려다보니, 마치 검은색 빛기둥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빛기둥 주변에는 생소한 양식의 건물 잔해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그 잔해들에는 진화액의 냄새가 짙게 배 있었다.
‘해로운 오브젝트!’
황금 사신들은 그 잔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해로운 오브젝트 냄새가 난다며 겹치기로 박살 내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자, 내 머리 바로 위에는 불길한 빛을 흘리는 검은 별이 보였다.
‘아무래도 저 검은 별이 문제일 것 같은데….’
나는 검은 별을 향해 손을 뻗고, 공간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하늘에 거대한 지구와 닮은 구체가 반투명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그 검은 행성은 푸른 바다 대신, 검은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