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4
아서는 기말시험의 던전에 들어가면 처음으로 마주할 수 있는 복도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대체 저 던전의 안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얼마나 머리를 비우고 있었으면 저 많은 단서 속에서 그 어떤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말이냐.
주변의 시선조차 신경 쓰지 않고 얼굴을 쓸어내린 아서는 손바닥으로 시야를 가린 채 방금 전 루시가 지적했던 여러 단서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멀쩡한 천장.
바깥이 보이지 않는 창문.
흐릿한 초상화와 그 아래에 적혀 있는 말도 안 되는 연도.
고장나버린 시계.
이것 이외에도 루시가 가리킨 무수히 많은 단서는 분명 던전학 교과서 안에 똑똑히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기믹을 설명하는 내용의 끝에. 예외사항이라는 문구 아래에. 높은 난이도의 던전에 들어갔을 경우. 이 곳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법이라는 설명과 함께 몇 가지가 적혀 있었지.
던전학 교과서의 내용 전체를 암기하고 있는 아서는 그 문구를 떠올리고서 앞머리를 쥐어뜯듯이 움켜쥐었다.
던전의 보스에게 놀아나고 있었구나.
저 녀석이 기존의 방을 활용해 만들어낸 환각을 새로운 던전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야.
사실은 그런 게 아닌데. 그 길은 이미 우리가 지나왔던 길인 것뿐인데.
생각해보면 그렇구나.
우리가 0층부터 던전을 공략할 때에 마주했던 모든 것들은 과거 우리가 넘어섰던 시련의 반복일 뿐이지 않았나!
그 때의 우린 그걸 과거의 공략이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아니었다!
이미 공략했던 것을 한 번 더 공략하고 있으니 당연히 비슷하다 느낄 수밖에 없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만을 돌이키게 된 아서는 문득 어제 자신이 루시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어려운 던전이었지만 보란 듯 공략했노라고 자신 있게 말을 하던 자신을 말이다.
흐아악!
루시 알른 그 녀석은 본인이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설계해둔 것을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서 뻗대는 멍청이를 얼마나 한심하게 여겼을까.
어쩐지 공략을 끝마친 우리를 만나러 온 시선이 미묘하다 했더니!
내기에서 진 것에 대한 슬픔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 뿐이었느냐!
한탄 속에서 손을 아래로 내린 아서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다시금 루시 알른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녀석이 어떤 소리를 할지 두렵구나.
이미 본인이 여러 일을 저질러버린 탓에 알고서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게 너무도 공포스러워.
내기의 보상과 이번 일을 교환하는 것을 고려해야하는가 하고 아서가 고민을 하던 그 때에 루시 알른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디딘다.
‘이제는 너희들이 바보 멍청이란 걸 설명하는 것도 지치거든?♡ 그러니까 느긋이 감상하면서 너희들이 얼마나 폐기물 같았는지 느끼도록 해♡ 허접들♡’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린 루시 알른이 계단을 내려간 순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풍경은 훈련장이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시험을 치르고자 하는 이들의 앞에 서서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루시 알른은 느긋이 그 광경을 구경하다 돌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소년과 그를 향해 무어라 잔소리를 하고 있는 소녀에게 슬쩍 눈길을 주고는 훈련장에서 빠져나왔다.
그 다음은 동굴이었다. 거대한 늑대가 지배하던 그 공간의 끝에는 한 파티가 서 있었다.
중심에는 방금 전 탈진해 있던 소년과 닮은 남자가 서 있었는데.
그는 평범한 크기의 늑대를 공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들어선 주변 사람들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루시는 방금 전처럼 그 광경을 슬쩍 살펴보기만 하고 바로 다음으로 향했다.
그 다음에 펼쳐진 것은 평원이었다.
악마의 형상을 한 골렘들로 가득 하던 그 곳에는 단순한 골렘이 아닌 진짜 악마들의 시체와.
그 악마들에게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몇 사람의 시체.
그리고 한 가운데에 홀로 살아남은 남자가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남자는 황망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이외의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를 본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루시는 느릿하게 발을 움직여 네 번째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복도였다.
최초의 복도가 아니라, 4층을 넘으면 볼 수 있는 폐허처럼 변해버린 복도.
루시는 일부러 자신의 발소리로 복도를 가득 채우면서 그 끝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거기에 던전의 마지막을 지키던 위풍당당한 폐인은 존재치 아니했다.
닫힌 문에 기댄 채 힘없는 목소리를 내는 폐인은 아서 일행을 수도 없이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괴물이 아니라. 세월에 치여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무대 바깥의 창작자는 저토록 초라한 존재였던 것이다.
‘나름 열심히 준비한 무대였는데 그를 모두 무시해버리시다니. 참으로 슬프군요.’
폐인은 문에서 몸을 때어내곤 자신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래도 손님께서 끝까지 오셨으니. 무대의 주인으로써 응대하는 것이 도리겠죠.’
거기엔 아서 일행이 마주했던 붉은 색의 끔찍한 오러가 아닌 흐릿한 회색의 오러 만이 스며있었다.
‘오십시오.’
그 때가 되어서야 루시가 처음으로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오른 손에는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백색의 메이스를. 왼 손에는 태양의 빛을 담은 듯한 새하얀 방패를.
입을 다문 채 자신이 지닌 신성으로 방 안을 채워가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본성을 아는 이들마저도 감탄사를 내뱉게 될 정도로 성스러웠으니.
루시 알른과 폐인이 대결이 시작되는 그 순간 시험장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은 루시 알른의 승리를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
아카데미의 던전을 설계할 때 내가 공을 들였던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들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학생 개인의 능력 또한 던전 공략을 위한 요소이니 하위 학생이 공략 불가능한 던전이 만들어져도 문제없단 이야기는 들었다.
실제 게임 속 아카데미 던전도 일정 이상 레벨이 되지 않으면 공략할 수 없는 곳이 태반이었으니. 현실이 된 지금이라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겠지.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굳이 모든 사람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도록 고민했다.
내가 만든 던전이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이 모니터 너머의 세상이었을 적에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는 것은 대개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일러스트가 존재하는 몇몇 캐릭터를 제외한다면 기억할 가치도 없는 존재였지.
허나 지금은 아니다.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이들은 모두 저 마다의 인생을 살고 있는 자들이다.
내 옆에서 살아 숨쉬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나라는 사람에게 호의를 표하는가 표하지 않는가 이전에.
난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내가 만든 던전에서 배움을 얻어 바깥의 던전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던전의 제물이 아니라 던전을 자신의 제물로 만들어낼 수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물론 이것뿐만이 내가 고집을 부린 이유는 아니다.
거기에는 분명 개인적인 욕심도 있긴 했지.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던전을. 소울 아카데미의 고인물이 썩은물로 바뀌어가며 머리에 새겨두었던 수많은 발상을. 내 노력의 결정체를.
모두가 즐겨주기를 바란 것도 사실이니까.
누구라도 노력해서 끝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서 모두가 던전의 끝에서 감탄하기를 원했으니까.
이런 연유로 타협을 포기하는 바람에 진짜 던전을 설계하다가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서 나서 단 한 번도 펼쳐본 적 없던 교재를 그 날 밤에만 열 번도 넘게 뒤적여가면서.
제대로 던전학을 공부한 학생이라면 던전 안을 둘러보며 이상한 점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리고 기믹을 공략하며 자신의 지식이 이런 데 쓰일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했으니까.
근데 이런 그렇지만 나의 노력은 제대로 된 결실을 낳지 못했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공략 능력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떨어졌기에.
아니. 내가 기믹을 알아차리기 어렵도록 수를 쓴 건 사실이지만 말야.
던전의 기믹을 알아챈 사람이 아카데미 던전 전체에서 단 두 파티 뿐이라는 건 너무 하지 않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파티도 아니지!
그냥 둘 뿐이잖아!
토비랑 제프.
이 둘을 제외하면 던전의 기믹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
기믹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많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과하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쉬운 던전을 만들었을 거야.
너네들이 응애라는 걸 알았으면 그냥 한 시간 만에 던전 설계 끝마치고 침대에 누워버렸을 거라고!
<어쩐지 말 하는 거 하나하나가 독기에 가득 차 했더니. 그냥 열이 받아 있었던 것이냐?>
‘열이 안 받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저 진짜 열심히 던전 만들었단 말이에요!’
내가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그걸 알아주지는 못할망정 정말 깰 수 있게 만든 것이 맞냐는 헛소리나 들어야 하다니!
열이 안 받는 게 비정상이잖아요!
<그대가 노력했음은 알겠다만.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뭐가요!’
<그야 이렇게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던전은 흔치 않으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단순히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던전의 모든 것을 의심해가면서 공략해야 하는 던전은 그리 흔하지 않다.
정확하게는 흔할 수 없다는 표현을 써야겠지.
대지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던전은 악신 아그라의 권능에서 기원한다.
바꾸어서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의 던전이 만들어질 때마다 아그라의 권능이 소모된다는 것이니.
고위의 던전은 결코 많을 수 없다.
높은 난이도의 던전을 만들기 위해선 아그라도 그만큼이나 많은 권능을 사용해야 하니까.
‘이런 던전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그냥 죽을 수밖에 없잖아요.’
여기는 게임이 아니다.
이번에 실패했으니 다음에 다시 도전하자는 말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모르면 뒤져야 한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누군가의 유언이 되는 세상이란 말이다.
이런 위험을 다른 학생들이라고 모르지 않을 터인데 아무도 고위 던전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것도 던전 공략이 귀족의 의무라 지껄이는 것들이!
<하하. 그래. 이번에 그대가 힘을 써 준 덕분에 아카데미의 학생들 또한 이런 던전이 있음을 알고, 이런 던전이 나왔을 때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를 알게 되겠구나. 고생했다.>
‘이제와서 태도를 바꾸셔도 보복이 두려운 걸로 밖에 안 보이거든요.’
<본인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곡해하다니. 이 할애비는 슬프다.>
할배의 너스레를 들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모든 전투가 끝난 방 안을 둘러봤다.
그리고는 던전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문에 발을 디디는 대신 그 옆에 설치된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여아야. 무얼 하려 그러는가?>
‘화풀이요.’
지금까지 내가 보여줬던 건 던전을 제대로 공략하는 방법이다.
더 빠른 길이 있고, 더 쉬운 길이 있으며, 던전의 제작 과정에서 만들어진 여러 꼼수가 있음에도 무시하고 정석만을 택했지.
평소 하던 대로 공략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응애들을 위한 영상을 만들어줬으니까. 이젠 나도 즐겨야하지 않겠어?!
<잠. 여아야! 그대가 여느 때처럼 던전을 공략하는 걸 다른 이들에게 보여줬다간 그들에게 안 좋은!…>
‘제 알 바에요? 아카데미의 멍청이들은 자기가 얼마나 허접한 지 알 필요가 있다고요.’
고인물이 늅늅이에게 해주는 강의는 폐강이야.
지금부터 새로이 개설되는 강의는 썩은물의 스피드런 강의.
어떻게 하는 지 모두 다 보여 줄 테니까.
어디 따라할 수 있으면 따라해 보시지.
이 허접 쓰레기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