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5
루시가 던전을 공략하는 것을 지켜보던 비시는 아드리가 왜 저 던전이 쉽다 그랬는지. 그리고 왜 루시가 친절하다 이야기 했는지 이해했다.
던전을 공략할 때는 보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이 루시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 그쵸? 제 말이 맞죠?
아드리는 루시가 자신의 말을 증명해준 것이 기뻤는지 비시의 옆에서 재잘재잘 목소리를 냈다.
평소라면 적당히 하라며 한 소리를 했을 비시지만 이번에 그녀는 아드리를 가만 내버려 두었다.
답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헛발질만 하는 사람을 보면 나라도 답답하다 생각했을 거야.
하아.
난 왜 저걸 눈치 채지 못했을까.
눈앞에 멀쩡히 있는데 보지 못했을까.
시험의 답지를 보고서 아는 문제였는데! 라고 외치던 때의 심정을 재차 느낀 비시는 가뿐히 던전의 보스를 박살내버린 채 마지막 문 앞에 선 루시를 보곤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시험장에는 비시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던전의 최초공략자인 아서 솔라딘은 자신의 엄지 손톱을 씹으면서 스스로의 멍청함을 한탄하고 있었고.
3학년의 선두였으나 마지막 보스를 넘지 못해 좌절했던 쿠르텐 공자 파티는 자신들의 모자람을 재차 자각하고 있었으며.
루시 알른에게 문제를 제기했던 남자는 스스로의 멍청함을 소리 높였을 뿐임을 깨닫고 처음과는 다른 의미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다가.
이외에도 최선을 다해 던전을 공략하려 했던 이들 대부분이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입을 다물어 버렸으니.
루시 알른이 보란 듯 던전을 공략해보인 그 순간 시험장 안은 자그마한 숨소리조차 시끄럽게 들릴 정도로 고요해져 있었다.
그 때였다.
보스를 쓰러트리고 숨을 돌리던 루시 알른이 발을 움직인 것은.
그녀가 던전 바깥으로 나오리라 생각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녀가 바깥으로 나와 자신들을 매도하리라 확신했다.
이제 스스로의 허접함을 이해하겠느냐면서 나이에 비해 다소 과할 정도로 작은 키로 시험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 볼 것이라고 말이다.
허나 루시는 던전 바깥으로 발을 내딛지 않았다.
그녀는 바깥으로 나오는 대신 수정구에 손을 올리더니 다시금 처음의 장소로 돌아왔다.
최초의 복도.
영상을 보던 이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던 장소가 아니라 던전에 진입했을 때처럼 벽으로 가로 막혀 있는 곳에 말이다.
“…알른 영애? 대체 뭘.”
시작 지점으로 돌아간 루시의 모습에 던전학 교수 제슬이 당혹을 드러냈다.
이것은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루시와 제슬이 나눈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제대로 던전을 공략하는 걸 보여주겠다는 것 뿐.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겠단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영애. 갑자기 뭘 하시려는 거죠? 도대체 뭘.
‘자칭 교수 나부랭이. 밖에 있지?’
제슬이 눈을 끔뻑이며 루시의 의도를 추측하려던 그 때에.
영상 속의 루시가.
던전의 공략을 보여줄 때와는 달리 만전의 준비를 갖춘 루시가 열기가 담긴 목소리를 낸다.
‘내가 발을 움직일 때부터 시간을 재도록 해. 아무리 바보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그치?’
시간을 재라는 건.
설마.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제슬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루시 알른이라는 인간에 의해 처참히 붕괴되었던 아카데미 2학기 던전의 모습이었다.
최초 공략자가 나올 때까지 최소 한 달에서 두 달 정도는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그 던전은 루시에 의해 하루 만에 박살이 났고.
그 던전을 설계했던 제슬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루시 알른이 비정상적인 것이고 던전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해내야만 했었다.
알른 영애. 당신은 다른 던전을 박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이 만들어 낸 성마저도 스스로 무너트릴 생각이십니까.
어차피 무너질 성이라면 자기 스스로 화려한 결말을 맞이하게 만들겠단 겁니까.
“교수님. 어떻게 할까요.”
당혹에서 빠져나온 제슬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갈 무렵 계획에 없던 사태에 놀란 조교 중 한 사람이 제슬에게 말을 걸었다.
“어떡하긴. 계속 영상을 틀어야지.”
“…어. 그러면 될까요?”
“그래. 혹시 마력이 부족해?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게.”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알른 영애께서의 펼친 공략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빨라서 마력의 여분이 남아버렸거든요.”
“흠. 하긴. 그렇긴 하겠다.”
아무리 던전의 기믹을 다 알고 있는 상태라지만 최소 두 시간 정도는 걸릴 거라는 게 우리 생각이었는데 영애께선 한 시간만에 시연을 끝마치셨으니까.
여유를 가지고 마력석을 준비했단 걸 생각해보면 아직 두 시간 정도는 거뜬하겠네.
“그럼 돌아가볼게요.”
“그래. 고생해.”
…아니.
잠시만.
알른 영애께선 학생들에게 공략법을 알려주면서도 한 시간 만에 던전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어.
그렇다면 영애께서 진심을 다해 던전을 공략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루시가 아카데미 던전을 공략할 때 보여줬던 여러 기행을 떠올린 제슬은 얼굴을 창백히 물들였지만 그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영상 속 루시는 이미 발을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아카데미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육신만큼은 기사의 수준에 달한 루시가 전력을 다해 내달리자 순식간에 복도의 끝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벽을 보고서 부딪힐 것이 두려워 가속을 늦출 상황.
허나 루시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벽을 보고서도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한층 더 가속을 하더니 요람 안의 쪽지를 가로채듯 손에 넣음과 동시에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복도를 내달리는 동안 얻은 가속도를 그대로 지닌 채 벽을 짓밟은 루시는 주변의 광경이 바뀌는 것을 보고는 마법진에서 쏘아지는 탄환 마냥 앞으로 튀어 나갔다.
던전학 시험장에 있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인 제슬마저도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루시의 기행.
영상을 보는 이들 모두가 루시의 움직임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 의구심은 머잖아 해결 되었다.
허공으로 쏘아진 루시라는 탄환이 첫 번째 방의 마지막을 지키는 기사의 약점을 가격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크하하! 훌륭하다! 그대는!…”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한 루시는 기사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두 번째 방으로 향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두운 동굴.
공략자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여러 장치가 되어 있는 곳.
그 한 가운데에 선 루시는 자신의 메이스를 치켜 들더니 한 치 망설임도 없이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루시의 메이스가 내리쳐지는 그 순간 늑대가 모습을 드러내다가 그대로 메이스에 얻어맞고 쓰러져버린 것이다.
“…미친.”
“아니 이게 무슨.”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시험장에 있던 이들이 하나 둘 당혹에서 빠져나와 목소리를 내던 그 때에.
루시는 깨갱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부러진 늑대를 내버려 둔 채 바로 세 번째 방으로 넘어가버렸다.
펼쳐진 것은 황야.
그 위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의 형상을 한 골렘들.
여긴.
여기는 방금 전처럼 통과하지 못 할 거야.
그럴 수 없게 설계된 곳이니까.
영상을 보며 충격에 빠진 제슬은 제발 악마들이 제 역할을 해주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루시는 그녀의 상상을 한참 뛰어넘은 존재였다.
‘좆밥 악마들♡ 내가 무서워서 다가오지도 못 하는 거야?♡’
루시는 도발적인 어투와 함께 악마 무리의 한 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본래 던전의 설계대로라면 표식이 새겨진 악마는 도주하고, 표식이 없는 악마만이 달려들어야 할 터이지만.
무슨 오류가 일어난 것인지 악마들은 표식의 유무와 관계없이 루시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렇게 악마들이 주변에 모인 순간 루시가 자신의 메이스를 아래로 내리쳤다.
방에 진입한 그 순간부터 신성을 끌어 모으던 메이스가 자신의 힘을 해방하며 충격파를 만들어 냈으니.
그 어떤 이도 죽지 않아 허약한 상태였던 악마들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표식이 새겨진 악마만 모두 쓰러트리면 되는 것 아니냐는 뜨악한 방식에 영상을 보던 이들 대부분이 입술을 우물거렸지만.
루흐비 쿠르텐만큼은 감명을 받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더 한 힘을 사용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대체 저걸 보고 어떻게 그런 발상을.”
“생각해보게. 알른 영애가 하는 것을 내가, 이 루흐비 쿠르텐이 못할 리 없지 않나.”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이 나이에 비해 규격 외의 신체능력을 지닌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루흐비 쿠르텐도 마찬가지다.
무력과 파괴를 관장하는 신의 가호를 지닌 그는 동세대의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뒤처지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
지금 루시가 벌이는 일 정도야 어렵잖게 재현할 수 있다.
“스스로가 지닌 힘에 확신을 지녔다면 나도 저런 발상에 도달할 수 있었을 터인데. 새삼 배움을 얻게 되는 군.”
근육을 더 키우는 것으로 확신을 얻어야겠단 말에 그의 친구들이 기겁을 하는 동안.
루시는 어느새 네 번째 방을 돌파하고 폐허가 된 복도에 도착한 상태였다.
복도를 내달리는 그녀의 움직임에는 여전히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무어라도 박살내겠단 기세를 지닌 루시가 폐인이 머무르는 방의 앞에 도착하자 폐인이 느긋이 문을 열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 이런 성급한 손님…’
다른 학생에게 그랬던 것처럼 과장스러운 인사를 건네려던 폐인이었지만 그의 인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기 전에 루시의 메이스가 그의 머리를 노리고서 날아들었으니까.
‘…이군요! 예의를 모르십니까?!’
‘그럼 좀 씻고 다녀♡ 악취나는 인간말종이 옆에 있으니까 절로 마음이 급해지잖아♡’
폐인은 어떻게든 루시를 자신의 무대로 초대하고자 했지만 루시는 그의 이야기를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고 공격을 퍼부을 뿐이었으니.
‘하! 알겠습니다! 그토록 죽기를 바라신다면 들어드리죠!’
‘푸하핳♡ 여자애 상대로 화가 나서 얼굴 시뻘개진 것좀 봐♡’
‘…그 입을 닥치게 만들어주마!’
0층으로 향하는 기믹이 발동되지도 않았거늘 인내심을 잃어버린 폐인이 검을 뽑아듬에 따라 보스전이 성립되었다.
“…저런 것도 가능했나.”
루시의 이름을 듣고 다급히 시험장에 방문한 루카는 영상 속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그녀가 상대하는 폐인은 기믹에 의해 약화된 상태가 아니잖나.
루흐비 쿠르텐조차도 답이 안보인다 그러던 이를 상대로 선전을 벌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저 보스를 가지고 놀다니.
“과연. 저 분의 진짜 장점은 따로 있었구나.”
루시가 나이에 비해 압도적인 능력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어지간한 현직 기사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신체 능력을 지닌 그녀는 분명 베네딕 알른의 뒤를 이어 왕국의 영웅이 될 수 있는 존재겠지.
하지만 아직 그녀는 그 정도로 압도적이지 않다.
이제 막 새싹을 피웠을 뿐인 그녀는 눈에 띄긴 해도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 도착하진 못했어.
3학년 학생 중에선 그녀와 비슷하거나 그녀보다 뛰어난 무력을 지닌 이가 몇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3학년 학생 중 그 누구도 쓰러트리지 못한 적을 농락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서 루시가 던전의 설계자이기에 가능한 반칙일 뿐이라 그럴 것이다.
분명 그 말은 옳다.
던전의 설계자이기에.
폐인이 어떤 행동을 할지 알고 있기에.
알른 영애는 압도적인 불리 속에서도 웃음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말이다.
단순히 폐인의 행동을 아는 것만으로 저런 기행이 가능할까?
몇 수 앞의 미래를 보는 것처럼 움직여 상대의 모든 걸 무위로 되돌리는 것을 누구나 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있나!
저건 루시 알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상대의 행동을 유도해서 자신의 손 위에서 놀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루시 알른만이 자신의 지식을 저런 결과로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이다!
루시 알른이라는 보석이 지닌 진정한 빛을 알아낸 루카는 눈을 반짝이며 붉은 색 마력이 퍼져나가는 복도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당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보스의 발악을 당신은 어떤 식으로 뛰어넘을 건가요.
방문객을 죽이기 위해 제작한 마법을 돌파하기 위해 당신은 어떤 수를 쓸 건가요.
루시 알른이 펼쳐 줄 기적을 기대하던 루카였지만 루시는 그가 바라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 방패를 치켜드는 것도 아니고.
마법이 발동되기 전에 보스를 박살내려 움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지도 않은 채.
루시는 폐인을 지나쳐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문을 닫아버렸다.
“…무슨?”
그러자 기믹이 발동됨에 따라 바닥이 무너져 내렸지만 벽에 박아 넣은 메이스에 매달린 루시 알른은 여전히 방 안에 머물러 있었다.
“진기한 발상입니다만 무의미합니다. 방 안에 숨는다 한들 마법을 피할 수는… 어라?”
왜 마법이 쏘아지지 않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