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통. 통.
분홍 소녀의 발걸음 소리가 파이프를 울렸다.
분홍 소녀와 푸른 사신은 ‘연금술사 아카데미’라고 쓰인 거대한 문을 지나, 파이프를 눌러 만든 길을 따라 나아갔다.
문을 지나서 나타난 풍경은 이제까지의 도시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돌과 도로, 가로수와 건물들로 가득했던 도시와 달리, 문 너머는 파이프로 만든 풀과 나무, 조약돌과 들풀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길을 따라 작은 언덕을 넘어가자, 끝없이 펼쳐진 벌판이 내려다보였다.
형형색색의 꽃과 풀이 어우러진 벌판, 그리고 그 중앙을 가로지르는 돌길.
그리고 그 너머의 거대한 건물.
“문밖의 도시도 엄청 대단했는데, 여기는 더욱 대단하네.”
분홍 소녀는 파이프로 풀과 꽃을 정밀하게 묘사한 것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풀이 이렇게 많이 있는 건 처음 보네. 게다가 정말 신경 써서 정밀하게 만든 것이 느껴져.”
푸른 사신도 분홍 소녀가 하는 말에 동의하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벌판을 내려다보았다.
이 벌판에는 마치 지금 바람이 불고 있는 것처럼, 풀이 자연스럽게 살랑이는 순간이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
벌판을 지나서 도착한 건물 근처에는 수많은 사람의 동상이 보였다.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똑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가득했다.
“아이들이 많네. 나랑 비슷한 나이로 보여.”
삼삼오오 뭉쳐서 걸어가는 아이들.
제자리에 서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
커다란 책을 꼭 껴안고 어딘가로 뛰어가는 아이.
그 아이들은 모두 제각기 특징적인 모습을 품고 있어서, 정말로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분홍 소녀는 즐거워 보이는 아이들의 동상을 보며, 살짝 쓸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도 원래라면 이런 곳에서 살았을까?”
“사람들이 잔뜩 있고, 똑같은 옷을 입고, 즐겁게 웃으며 대화하고 살았을까?”
푸른 사신은 조금 슬퍼 보이는 애착 인간의 뺨을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분홍 소녀는 푸른 사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면 정말 즐거울 것 같아.”
“저 위 계층에는 분명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남아 있겠지? 탑은 정말 정말 넓고 높으니까. 그럴 거야.”
“그러면 나도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곳에서 생활할 수 있겠지?”
분홍 소녀는 쓸쓸해 보였지만, 마지막에는 어쩐지 즐거운 꿈을 꾸는 것처럼 살짝 웃었다.
파이프로 만들어진 모형 아카데미를 어느 정도 돌아다니자, 푸른 사신은 조금 특이한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이상한 곳이 있어요.>
다른 곳은 정밀한 모형에 가까웠지만, 푸른 사신이 발견한 곳은 조금 달랐다.
모형이 아니라, 진짜처럼 인간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전시실>인가?”
분홍 소녀가 푸른 사신의 말을 듣고 찾아간 곳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넓은 방.
그곳에는 마치 사진처럼, 그림이 아니라 어떤 기억이나 장면을 그대로 보존한 거울들이 전시 중이었다.
그리고 그 거울들이 붙어 있는 벽 앞에는 언제나 1인용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이 방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한참 동안 의자에 앉아서 거울을 감상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거울 속에 사람들이 잔뜩 보여.”
파이프로 만들어진 모형보다 생동감이 넘치고, 다양한 색과 표정을 보여주는 인간들의 모습이 거울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뭘까?]
[수업 듣기 싫어….]
[탑이 또 한 층 줄어들었대!]
[교수님도 여기 오세요!]
거울 속에서 흘러나오는 장면은 여러 가지 일상의 단면을 잘라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전시실의 구석에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거울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달리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중년 남성의 모습을 비춘 거울들이었다.
[진화액도 연금술의 부산물.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것이다.]
[영원한 연금술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탑은 영원하지 않다. 빨리 방법을 찾아야 해.]
[사람들은 아직도 모른다. 이 탑이 영구 기관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노년이 된 남자의 모습을 비춘 거울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실패했다. 완성한 것은 그저 신의 힘을 빌려 거의 영원에 가까운 탑을 완성했을 뿐이다.]
[이 세계의 끝이 오기 전에 누군가, 답을 발견하길.]
분홍 소녀는 그 거울을 마치 홀린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다급해 보이는 푸른 사신이 뛰어들어, 문자열을 써 내려갔다.
<빨리 우리를 숨겨주세요!>
쿵. 쿵. 쿵.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강렬한 존재감.
‘강한 오브젝트!’
푸른 사신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전시실의 창문을 피해 숨어들었다.
“도대체…?!”
분홍 소녀가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푸른 사신이 온몸으로 입을 막아버려서 말을 뱉어낼 수 없었다.
그 순간 창문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비쳤다.
태양을 가릴 것처럼 커다란 몸통과 길쭉한 팔다리.
그 그림자는 마치 거미처럼 보였다.
***
세희 연구소, 사신 전용 지하 휴게실.
나와 황금 사신들은 서울숲에서 진화액을 이용한 죽음의 술래잡기를 즐기다가, 슬슬 질려서 세희 연구소로 돌아와 버렸다.
물론 진화액은 위험하니까, 진화액이 떨어지는 기둥 근처는 공간 절단으로 막아두었다.
그리고 곧장 지하 휴게실로 내려와서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갔다.
‘하, 따뜻하네.’
푸른 사신 실종 때문에 너무 열심히 일해서 그런지, 따뜻한 물속에 몸을 집어넣으니 노곤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황금 사신들도 나를 따라서 줄줄이 따라 들어와서, 따뜻한 물에 몸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물속에 들어온 황금 사신들은 온몸에 힘을 빼고 편안한 표정으로 물속을 둥실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동그란 뱃살만 물 위로 튀어나와 있어서 조금 귀여웠다.
물속에 있는 황금 사신들을 모아서 뱃살을 피아노 건반처럼 꾹꾹 누르고 있었더니, 휴게실에 설치된 TV에서 뉴스 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행성으로 인해 전국이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어제 새벽, 전 세계의 밤하늘에 지구와 흡사한 모양의 거대한 천체가 갑자기 출현했습니다.]
[오브젝트가 원인으로 보이는 이 현상은 밤새 계속되었고, 지금도 하늘에서 관측되고 있습니다.]
[천체 전문가에 따르면, 하늘에 나타난 행성은 지구를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천체는 대륙의 윤곽, 구름의 양상까지 비슷하지만, 바다의 색깔이 우리가 아는 푸른색이 아닌 검은색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SNS에서는 관련 사진과 동영상이 밤새 폭발적으로 공유되었고, 각종 추측과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한편 오브젝트 협의회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었고, 잠시 뒤 오전 10시에 1차 브리핑을 할 예정입니다.]
뉴스에서는 어디를 봐도, 내가 푸른 사신을 찾느라 연결한 검은 행성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내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커다란 장난을 친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히히.
그렇게 작게 웃으며 TV를 보는 도중,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 있었구나!”
수영복 차림의 예린이였다.
나를 발견한 예린이는 물속으로 들어오더니, 내 몸통을 꽉 껴안아 버렸다.
“사신이. 엄청 따뜻해.”
예린이는 작게 웃으며,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예린이는 요즘 별로 만나지 못했다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집에 누가 들어오는 것 같아서 방범 카메라를 설치했어.”
‘?’
그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예린이의 집에는 하얀 아귀를 배치해 뒀을 텐데 도둑이 들었다고?
하얀 아귀가 직무 유기를 하고 있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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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린이의 말을 들으며, 예린이 집에 배치한 하얀 아귀를 ‘아귀 지옥’에 집어넣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집안에서 없어지거나 한 물건은 없더라.”
“요즘, 세희 언니가 ….”
“저번에 보니까, 황금 사신이가….”
그렇게 한참 동안 내 뱃살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하던 예린이는 어느새 내 더듬이를 물고는 같이 휴게실에 마련된 TV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더니, 갑자기 제임스 쪽에 생각이 닿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만들어달라고 한 골든-메카-티라노 아머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드디어 티라노에게 황금 갑옷을 입혀줄 생각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히히.
***
모형 ‘연금술사 아카데미’의 전시실.
분홍 소녀와 푸른 사신은 숨을 죽이고,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쿵. 쿵. 쿵.
어느새 낮이 지나가 버린 모형 도시 속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강해 보여.’
푸른 사신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분홍 소녀의 눈앞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해를 먹는 거미?>
그 글씨를 본 분홍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닐 거야. 할아버지가 해를 먹는 거미는 언제나 탑의 최상층에 있다고 그랬어.”
분홍 소녀는 거대한 그림자에게 들킬까 봐,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해를 먹는 거미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것 같아. 할아버지가 읽어준 그림책에는 정말 크게 나왔거든.”
쿵. 쿵. 쿵.
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분홍 소녀는 ‘조금만 확인해 볼게.’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시선을 느끼는 오브젝트가 많아요!>
푸른 사신은 깜짝 놀라서 분홍 소녀의 귓불을 잡아당겼지만, 역부족이었다.
분홍 소녀는 그렇게 밖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다시 숨겼다.
“거미는 확실히 아니야. 오히려 조금 이상하게 생겼어.”
분홍 소녀는 약간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고 덧붙이며, 히히 웃었다.
푸른 사신은 분홍 소녀의 말을 듣고는 약간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뾰족한 마녀 모자 끝부터 시작해서 슬금슬금.
그렇게 시간을 들여서, 한쪽 눈만 창문으로 내밀었다.
<!>
푸른 사신이 바라본 곳에는 기형적으로 팔다리가 길쭉한 거대한 검은 아귀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푸른 사신은 그 검은 아귀가 예전 계층에서 봤던 검은 석상과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 순간, 검은 아귀와 푸른 사신의 눈이 마주쳐 버렸다.
앙대!